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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한성부 판윤을 지낸 정이오(鄭以五)는 남산의 여덟 가지 풍광을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시로 예찬했다. 북쪽 궁궐에 가로지르는 구름(雲橫北闕), 남강에 넘치는 물(水漲江南), 바위 밑에 그윽한 꽃(巖低幽花), 고갯마루의 높은 소나무(嶺上長松), 3월의 답청놀이(三春踏靑), 중양의 등산놀이(九月登高), 언덕에 올라 관등행사 구경하기(陟獻觀燈), 시냇물에 갓끈 빨기(沿溪濯纓).
▲ 정이오가 예찬한 남산의 여덟 가지 풍광 한성부 판윤을 지낸 정이오(鄭以五)는 남산의 여덟 가지 풍광을 <남산팔영>(南山八詠)이라는 시로 예찬했다. 북쪽 궁궐에 가로지르는 구름(雲橫北闕), 남강에 넘치는 물(水漲江南), 바위 밑에 그윽한 꽃(巖低幽花), 고갯마루의 높은 소나무(嶺上長松), 3월의 답청놀이(三春踏靑), 중양의 등산놀이(九月登高), 언덕에 올라 관등행사 구경하기(陟獻觀燈), 시냇물에 갓끈 빨기(沿溪濯纓).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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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대한민국. '논두렁 정기라도 받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처럼 학교 교가에 "OO산의 정기를 이어받아~"라는 가사도 많다. 그런데 1천 개를 헤아리는 공공도서관 중에 산 이름을 넣은 도서관은 흔치 않다. 지리산, 설악산, 오대산, 북한산 같은 명산이 있지만, 명산 이름을 딴 학교는 있어도 도서관은 없다. 

제주도 대표도서관인 '한라도서관'이 한라산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여기서 '한라'는 제주의 또 다른 명칭이라 할 수 있으니, 산 이름이 들어간 도서관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도서관 이름에 산이 들어간 흔치 않은 사례가 있으니 바로 '남산도서관'이다. 애국가 제2절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에 나오는 바로 그 남산에 있는 도서관 말이다. 

'남산'이란 남쪽에 있는 산을 말함인데, 서울 남산, 경주 남산, 춘천 남산처럼 '남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제법 있다. 반면 동산, 서산, 북산이란 산 이름은 거의 없다. 산림청에 등록된 4440개의 산 중에 '남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31개 있다. 남산은 왜 이렇게 많으며, 수많은 남산 중에 서울의 남산은 왜 중요할까? 한양 남쪽에 많은 산이 있음에도 목멱산(木覓山)만이 '남산'인 이유는 뭘까? 

목멱산은 왜 '남산'이 됐을까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으로부터 봉수를 받았다. 남산 봉수대는 서울에 있는 봉수라 하여 '경봉수'라 불리기도 했다.
▲ 전국 봉수의 집결지인 남산 봉수대 남산 봉수대는 제1봉수대부터 제5봉수대까지 다섯 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제1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 아차산, 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 천림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 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동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으로부터 봉수를 받았다. 남산 봉수대는 서울에 있는 봉수라 하여 "경봉수"라 불리기도 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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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산이 '남산'일 수 있는 이유는, 한양의 '안산'(案山)이기 때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한양을 새 도읍으로 정하고 백악산 아래 경복궁을 지었다. 

경복궁은 제왕남면(帝王南面)에 의해 백악을 등지고 남쪽을 바라보고 자리를 잡았는데, 남쪽을 향한 경복궁 앞에 자리한 산이 바로 남산이다. 높이 270.1미터, 크기 동서 2.7km, 남북 2.1km의 나지막한 산이 중요해진 건 새 나라, 새 도읍, 새 궁궐의 남주작, 안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풍수지리적 관점뿐 아니라 한양도성이 남산을 거쳐 축성되고, 조선 봉수의 종착점이 남산이 되면서, 남산은 군사 전략적 관점에서도 중요성을 띠게 됐다. 남산에는 5개 봉수대가 있는데, 전국 5개 방향에서 전달된 봉수가 남산 봉수대로 모였다.

도성과 봉수뿐 아니라 남산에는 금위영의 분영인 남별영(南別營), 어영청의 분영인 남소영(南小營), 화약고와 무기를 보관하는 남창(南倉)이 자리하기도 했다. 남별영은 지금의 필동인 묵정동에, 남소영은 지금의 장충동인 남소문 옆에 있었다. 병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던 '예장'(藝場)은 예장동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훗날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인왕산으로 옮겨진 국사당까지 자리하면서 남산은 어느새 원래 이름인 목멱산보다 '남산'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지고 중요해졌다. 

