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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도 가출을 할 때가 있다'는 말, 놀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한 말인 것 같아요. 하루쯤은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은 때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어른들은 어떨 때 집안이 아닌 집밖으로 향하게 될까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편집자말]
남편과의 연애를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핀다. 2년 여간 은밀하고 흥미진진했던 사내 비밀연애. 하던 일이 같으니 대화가 잘 통했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편안했다. 자타공인 천생연분이었고 싸울 일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24시간 밀착하여 살다시피 했다. 첫째 아이 만삭 때까지 함께 출근하고 퇴근했고, 퇴근 후에는 아이와 더 충만할 미래를 꿈꾸며 책도 읽고 다큐도 보면서 부모될 준비를 했다. 그렇게 매일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도 친밀함이 좋았다. 함께라는 사실에 기쁠 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출산 후부터 우린 급격히 다툼이 많아졌다. 도움 받을 조력자는 없었고, 아이를 24시간 간병하듯 돌보면서 나는 지쳤다. 출산 전 막연히 알던 육아와 현실 육아는 천지 차이였다. 열악한 육아 상황이 우리 관계를 바꾸기 시작했다.

일상이 전쟁이었다
 
안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운 엄마라는 무게에 자격지심, 열등감이 들어 괴로웠는데 '엄마가 잘 모른다'는 말에 감정이 폭발했다.
 안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운 엄마라는 무게에 자격지심, 열등감이 들어 괴로웠는데 "엄마가 잘 모른다"는 말에 감정이 폭발했다.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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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천성적으로 주어져 할 일을 본능적으로 안다는 말이 있다. 엄마는 아이 울음소리를 들으면 아이가 왜 우는 것인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는 말을 믿었건만, 내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도 모르겠는 것 투성이었다.

아이를 돌보느라 내 한 몸 돌볼 겨를도 없었는데, 거기에 더해 집안 청소, 빨래, 요리 등의 가사 일까지 하려니 감당이 되지 않았다. 부족한 엄마, 부족한 아내의 면모는 부부싸움의 씨앗이 되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아이는 울었고, 나는 지쳤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은 상태에서 넋을 잃고 앉아 딸랑이를 흔들며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가볍게 한 마디를 던지며 아이를 안고 달랬다.

"안아달라고 우는 건데 엄마가 잘 모르나보다."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안 그래도 감당하기 어려운 엄마라는 무게에 자격지심, 열등감이 들어 괴로웠는데 '엄마가 잘 모른다'는 말에 감정이 폭발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별 걸로 다 싸웠다 싶지만 당시에는 심각했고, 부부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싸움에 서툴렀던 우리는 그동안 서로에게 쌓인 감정을 쏟아내며 싸움을 키웠다. 사과도 이해도 없이 고성이 오가던 중에 남편이 갑자기 집을 휙 나가면서 싸움은 일단락 되었다. 아이와 덩그러니 집안에 남은 나는 울면서 아이를 돌봐야 했는데 생각할수록 분했다.

'엄마가 어떻게 다 알아.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상상이 안 되나?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이해받지 못한 나의 상황을 억울해하며 가슴을 쳤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아빠의 싸움으로 놀란 아이도 크게 울었다. 부부싸움 후 불안정한 감정 상태에서 아이를 돌보는 것은 훨씬 더 힘들다. 이전에는 경험해본 적 없는 나와의 싸움이 이어진다.

어떻게든 그 즉시 마음을 추스르고 이성을 부여잡아야 한다. 파도치는 마음을 보듬을 여유도 없이 우는 아이에게 연신 사과하면서 토닥토닥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고통은 질문이 되었다.

'아니, 부부싸움은 같이 했는데, 놀란 아이를 달래는 건 왜 꼭 엄마인 내 몫이야?'

남편은 술을 마시고 공원을 몇 바퀴 돌고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들어왔다. 아이를 재우느라 진땀을 뺀 나와 사뭇 다른 평온한 모습에 분함이 밀려와 두 주먹 불끈 쥐고 다짐했다.

