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연극제 포스터

▲ 청파연극제 포스터 ⓒ 청파연극제

  
서울역 인근 어느 쇠락한 거리를 걷다 요상한 소리와 마주쳤다. 어느 젊은 남녀가 대차게 싸우는 소리였는데 싸우다 말고 웃다가 웃다 말고 싸우다가 하는 게 꼭 정신 나간 사람들 같았다. 마침 할 일도 없던 터라 나는 소리를 따라 청파동 외진 상가 건물 앞까지 걸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연극 한 편을 보게 되었다.

도착한 곳은 채 공사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커다랗고 하얀 상점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곳을 '뱅가드'라고 불렀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평일 저녁 뱅가드에선 20대 젊은 남녀 대여섯이 모여서 한창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들은 소리는 연극장면의 일부로, 옆집에 사는 남녀가 층간소음 때문에 열을 올리는 장면이었다.

연습을 지켜봐도 되겠느냐 물으니 이들은 흔쾌히 무대 한 구석에 자리를 내주었다. 무대라고 해봐야 문 없이 뻥 뚫려 있는 공간 두 개와 그 공간 사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정도였는데, 정식 연극무대라기보다는 구할 수 있는 공간에 어울리는 극을 써 연극을 준비하는 모양 같았다. 자연히 연극을 볼 수 있는 객석도 마땅치 않아 보였는데 이들은 무대 한 쪽 벽에 간이 의자 몇 개를 놔두고 공연을 진행할 거라며 웃어보였다. 하기야 극이 펼쳐지고 그 극을 볼 수 있다면 그곳이 무대고 객석 아니겠는가.

작가·배우 대부분 첫 경험, 초보들의 즐거운 연극
 
청파연극제 연극 <층간소음> 연습장면

▲ 청파연극제 연극 <층간소음> 연습장면 ⓒ 김성호

  
나를 영화평론을 오래 해온 사람이라 소개하고 한 번 각본을 볼 수 있겠느냐 청하니, 배우 하나가 흔쾌히 제 대본을 넘겨주었다. 열장 남짓한 대본 첫 장에는 <층간소음>이란 제목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살펴보니 서울로 상경해 기댈 곳 없는 젊은 남녀가 층간소음으로 고통 받으며 벌이는 한 판 소동극이었다.

배우들 중 일부는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한 이들이었고 몇몇은 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배우로 연습에 참여한 건 모두 네 명으로, 여기에 연출자와 각본가가 따로 있어 제법 극단의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작가 양희수는 연극을 쓴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층간소음> 외에도 <이각의 사람들>이란 작품을 함께 썼는데, 5월 4일과 5일 양일 간 진행되는 공연에서 두 작품을 함께 선보인다고 했다.

양 작가는 "공간이 일반 무대가 아니라 특수한 장소인 만큼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데 주력했다"며 "<층간소음>은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 가장 흔한 주거형태인 원룸 자취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갈등을 다뤘고, <이각의 사람들>은 폐가를 배경으로 인터넷 방송을 만드는 유튜버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열정 많은 청춘들의 축제, '청파연극제'
 
청파연극제 청파연극제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연출자·배우 단체사진

▲ 청파연극제 청파연극제를 준비하고 있는 작가·연출자·배우 단체사진 ⓒ 청파연극제

  
이날 모인 극단원들은, 이들을 극단원이라 부르는 게 가능하다면, 두 작품이 공연되는 행사를 '청파연극제'라고 불렀다. 단순히 연극을 선보이는 행사를 넘어 연극인이 아닌 모두가 자유롭게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로 기획했다는 뜻이란다. 실제로 연극에 참여한 이들 중 상당수가 연극을 경험해본 적 없는 이들로, 우연히 이런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두 작품 모두에 출연하는 박세현씨는 "우연히 아는 형이 제안을 해주셔서 참여하게 됐다. 이번이 처음 연극을 하는 건데 기대 된다"며 "처음이다 보니까 미숙한 게 많다고 스스로도 느끼는데 함께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보완해나가는 재미가 있다"고 즐거워했다.

<층간소음>에 주연으로 나서는 김다현씨도 "배우로 활동하는 지인이 제안을 해줘서 참여하게 됐다"며 "연극과 관련된 대학을 졸업했는데 아직 제대로 무대에 서본 경험은 없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주제지만 작가랑 배우들이 즐겁게 만들어나가고 있는 작품이니 관객들이 와서 보면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시간 가까운 연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같은 장면이 마치 살아 있는 듯 수시로 모습을 바꿨고, 때로는 배우에게서 때로는 연출자와 작가에게서 작품을 더 나은 무엇으로 만드는 아이디어가 제시됐다. 일류 작가와 배우들의 작품에선 만나보기 힘든 정제되지 않은 힘이 있었고, 또 그만큼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이 엿보였다. 하지만 뭐, 그래도 어떤가!

객석 없는 무대라도 즐거우니 괜찮아!
 
청파연극제 연출자와 배우들이 연습 도중 회의를 하고 있다.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는 두 개의 공간으로 구분된 작은 갤러리다.

▲ 청파연극제 연출자와 배우들이 연습 도중 회의를 하고 있다. 연극이 펼쳐지는 무대는 두 개의 공간으로 구분된 작은 갤러리다. ⓒ 김성호

  
연습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청파연극제는 참여하는 작가와 연출자, 배우들의 축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언론에도 소개되지 않고, 또 표를 찍어내거나 팔아치울 능력도 마땅치 않아 보이는 청년들이 어렵사리 저들만의 작품을 쓰고 연기하는 모습이 그 자체로 하나의 놀이 같았던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고정된 객석 하나 없는 곳에서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그래서 해결해야 할 수많은 어려움에도 이토록 즐겁게 연습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어찌되었든 작품은 만들어지고 말테니까.

놀라운 건 청파연극제가 이번을 시작으로 지속될 것이란 점이다. 이들은 가정집과 폐가, 갤러리 등 기존엔 연극무대로 쓰이지 않았던 곳을 무대삼아 공연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이들의 열정만 진짜라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혹시 아나? 이것이 꽤나 위대한 축제의 서막이 될지 말이다. 역사에 남은 예수의 산상수훈도 갈릴리 어느 야산에서 벌어진 일이었으니.

청파연극제는 5월 4일 토요일엔 두 차례, 5일 일요일엔 한 차례 공연이 예정돼 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티켓을 판매하고 있다는데, '크라우드티켓'이란 사이트에서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경험이 짧은 이들의 작품이라 눈 높은 이들의 기대엔 미치지 못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든다. 그래서 선수를 치며 글을 맺는다.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란 유명한 시에서 연탄재 함부로 차고 다니는 사람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고. 하물며 청춘 여럿이 공을 들인 작품임에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청파연극제 이각의 사람들 층간소음 양희수 신다빈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