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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에 한 번, 우리 원의 교사들은 교실 문을 닫고 한 자리에 모여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교육을 받는다. 교육 시간의 절반은 보육 지침, 안전 교육으로 이뤄지고, 나머지 절반은 '의식적 훈육'(Conscious Discipline)이라 불리는 접근법에 대한 교육으로 이뤄진다.   
 
<의식적 훈육> 책 표지
 <의식적 훈육> 책 표지
ⓒ Loving Gui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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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스타트 프로그램에 비교적 최근 도입된 이 '의식적 훈육' 접근법은 보육교사들이 아이들을 고유한 인격체로 존중하며 돌볼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곳에선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아이에게 물리적으로 손을 대고 힘을 가하는 모든 행위를 아동학대라고 간주해서 사전 교육을 철저히 하고, 학대가 벌어지면 가해자는 무거운 형사처벌을 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정서적 학대에 대한 인식은 물리적 학대에 대한 인식에 못 미치는 것 같다. 놀이터 등의 공공장소 뿐 아니라 어린이집, 유치원 등에서도 아이를 강압적인 태도로 훈육하는 부모, 교사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아마 이 의식적 훈육이 헤드스타트 프로그램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도 미국 사회에 만연한 정서적 학대 경향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다.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정서적 학대

정서적 학대란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관심이나 도움이 필요해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손사래를 치며 "저리 가서 놀아!" 하고 소리치는 것, 오전 놀이 시간에 교사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은 아이를 훈육한답시고 점심 시간에 해당 아이를 혼자 따로 앉히는 것, 작은 상처지만 다쳐서 아프다는 아이에게 "괜찮아, 잊어버려" 하고, 우는 아이에게 "시끄러, 그만해" 하고 소리치는 것, 교사의 지시에 잘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너 자꾸 그러면 엄마한테 전화한다!" 하고 협박하는 것.

2006년,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아동의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위와 같은 비신체적 폭력까지 모두 '체벌'(corporal punishment)로 정의했다. 아이를 무시하고 경멸하고 협박하고 조롱하는 행위 모두가 체벌에 포함되는데, 그동안 실습과 자원활동, 그리고 정식 채용되어 일하면서 만난 여러 교사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을 보았다.

나라고 정서적 학대 혐의에서 자유로운 건 아니다. 아이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며 엄마로서는 '존중 육아'를 해 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지만, 교사로서 '존중 보육'을 하고 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열 일곱명의 아이들을 돌보는 내 몸은 하나. 급한 일정 때문에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다그치는 일도 있고, 특정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아이에게 '식사지도 규정'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로 "그래도 한 입은 먹어야지!" 하고 소리치는 일도 있다.

집에서 내 아이에겐 좀처럼 하지 않을 일을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하게 되는 날이면 자괴감에 휩싸이지만, 다음날 또 같은 일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어서 마음 힘든 날이 이어졌다.

어른의 행동 먼저 의식하기

이곳 보육기관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내용 중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 존중하기'(Be respectful)인데, 교사들의 저런 모습은 정작 교사 본인들은 아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존중을 가르치는 꼴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의식적 훈육법을 창안한 베키 베일리(Becky Bailey)는 의식적 훈육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 앞에서 언성을 높여가며 무례함(disrespect)을 시연하면서 아이들에게 '존중하라'(be respectful)고 가르쳐봐야 소용 없고, 우리가 아이들을 벌주고, 배제하고, 창피주면서 아이들에게 친구들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쳐봐야 소용없다."

실제로 아이들과 가까이 지내본 사람이라면 안다. 어린 아이들은 많은 경우 어른들의 모습을 모방하며 배우고, 자란다는 사실을. 의식적 훈육도 같은 맥락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으로 교사나 부모는 아이를 대할 때 "내 행동이 어떻든 너는 내가 말하는대로(시키는대로) 해"("Do as I say, not as I do") 하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이제는 교사나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어른이 자신의 언행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이 스스로의 언행에 책임지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거나 바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통제와 훈육이 아니라 수용과 인정

전통적인 교육관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을 통제와 훈육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통제의 대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되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다. 그리고 이해와 존중을 위한 밑바탕은 너와 내가 동등한 인격체로서 각자의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아이들이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냈을 때 어른의 판단과 평가를 받지 않고 수용될 수 있는 환경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서 의식적 훈육 접근법은 아이의 어떤 행동을 '문제행동'이라고 먼저 못박기 전에 그 행동이 어른들에게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 알아보고 아이와 밀도 있게 교감할 수 있도록 교사들을 훈련시킨다. 난폭하거나 냉담한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을 '폭력적인 아이'라고 규정하기보다 '안정감이 필요한 아이'로 보고 "여기는 너에게 안전한 공간이며, 나는 너를 해치지 않을 사람"임을 반복적으로 인지시키는 것이 그 예다.

