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불화를 겪는 친구 A가 있었다. 나와 친구 셋은 A를 위로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위로의 최고봉은 같이 욕해주기. 객관적인 이야기는 하등 쓸모없다. 자신들의 문제점과 해결점은 본인들이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맘이 풀릴 때까지 불문곡직 같이 욕해주면 된다. 슬그머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내색을 비출 때쯤엔 눈치껏 멈춰야 한다. 위로한답시고 너무 가도 문제다. 그 시간이 지나고 보면 내 배우자를 너무 바닥으로 보는 것도 속상하니까.
 
술이 좀 들어가자 정의감 넘치고 다혈질인 B가 A에게 말했다. "너 정도면 얼마든지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어. 당장 헤어져 버려." A는 그러고 싶지만, 아들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A는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들을 낳아 아직 아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B는 말했다. "지 새끼 지가 잘 키우겠지. 아들 놔두고 집 나와. 니가 그렇게 물러 터져 있으니 니 남편이 정신 못 차리고 그러는 거야." 말이 좀 심한 거 같아서 나는 "너라면 애들 놔두고 나올 수 있어?" 물었고, 친구 B는 당연하다고 했다. 간담이 서늘했다.
 
나도 남편과 다툴 때도 있고 보따리를 싸서 친정으로 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두 아들과 함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떨어져 있을 땐 남편 몰래 아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한 번도 아이들과 떨어지는 걸 상상해 본 적이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모성애가 남달리 깊어서는 아니고 아이들과 친밀해서인 것 같다.

큰아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용돈을 주면 학교 근처 분식집에서 떡꼬치 같은 것을 사 먹고, 맛있으면 나 주려고 꼭 한 개를 들고 왔다. "엄마, 진짜 맛있어. 먹어봐." 내가 뭐든 맛있으면 사서 들고 오는 것을 보고 아이도 따라 하는 거다. 이런 걸 보면 남편보다 낫다. 그러니 만에 하나 남편과 못 살더라도 아이들과 떨어지는 상상을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니까
 
 사랑 없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영화 <러브리스>의 한 장면.

영화 <러브리스>의 스틸 컷 ⓒ 그린나래미디어


B는 자신의 선택에 현실적인 이유를 들었다. B의 남편은 개인사업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하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빠랑 있는 게 낫다는 거다. B는 그동안 아이들 키우느라 경력 단절되어 갈 데도 없고 당장 식당 같은 곳에서 일해야 하는데 그 월급으론 아이들을 키우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양육비를 주겠지만 법적 양육비는 현실적으로 부족하니까. 아빠랑 살게 하더라도 아이들과는 주기적으로 만날 거라고 했다. 듣고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니다. 나도 감정적으론 아이들과 함께지만 현실적으론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해봤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주제가 A의 부부싸움 위로에서 아이의 양육 문제로 넘어가 있었다. 부부가 헤어질 때 아이가 '누구랑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얼마만큼 설명을 듣고 상황을 이해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으로 우리는 중지를 모았다. 엄마 아빠가 헤어지지만, 너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다는 이야기, 너를 버리는 게 아니고, 너 잘못은 더구나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나이가 어릴수록 분리불안이 심할 테니 더 많은 스킨십과 애정 표현이 필요하다. 아이가 소외되지 않도록. 이런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니까.
 
영화 <러브리스>는 이에 관한 이야기다. 제냐와 보리스는 이혼을 앞두고 있다. 서로에겐 이미 미래를 약속한 새 연인이 있다. 헤어지기로 했으니 조용히 정리하면 좋으련만 이 부부는 마주치기만 하면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비수를 날린다. 이 냉랭한 집안에는 12살 아들 알로샤가 있다. 같은 공간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잊은 듯 두 사람은 서로 아이를 떠넘기려 큰소리를 낸다.

누구도 아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이의 안위는 어떻게 보장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는 곧 버려질 자신의 신세를 화장실 문 뒤에서 듣게 되고, 충격과 슬픔에 온 입을 틀어막고 흐느낀다. 두 사람이 날린 비수를 아이가 홀로 서서 다 맞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가 흘리는 피눈물을 부모는 보지 못한다.
 