일제 강점기 들어서는 조선 신궁과 한국통감부 및 조선총독부, 한국주차군과 헌병대 사령부가 자리하면서 남산은 식민 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박정희 군사 정부 시절에는 중앙정보부와 민주공화당사가 남산에 자리하면서 권력 핵심부로서 기능했다. 조선 시대 이래 남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었다. 한양 남쪽에 있는 수많은 산 중에 목멱산이 서울의 '남산'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남산도서관'이었던 건 아니다
 
역대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인데, 해군 출신으로 유일하게 조선 총독이 되었다. 1919년 8월 13일부터 1927년 12월까지 8년 동안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1929년 8월부터 1931년 6월까지 2년 동안 다시 조선 총독이 되는데, 조선 총독을 재임한 건 그가 유일하다. 문화통치를 표방한 사이토 재임 시절, 만철경성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모두 건립된다.
▲ 3대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역대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인데, 해군 출신으로 유일하게 조선 총독이 되었다. 1919년 8월 13일부터 1927년 12월까지 8년 동안 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1929년 8월부터 1931년 6월까지 2년 동안 다시 조선 총독이 되는데, 조선 총독을 재임한 건 그가 유일하다. 문화통치를 표방한 사이토 재임 시절, 만철경성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 조선총독부도서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이 모두 건립된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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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시는지? 남산이 처음부터 남산이 아니었던 것처럼, 남산도서관이 처음부터 '남산도서관'이었던 건 아니다. 남산도서관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3.1 운동을 기점으로 강압적 식민통치에 대한 조선의 저항이 심해지자, 일제는 '문화통치'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헌병 경찰을 보통 경찰로 바꾸고,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신문 간행을 허용하는 유화 조치가 시작되는 게 이때부터다. 그 연장선에서 1922년 '경성부립도서관'을 개관하는데, 이것이 바로 남산도서관의 전신(前身)이다. '경성부립도서관'은 일제가 경성부, 즉 서울에 건립한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다. 

이 대목에서 일제가 본토와 식민지 조선의 도서관 건립에 어떤 '차별'을 두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헌정보학을 연구한 김남석 전 계명대 총장에 따르면, 1926년 당시 식민지 조선에는 총 18개의 공공도서관이 있었는데, 절반인 9개는 조선인이 문을 연 도서관이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시점부터 16년이 지난 1926년까지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단 9개의 도서관을 건립했을 뿐이다. 

일본 본토의 경우 1904년 99개였던 공사립 도서관이 1926년에는 4336개로 크게 늘었다. 본토와 조선의 수치를 비교하면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도서관 건립에 얼마나 '인색'했는지 알 수 있다. 

'한성병원' 건물에 문을 연 경성부립도서관
 
"여기는 조선서 제일로 신식 의원이여"라는 대사로 등장하는(11화) 한성병원은 유진(이병헌 분)에게 아버지나 다름 없는 선교사 요셉의 시신이 옮겨지는 곳으로(14화), 총에 맞은 구동매(유연석 분)가 마취하지 않은 채로 일본인 의사에게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곳으로(18화) 등장한다. 친일파 리노이에(이완익, 김의성 분)의 범인으로 일본인 의사 마츠야마가 몰리는데, 그는 한성병원 의사다(20화). 글로리호텔 폭파 후 일본군이 후송되는 곳, 유진이 애신(김태리 분)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구하러 가는 곳도(23화) 모두 한성병원이다.
▲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 등장하는 ‘한성병원’ "여기는 조선서 제일로 신식 의원이여"라는 대사로 등장하는(11화) 한성병원은 유진(이병헌 분)에게 아버지나 다름 없는 선교사 요셉의 시신이 옮겨지는 곳으로(14화), 총에 맞은 구동매(유연석 분)가 마취하지 않은 채로 일본인 의사에게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곳으로(18화) 등장한다. 친일파 리노이에(이완익, 김의성 분)의 범인으로 일본인 의사 마츠야마가 몰리는데, 그는 한성병원 의사다(20화). 글로리호텔 폭파 후 일본군이 후송되는 곳, 유진이 애신(김태리 분)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구하러 가는 곳도(23화) 모두 한성병원이다.
ⓒ 스튜디오 드래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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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립도서관'이 위치했던 곳은 메이지쵸(明治町) 2정목 25번지(지금의 명동 2가 25번지)다. 경성부는 이 자리에 있던 옛 한성병원 건물을 매입해서 1922년 10월 1일 도서관을 개관했다. 