이처럼 의식적 훈육법은 아이들을 특정한 잣대로 규정하고, 기준에 어긋나면 모든 것을 '문제'라고 보며, 그 문제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성급하게 교정하려는 시도부터 거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꽃 뿐 아니라 말로도, 눈빛으로도 때리지 말라

언론 보도에 오르내리는 학대 사건들을 보면,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아이를 사람으로, 하나의 고유한 인격체로 보는 관점이지 않나 싶다. 아무리 어려도, 말을 잘 하지 못해도, 아이는 사람이고,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다. 자기만의 생활 리듬과 사고의 흐름, 발달 속도를 가진 사람.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을 늘 어른의 관점에서 미숙한 존재,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쳐야 하는 존재로만 바라보려고 한다.

아동학대가 일어나는 상황이 대개 그렇다. 아이가 이유 없이 너무 울어서, 기저귀 뗄 때가 지났는데 아직도 못 떼고 양육자/교사를 힘들게 해서, 편식을 해서, 낮잠 시간인데 자지 않으려고 해서, 장난감을 놓고 친구들과 다퉈서 등등,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이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상황인데도 어른들은 쉽게 아이들을 몰아세운다.
  
교육과 교정을 명분으로 이뤄지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모두 학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로와 안식이 필요한 아이를 몸과 마음으로 밀쳐내는 행위, 무엇을 잘 하면 무엇을 사주겠다라거나, 무엇을 하지 않으면 무엇을 빼앗겠다거나 하는 등의 협박, 다른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창피 주는 행위, 아이 손을 거칠게 잡아 끌고 가는 행위, 다른 아이와 비교하는 행위 모두 아이에겐 학대 상황이다. 때리지 않는다고 학대가 아닌 건 아니다.

일정기간 동안 최소한의 안전과 생계와 교육을 담당하는 한, 부모, 교사 등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권력이며 권위다. 그래서 어른들은 한마디 말로도, 단 한번의 눈빛으로도 아이를 얼마든지 학대할 수 있다.

아이 존중 돌봄, '자격 강화'로 되는 일 아냐

보육기관, 그리고 아이 돌보미의 아동학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돌봄인력 자격강화, CCTV 설치' 같은 것들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아이를 존중하는 돌봄은 그런 식의 자격 강화, 감시 체계 강화로 되는 일이 아니다. 아동 발달에 관해 아무리 많은 교육을 받고 많이 알아도, 아이를 통제와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는 한 아이를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아이를 대하는 태도라는 건 검사지에 나열된 성격 특성을 가지고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력이 많거나 자녀를 기른 경험이 있다고 해서 더 나은 태도를 갖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CCTV는 돌봄에 수반되는 수고에 대한 인정은 배제된 채 감시 기능만 강화되는 셈이어서 또다른 소외를 낳기만 할 뿐이다.

그보다는 돌봄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점과 태도가 변화해야 한다. 돌봄은 아이를 예뻐하고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이를 '귀여워'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아이를 미숙한 존재로 여겨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다. 교육과 계몽의 대상으로 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아이에게도 아이 각자의 흐름과 방향이 있고, 아무리 어린 아이도 '마음'이 있는 하나의 고유한 인격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인정과 수용을 바탕으로 아이 하나 하나 눈 마주치고 들여다보며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으려면, 결국 그 일을 같이 해 줄 사람들이 안팎으로 늘어나야 한다. 교사 대 아동 비율이 열악한 현재의 처지에서 보육교사 개인의 인성과 자격, 역량에만 기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며칠 전, 내년부터 만 3세~5세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을 놀이 중심으로 전면 개편하는 안에 대한 공청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 개편안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아이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함께 돌볼 사람을 늘릴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보육기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개방되어 부모와 교사, 이웃공동체로부터 두루 보살핌을 받고(이전글 보기), 보육기관의 교사 대 아동 비율이 조정되고(이전글 보기), 안팎에서 아이들을 마주치는 많은 어른들이 모두 아이 하나 하나를 인격체로 대할 수 있을 때, 그 때 아이들은 건강한 성장의 주체로 자라날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다. 다음에 이어질 마지막 글에서는 이 '놀이중심' 누리과정 개편안에 대한 기대와 우려, 고민을 담아보려고 한다.  

태그:#기관보육, #돌봄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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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활동가로 살고 싶은 사람. 아이의 선천성 희소질환 '클리펠-트레노네이 증후군(KT 증후군)'을 계기로 <아이는 누가 길러요>를 썼다. 한국PROS환자단체 대표, 부천시 공공병원설립 시민추진위원회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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