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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노동 체제가 성별분업을 정당화하고 고착화한다는 비판은 오래되었다. 장시간 노동 체제에서는 가사, 돌봄 등으로 '방해받지' 않고 전일제로 임금노동에 몰입할 수 있는 노동자가 전형적인 노동자 상이 되는데, 그는 남성이다. 대신 그의 가족 책임을 대신해 줄 '누군가'가 필요한데, 이는 십중팔구 여성이다. 이런 방식으로 가부장제와 장시간 노동 체제는 꽁꽁 결탁해 있다.

이런 성별 분업과 여성의 이중 부담을 줄이고, 이를 통해 저출산 문제까지 해결하겠다며 정부가 지난 10여년 동안 지속적으로 추진한 것이 유연근무제다. 박근혜 정권이 '고용률 70% 로드맵'의 핵심으로 시간제 일자리를 추진하면서 정부와 기업은 지금까지도 시간제 일자리가 유연근무제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문재인 정권에서도 '유연근무제 가이드라인'이 발간되는 등 정부의 유연근무제 추진은 지속되고 있다.

게다가 유연근무제는 기혼 여성을 주된 정책 대상으로 하고, 일/가정 양립, 저출산 대응책, 여성의 경력단절 예방, 일자리 창출, 정부경쟁력 강화, 국가경쟁력 제고 등에 대해 만병통치약처럼 이용되어왔다. 

그런데, 장시간 노동체제는 그대로 남아 있는 채로, 여성노동자들만 유연근무제를 사용하는 사람이 되면, 여성노동자는 '제대로' 일하는 전일제 남성 노동자의 보조적 위치에 머물게 되는 것은 아닌가? 단축근무하거나 시간을 조정해서 '유연하게' 일하는 여성들이 가족책임을 더 많이 떠맡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여성주의와 유연근무제를 연결시키려는 것이 오히려 억지가 아닌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월례토론에서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 저자인 국미애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연구원을 모시고 이런 질문에 대해 토론을 나눴다.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 (국미애, 2018, 푸른사상)
 유연근무제와 페미니즘 (국미애, 2018, 푸른사상)
ⓒ 푸른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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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을 양적으로 조절 가능한 문제로만 보는 시각의 함정 

국미애 연구원은 공식적인 노동시간 단축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난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노동시간 단축만을 얘기하는 것 역시 시간의 양적 배분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은 시간이 단순히 양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문제로 보고, 노동시간을 둘러싼 다양한 갈등과 대립을 유급노동시간 단축으로 해소될 문제로 축소시킨다.

예를 들어, 한국의 노동시간은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길다는 수사는 너무 익숙하지만, 여기에는 누구의 어떤 장시간 노동인가 라는 질문은 빠져 있다. 어떤 노동자들은 일거리가 부족하거나, 긴 시간 일하고 싶지만 기회가 없을 수 있다. 또, 노동시간 혹은 노동자의 시간을 둘러싸고 우리는 성별, 결혼여부, 부모역할, 개인의 열망 등에 따라 다양한 갈등과 불균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노동시간을 둘러싼 논의 중 일부만을 차지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기획으로서의 '노동시간 유연화'가 아닌, 노동자가 시간에 대한 재량권과결정권을 높이는 방향으로의 '유연근무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미애 연구원은 비판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기업이 사업상 이해를 목적으로 유연근무제를 시행할 때조차 거기에는 노동자의 삶에 일 이외의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노동자의 '임금노동시간'에만 관심이 있는 장시간 노동 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연근무제는 전통적인 노동시간 제도와 장시간 노동 체제의 파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 기존의 성별분업을 고착화하는 데 머무르지 않도록 유연근무제의 정착과 확대를 모색하는 과정에 여성주의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 국미애 연구원의 주장이다. 

유연근무제, 기혼 여성 노동자를 위한 정책?

이를 위해, 유연근무제가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유연근무제 사용을 어렵게 하는 배경은 무엇인지 분석한 것이 이 연구의 주된 내용이다. 전국 지자체 공무원의 유연근무제 유형별 자료를 분석하고, 유연근무제가 시행되고 있는 직장에 다니는 24명을 인터뷰한 결과, 사실 유연근무제는 남성이 더 많이 쓰고 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것은 시차출퇴근형이었다.

