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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 스누피:더 피너츠 무비 > 포토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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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루스카이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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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상상 속에서 함께 놀던 친구는 만화 피너츠에 등장하는 아이들이었다.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 사이에서 특히 루시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심술궂은 루시는 찰리 브라운을 집중적으로 괴롭히는데, 찰리는 원작자 찰스 먼로 슐츠가 가장 아끼는 그의 페르소나다. 자연히 루시를 미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영리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여느 소녀처럼 선행에 집착하지 않는 루시가 좋았다.

루시는 천성이 공격적이다. 심지어 짝사랑하는 슈뢰더에게도 공격성을 감추지 않는다. 취미는 복싱. 야무지게 글러브를 끼고 스누피를 향해서 주먹을 휘둘렀다.

'왜 지금까지 싸움을 배울 생각을 못 했을까?'

지난해 여름, 처음으로 주짓수를 배우면서 생각했다. 나는 싸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할 때도 '싸움을 잘할 것 같다'거나 심지어 폭력적이라는 말도 들어봤다. 도대체 왜? 우연으로라도 싸움에 휘말려 본 적이 없고 싸움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데. 설마 지지 않으려는 근성이나 지나치게 솔직하고 신랄한 면모, 받은 것(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을 잊지 않고 돌려주는 버릇 때문인가?

그게 어떻다고. 만약에 남자였다면 카리스마 있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 실제로 폭력을 일삼는 남성 앞에 '상남자'라는 타이틀이 붙는 일이 드물지 않다. 누구는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데도 상남자이고 누구는 잘 웃지 않고 신랄하다고 해서 폭력적이라니,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싸움을 배워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는 충격적일 정도로 싸움에 무지했다. 왜 아니겠는가? 나는 폭력이 싫고 내가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상상만으로도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이 나와 완전히 격리된 곳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는 정말 순진한 희망 사항이다. 여성이 얼마나 쉽게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지 알면 폭력을 특별한 것으로 간주하고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문제는 근육이 아니라 생각
 
 1월 21일 보도 된 여성신문
 1월 21일 보도 된 여성신문
ⓒ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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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21일 여성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보자. 기사에 따르면 한국에서 일어나는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 등 강력범죄 피해자 중 91%가 여성이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의 93.5%가 여성이다. 2015년부터 최근 3년간 살인, 강도, 방화의 발생은 줄었지만 성폭력 범죄는 27.8%나 증가했다. 통계에 집계되지 않은 가정 폭력과 데이트 폭력은 또 어떤가. 한마디로 폭력을 행사하는 성별은 남성이고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성별은 여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여성. 구도가 이처럼 명백한데도 남성우월주의자들은 이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적당히 눙치면서 넘어갈 생각만 한다. 또 수많은 통계와 연구가 심각성을 일깨우는데도 이를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개인 간의 다툼으로 축소하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수전 브라운 밀러는 강간의 역사를 집대성했다. 그는 4년을 투자해 6백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원고를 썼다. 그 위대한 결과물이 바로 페미니즘의 고전인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Against Our Will)다. 책의 막바지에 작가가 강간을 연구하는 동안 틈틈이 주짓수와 가라테 훈련을 받은 대목이 등장한다. 작가는 우리가 싸우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비참할 만큼 발달하지 않은 근육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자리한, 때리는 것에 대한 금기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금기는 프랑스의 작가 비르지니 데팡트가 쓴 '킹콩 이론'(King Kong Theorie)에도 언급된다. 작가는 강간 당하던 중 의도적으로 무의식 상태가 됐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더듬는다. 그는 주머니 안에 칼이 있었음에도 가해자를 공격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한 남자를 피 흘리게 할 수 없었다.' 

나는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적이 있다. 바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호신술 세미나에서였다. 그 자리에 모인 스무 명에 가까운 여성이 '강간의 타깃이 되고 고립되어 주먹으로 두들겨 맞거나 목이 졸릴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도 가해자를 제압할 신속하고 효율적인 방어법이 무엇인지 답하지 못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오히려 지치고 기절하거나, 가해자를 자극하기나 할 몸부림이 여성들이 알고 있는 최선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단 한 번도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치는 연습을 해본 적이 없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목을 조르는 남자의 팔을 어떻게 부러뜨리는지 배우지 못했다. 가해자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얼어붙지 않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폭력을 알아야, 폭력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다

여성은 싸움을 모르고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그것이 여성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싸움은 너무 과격하다는 편견 때문에, 다칠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배려 덕분에, 싸움을 모르는 존재로 길들여진 것이다. 그 결과 일부 여성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좋은 답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은 마치 사칙연산을 모르지만 함수를 배우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폭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것인가?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자 싸움을 배워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졌다. 하지만 의지가 충만한 것과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은 별개다. 싸움의 어려움은 운동의 그것과 결이 다르다.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힘이 셀 때 그 힘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한다. 두려움에 압도됐을 때 나타나는 반응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다. 팔과 다리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매일 같이 실력의 차이를 체감하면서 때로는 몸이 아니라 마음을 다친다. 뒤늦게 후회하고 원망도 해봤다.

'루시처럼 샌드백이라도 두들길 걸.'
'아니, 왜 그 흔한 태권도도 안 가르쳐 준 거야?'


그 순간 누군가의 말을 떠올렸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시계가 천천히 가고 있었음을 깨닫는 것이라고. 이 나이까지 싸움을 몰랐고 수전 브라운밀러가 아니었으면 싸움에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늦됨에서 비롯된 핸디캡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계가 천천히 가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부터라도 시곗바늘을 제 자리에 돌려놓을 것이다. 과정이 고되거나 더딜지라도 괜찮다. 결코 멈추거나 거꾸로 가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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