멍하게 창밖 바라보던 아이의 모습, 잊을 수가 없다  
 
 <러브리스>는 이혼을 앞둔 부부 사이서 완전히 소외된 아이의 실종 사건을 다룬다.

영화 <러브리스> 스틸 컷 ⓒ 그린나래미디어


제70회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 2018 세자르 영화제 외국어 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는 러시아를 배경으로 계절은 겨울이다. 화면을 지배하는 청회색은 서늘함을 자아내고 영화 전반에 배경음악이 거의 없다. '러브리스' 즉, '사랑 없는'이란 말의 삭막함, 쓸쓸함, 고독을 화면 전체로 뿜어내고 있다.

감독 안드레이 즈기아긴체프는 전작인 엘레나와 리바이어던으로 칸 영화제뿐 아니라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이력이 화려한 감독이다. 주로 소외된 개인이나 부조리한 인간의 내면을 심도 있게 읽어내는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이 작품은 그런 작품들 사이 최고인 것 같다.
 
새벽에 침대에 걸터앉아 멍하게 차가운 창밖을 바라보던 알로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정처가 없는 아이의 모습에 내 마음도 길을 잃었다. 아침이 되고 아이는 엄마가 준비해준 아침을 먹는다. 엄마는 휴대전화만 쳐다보느라 아이의 절망을 보지 못한다. 눈물을 훔치며 아이는 학교로 향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아이가 사라진 줄도 모르는 부부는 각자의 연인들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학교로부터 이틀 동안이나 아이가 결석했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야 아이의 부재를 알게 된다.
 
알로샤는 초반에 이렇게 잠깐 등장하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영화는 끝끝내 아이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다. 경찰도 아이의 실종에 무관심한 상태에서 자원봉사자로 꾸려진 민간단체의 노력은 인상 깊다. 아마도 감독은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사회가 돌아가는 힘은 이런 소시민들의 정의감과 소신임을, 더 나아가 여전히 존재하는 인류애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잔상에 시달리던 나는 메이킹필름을 찾아보았다. 영화를 볼 때는 내 눈물도 얼어붙었는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는데 이것을 보고 울음이 터졌다.

부패한 사체를 보며 아들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영화의 클레이맥스 장면이었다. 제냐는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아들은 가슴에 사마귀가 있는데 이 아이는 없으니 아니라고 절규했다. 그래서 나는 아닌 줄 알았다. 카메라가 스치듯 사체를 비출 때도 부패 정도가 심해서 알아볼 수 있겠냐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아이 엄마가 아니라니까 아닌 줄 알았다.
 
이 장면을 촬영하면서 엄마 아빠 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중 감독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눈물을 흘렸다. 비로소 생각이 들었다. 시체가 알로샤일지도 모른다는. 그러고 보니 그다음 대사도 인상적이다. 검시관은 자식의 죽음을 부정하는 부모들을 많이 봐왔다며, 그러니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유전자 감식을 해보자고 한다. 제냐는 극렬히 저항한다. 아닌데 왜 하느냐는 거다. 그리고 남편 보리스는 벽에 기대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고 오열한다. 제냐도 보리스도 어쩌면 알았구나.
 
생각할수록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영화 <러브리스>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는 각자의 연인과 삶을 꾸리고 있는 몇 년 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가정을 꾸렸지만, 그들의 공허한 표정에서 사랑은 또 없다. 메이킹필름에 나오는 감독의 말이 가슴에 남는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자신의 삶을 후회하는 일이 대체 왜 생겨나는 걸까. 자신이 살아온 길이 전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걸까. 엄마는 아이에게, 12년이나 허비했어, 네가 그것을 알기나 하냐고 말한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사람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거야.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한 거지. 우리는 타인을 수단으로밖에 여기지 않아. 그리고 그걸 사랑이라 부르고 있지."
 

생각할수록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말이다. 5월은 가족의 달. 아이들에게는 뽀로로나 어벤져스를, 보기 불편하지만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영화는 어른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특히 아이가 있는 어른들에게 꼭.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기재합니다.
사랑 이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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