여성들이 많이 쓰는 유연근무제는 시간제와 재택근무 유형인데, 이 중 4시간 노동을 기본으로 하는 시간선택제는 일자리 쪼개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간제 일자리를 제외하면 사실상 여성들이 오히려 유연근무제에 대한 접근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또, 대부분의 회사에서 비정규직은 '공식적으로' 유연근무제 활용이 불가능했다. 비정규직에 여성이 많은데, 정작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는 제도의 실행 대상에 끼지도 못 했다. 유연근무제가 기혼 여성 노동자를 위한 정책이라는 수사가 전혀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런가하면, 유연근무제를 실제로 쓸 수 있는지 여부에는 정책과 제도보다 관리자 요인이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내 상사가 유연근무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노동자에게 어떤 재량권을 주느냐에 따라 유연근무제를 사용하는 노동자의 처지가 천차만별이 된다.

10시에 출근하는 시차출퇴근제를 신청했는데, 팀 회의를 8시 30분으로 잡는 팀장이 있으면 유연근무제는 공허한 구호에 머물고 만다. 직급으로 봐도 공무원으로 치면 6급 미만의 낮은 직급에서만 주로 쓸 수 있었다. 제도 뿐 아니라 노동자들이 노동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일상을 수행하고 있는가가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2019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하여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요구하며 열린 “3시스탑 조기퇴근시위”
 2019 세계여성의날을 맞이하여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요구하며 열린 “3시스탑 조기퇴근시위”
ⓒ 한국여성노동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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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근무제, 시간주권에 대한 여성주의적 개입?

국미애 연구원은, 이렇게 유연근무제가 육아 부담이 있는 기혼 노동자라는 특정한 인적 속성을 지닌 사람만을 위한 제도로 명명되고, 주변화된 제도로 인식될 때에는 장시간, 전일제 노동을 당연시 하는 일상에 균열을 가져올 수 없을 것으로 봤다. 유연근무제가 노동과 시간을 새로 보게 하는 제도로 설 수 있을 때에야, 장시간 노동체제의 바깥을 상상하게 하는 제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꼭 필요한 전제가 있다. 유연근무제는 반드시 '고용 안정성'과 결부되어 제도화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유연근무제가 불안정, 저임금, 보조적 일자리로 인식되고, 실제로 이런 자리들로 채워질 때 대안으로서 유연근무제는 힘을 가질 수 없다.

유연성과 불안정성이 같은 것이 아니도록 새로 의미화하기 위해서는, 유연근무제 일자리들이 '좋은 일자리'로 구성돼야 한다. 근본적으로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보장하는 방향에서 노동시간 문제가 새로 고민돼야 한다. 노동자의 '임금노동시간'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시간'으로 노동운동을 비롯해 우리 자신의 관심이 확장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유연근무제가 가정에서의 성별분업과 임금노동시장에서의 성별 분업이 만나는 지점에 서서 성별분업을 고착화시킨다는 비판에서, 여성주의적 가능성을 내다보는 것 사이에 논리적 비약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유연근무제가 장시간 노동 체제에 균열을 가한다는 것이 가능한 기획일까?

실제로 이미 많은 직장에서 노동자의 삶과 필요에 따른 유연근무가 아니라, 생산량과 기업의 생산계획에 맞춘 강요된 유연성이 넘치도록 작동하고 있다. 이미 초단시간 노동자들은 유연하게 단시간 근무 중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도 유연근무제가 적용된다면, 이들에게는 유연성이 불안정성과 등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연근무제를 특정 집단(육아 부담이 있는 기혼 여성 노동자)의 것으로 딱지붙이고, 유연근무제를 사용하는 노동자들을 게토화시키는 현재의 담론을 비판한 이 연구조차 기혼/육아부담 있는 사무직 여성 노동자의 경험을 주된 분석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이런 질문에 시원하게 답을 내놓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 

판매직으로 일하는 40~50대 여성 노동자들은 유연근무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근무시간의 재량권이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에게 유연근무제는 어떤 의미인지, 늘 최저임금 근처에서 임금수준이 결정되는 단시간 여성 노동자들에게 유연근무제가 시간 주권을 찾는 데 힘이 되는 제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결되어야 하는지, 비혼 여성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노동시간 재량권은 어떤 의미인지 살필 때, 여성주의가 유연근무제를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에 진지한 답변이 가능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노동시간센터 월례토론은 한국사회 노동시간과 노동자의 삶을 다양하게 살펴보는 열린 토론 자리이다. 4월 월례토론은 「과로자살」(가와히토 히로시 저, 한울아카데미, 2019) 역자 김명희 선생을 모시고 4월 18일 진행 예정이다.


태그:#유연근무제, #여성노동, #페미니즘, #장시간노동, #일가정양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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