'기필코 다음에는 내가 나가리!'

집밖에 나가면 억울함이 풀린다
 
아이 없이 혼자서 집 밖을 나가본 경험이 많지 않을 때라 그저 혼자서 거리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풀렸다.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아이 없이 혼자서 집 밖을 나가본 경험이 많지 않을 때라 그저 혼자서 거리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풀렸다.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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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처음이고, 엄마가 처음인 우리는 그렇게 서툰 서로에게 어떤 남편, 어떤 아내가 되어야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싸움 한 번을 안 하며 천생연분이라 믿었던 우리는 육아라는 거대 관문을 통과하며 수없이 싸웠다.

수면 부족, 육체적 피로, 호르몬 변화, 정신적 압박감에 사소한 것도 더 크게 다가오던 때였으니 싸움 거리가 아닌 일도 싸움이 되곤 했다. 그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한 남편은 싸움이 한참 진행 중인 시점에서 "그만하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 하자"라며 옷을 챙겨 입기 일쑤였다.

어느 날, 나가려는 남편을 향해 외쳤다.

"나가지마! 들어와!"

남편은 황당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같은 공간에서 얼굴을 보고 있으면 감정만 더 상하니까 좀 떨어져서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계속 싸우기보다 떨어져 있는 거 좋은 방법인 것 같아. 그런데 왜 항상 당신이 나가? 내가 나갈 거야. 당신이 애랑 집에 있어!"

빛의 속도로 옷을 챙겨 입고 내가 먼저 집을 나갔다. 아이 없이 혼자서 집 밖을 나가본 경험이 많지 않을 때라 그저 혼자서 거리를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풀렸다. 신세계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와. 이 해방감! 이거 완전 좋은데?'

그저 신선한 공기와 자유가 좋아서 싱글벙글 하고 다녔다. 그렇게 나는 가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이후에도 부부싸움은 종종 나홀로 가출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집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좋아하는 책 한 권을 다 읽기도 했다. 어떤 날은 영화 한 편을 보기도 했다.

그렇게 혼자 자유롭게 바깥 공기를 마시고 나면 남편과 어떤 문제로 싸웠는지도 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남편이 혼자서 아이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이 통쾌하기도 했지만, 고마운 감정도 들었다.

그러면서 알았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집 밖에서 보내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라는 걸. 집안에서 하루 종일 아이와 종종거리며 사는 삶에 지쳤던 거다.

엄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집안에서 해야 하는 역할이 넘치고, 그 기대치를 채워가느라 숨이 막혔다. 그런 상황에서 가출은 '나'를 만날 수 있는 가뭄의 단비였다.

가슴이 벅차고 설레는 가출

다가오는 주말에는 누군가의 아내, 엄마, 며느리, 딸이 아닌 '나'로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결혼한 여성들과 함께 평창으로 1박2일 여행을 떠난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족 없이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이다. 

남편이 부부싸움 후 집을 나가던 장면은 큰 교훈을 남겼다. 가출의 유익함을 경험한 나는 계속 진화 중이다. 이 좋은 봄날, 나를 '역할'이 아닌 '존재'로 바라보는 사람들과 저 멀리 강원도로 가출이라니. 생각만으로 가슴이 벅차고 설렌다.

결혼 8년차가 되면서 우리 가족은 4인 가족이 되었고, 성별 역할 구분은 더욱 선명해졌다. 남편은 집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서 집 안에서 쉬고 싶어 하지만, 나는 집 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으니 기회만 있으면 집 밖으로 나가고 싶다.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부싸움은 정체기지만, 나는 아마도 계속해서 가출 기회를 호시탐탐 노릴 것이다. 집안에서만, 가족으로만 채울 수 없는 '내 삶'을 놓치고 싶지 않기에. 

태그:#엄마의가출, #부부싸움, #결혼,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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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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