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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1993.2.25
 국회의사당 앞에서 거행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고 있다. 1993.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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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4대 대통령선거는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 민주당의 김대중 후보,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 외에도 박찬종(신정당), 이병호(대한정의당), 김옥선(무소속), 백기완(무소속) 후보가 각각 입후보하여 1대 6의 경쟁률을 보였다.

선거전이 시작되면서 김영삼ㆍ김대중ㆍ정주영의 3파전으로 압축되었다. 그러나 유권자의 반응이나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김영삼ㆍ김대중의 양김 대결양상으로 나타나서 '2강 1약'의 현상을 보였다.

예상대로 중앙선관위가 발표한 최종집계를 보면 민자당 김영삼 후보 997만 표로 41.1%, 민주당 김대중 후보 804만 표로 33.4%, 국민당 정주영 후보 399만 표로 16.1%를 각각 얻고, 신정당 박찬종 후보는 151만 표(6.3%)를 득표했다.

김영삼 후보는 '신한국창조'를 집권공약으로 제시하면서 바람직한 21세기의 한국을 건설하겠다고 다짐했고, 김대중 후보는 '대화합의 정치'를 비전으로 내세우면서 지역간ㆍ빈부간ㆍ도농간ㆍ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위화감과 적대감을 해소하는 데 국정운영의 중점을 두겠다고 공약했다. 정주영 후보는 '민부(民富)의 시대'를 약속하면서 경제대국과 통일한국을 실현하겠다고 다짐했다.

선거전은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 총재직을 떠나 중립내각을 구성하여 역대 어느 선거와는 다른 정치상황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대선기간 동안 중립내각의 공정성 문제가 최대 쟁점으로 부각될 만큼 '중립성 시비'가 제기되었다. '중립내각'은 관권의 선거개입 시비와 민자ㆍ국민당의 금권시비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선거전은 국민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후보자의 TV토론이 실현되지 못하고, 민자당 측의 김대중 후보에 대한 '용공음해'와 '이선실 간첩단사건' 등 공안사건이 선거에 이용되었으며, '부산기관장 대책회의'라는 부산횟집사건이 대선의 막판 변수로 작용했다. 부산지역의 기관장들이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모였다가 폭로된 이 사건은 오히려 지역감정을 부채질하여 몰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또 재벌기업의 정치개입이 선거결과와는 상관없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14대 대통령선거가 가져온 결과 중 특기할 것은, 먼저 32년 만의 문민정부 탄생이며, 정주영 국민당 후보의 참패로 재벌의 정치참여에 보인 국민의 부정적 시각이다.

93년 2월 25일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32년 만의 문민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다. 61년 5ㆍ16군사쿠데타 이후 한 세대 동안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의 3대에 이르는 군사정권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문민정부ㆍ문민시대를 연 것이다.

김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며 "오늘부터 정부가 달라지고 정치가 달라 질 것이며, 변화와 개혁을 통해 살아 있는 안정이 이 땅에 자리잡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 대통령은 부정부패 척결, 경제회복, 국가기강 확립을 3대 당면과제로 제시하면서 '신한국창조'를 자신의 국정지표로 제시했다.
  
대통령 임기 시절의 고 김영삼 대통령
 대통령 임기 시절의 고 김영삼 대통령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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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 정부의 첫 인사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하여 '개혁추진'에 차질을 가져오지 않을까 염려하는 속에서 김 대통령은 취임 첫날 청와대 앞길을 개방하는 것을 시작으로 과감한 개혁정책을 펴나갔다.

개혁작업의 첫 단계는 고위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통해 부정축재나 투기 공직자의 숙정작업을 벌였다.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법으로 제도화했고 사정활동을 통해 비리구조에 깊숙이 개입했던 고위공무원들의 숙정작업을 폈다.

둘째 단계는 군의 문민화 작업으로서 육사출신 장교들의 사조직인 하나회의 12ㆍ12관련 장성 등 이른바 정치군인 집단의 축출에 나서 당시 하나회 회원인 김영진 참모총장(17기)과 서완수 기무사령관(19기)을 전격 경질한 데 이어 곧 수방사령관과 특전사령관을 전격 교체하는 등 군의 숙정에 나서 군부 전체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셋째는 금융실명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하여 금융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이튿날인 93년 2월 27일 새 정부의 첫 국무회의에서 자신과 부인 손명순 명의의 재산 17억 7,822만 원을 공개하여 공직자 재산공개의 테이프를 끊었다.

공직자들의 재산공개는 많은 국민의 관심을 불러모으면서 큰 정치사회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우선 박양실 보사부장관과 허재영 건설부장관, 김상철 서울시장이 부도덕한 축재시비에 휘말려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표를 내고 물러나게 되었다.

우리나라 유사 이래 최초로 실시된 공직자의 재산공개는 태풍을 몰고 왔다. 사회지도층의 재산이 속속 공개되면서 막대한 부의 축재 과정에 대한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고, 투기 등 부도덕한 재산축적 과정에 대한 언론기관의 폭로작업이 이어지면서 재산공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민자당은 '재산공개진상파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물의를 빚은 의원에 대한 숙정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결과 김재순 전 국회의장, 유학성ㆍ김문기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했고, 정동호 의원은 제명조치를 당했으며, 이원조ㆍ금진호ㆍ조진형ㆍ김영진ㆍ남평우 의원 등은 공개경고를 당했다.

정부도 재산공개로 물의를 빚은 정성진 대검 중앙수사부장, 최신석 대검 강력부장, 조규일 농림수산부 차관, 강신태 철도청장, 강두현 경찰위원회 상임위원 등 차관급 5명을 해임하고 10명에 대해 경고했다.

또 청와대의 박노영 치안비서관과 정옥순 여성담당비서관이 투기의혹을 받고 사퇴한 데 이어 김덕주 대법원장이 판사들의 부동산 과다보유에 도덕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민자당은 1, 2차 재산신고액의 차이가 많고 비리의혹이 짙은 이학원ㆍ박규식 의원을 제명하고 김동권 의원에게 당원권 6개월 정지, 정호용ㆍ김영광ㆍ남평우ㆍ윤태균ㆍ이현수 의원을 비공개 경고했다.

재산공개 과정에서 비리와 관련 의원직을 사퇴한 김재순 전 국회의장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토사구팽(兎死狗烹)' 이란 말을 남겨 세간의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지난 1997년 5월 17일 대검찰청 현관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승용차에 탑승, 수감장소인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문민정부의 소통령"으로 불리던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지난 1997년 5월 17일 대검찰청 현관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승용차에 탑승, 수감장소인 서울구치소로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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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아들의 월권과 비리 그리고 경제정책의 실패로 IMF 외환위기를 당하여 국민은 미증유의 경제적 위기를 겪게 되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되고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제2의 국난'이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영삼, #IMF, #14대_대통령선거, #금융실명제, #문민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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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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