일본인의 조선 거주가 시작되면서 일본 정부는 군의(軍醫)가 진료하는 관립병원을 개항장에 설치했다. 1883년 한성부에 공사관 의원을 설치해서 운영하다가 폐지한 후 1895년 문을 연 병원이 바로 '한성병원'이다.

한성병원은 일본 거류민이 직접 운영하는 공립병원으로 출발했다가 경영상 어려움으로 1909년 개인병원으로 바뀌었다.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 산과와 수술실, 병동을 갖춘 서양식 종합병원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함께 진료했다. 1901년 고종이 한성병원에 금일봉을 하사한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조선인 진료에도 나름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03년 고종의 총애를 받은 내장원경 이용익이 입원했다가 폭발물 테러가 일어난 곳도 이곳 한성병원이다.

대한제국 시대 의병 이야기를 다루며 화제가 된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에는 배경의 하나로 '한성병원'이 등장한다. 한성병원은 일본인 의사가 서양 의술을 펴는 곳으로 그려지는데, 드라마 배경이 된 이 시기 일본인이 한양에서 운영한 대표적인 서양식 병원이 바로 한성병원이다. 1908년 대한의원이 문을 열기 전까지 한성병원은 세브란스 병원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현대식 병원이었다.

1909년 12월 22일 벨기에 황제 추도식 참석 후 경성 종현교회당(지금의 명동성당)을 나선 이완용은 비수를 휘두른 청년 이재명의 습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완용은 다음 날인 23일 대한의원에서 3시간 동안 수술을 받지만, 습격 당일 응급 처치를 위해 이완용의 저동 자택으로 왕진을 간 의사는 한성병원 외과의사 가쿠다(鶴田)와 원장 안도(安藤)였다.

저격 장소에서 가깝기도 했지만 당시 한성병원은 설비와 체계를 제대로 갖춘, 흔치 않은 병원이었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10년 8월 22일 이완용은 총리 대신 자격으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통감과 한일 강제병합 조약을 체결했다. 1909년 한성병원-대한의원으로 이어진 의료 처치로 이완용이 회생하지 않았다면 '경술국치'라 일컬어지는 한일 강제병합은 달리 전개되지 않았을까. 

메이지쵸는 혼마치(本町)와 함께 일본 거류민의 중심지였고 한성병원은 일본인 거류지의 대표적인 병원이었다. 일본인에게 익숙한 병원을 도서관으로 전환했기 때문에 일본인이 이용하기 편리했을 것이다. 경성부립도서관의 입지만 봐도 이곳이 일본인을 위한 도서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부립도서관은 벽돌로 지은 2층 건물로 1층에는 아동실(22평), 휴게실(3평), 사무실(3평)이, 2층에는 일반열람실(32평)과 서고(5평)가 자리했다. 메이지쵸, 지금의 명동 시절 경성부립도서관 이용 통계 중 흥미로운 부분은 남녀 이용자 비율이다. 1925년 10월 통계를 보면 경성부립도서관은 '남성의 전유물'이나 다름 없었다. 남성 이용자는 4768명이었고, 여성 이용자는 0.3% 수준인 16명뿐이었다. 

명동에 5년 동안 머문 경성부립도서관은 1927년 5월 소공동 112-9번지로 이전한다. 

'대관정'과 대한제국 밀사 헐버트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조선인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조선인은) 수적인 면에서 중국에 눌려서 살고 있으며 재치 면에서 일본에 눌려서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하지 못하며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 하는 민족도 아니다. 기질 면에서 보면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앵글로 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살고 있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하다. 그들의 약점은 어느 곳에나 무지가 연속돼 있다는 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기회를 잘 활용하면 그들의 생활 조건은 급격하게 향상될 것이다."
▲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독립운동가 헐버트 을사늑약 체결 이듬해인 1906년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사>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조선인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조선인은) 수적인 면에서 중국에 눌려서 살고 있으며 재치 면에서 일본에 눌려서 살고 있다. 그들은 중국인처럼 상술에 능하지 못하며 일본인처럼 싸움을 잘 하는 민족도 아니다. 기질 면에서 보면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앵글로 색슨 민족에 가까우며 극동에 살고 있는 민족 중에서 가장 상냥하다. 그들의 약점은 어느 곳에나 무지가 연속돼 있다는 점이지만 그들에게 부여된 기회를 잘 활용하면 그들의 생활 조건은 급격하게 향상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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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립도서관이 새롭게 이전한 소공동 부지는 '대관정'(大觀亭)이 있던 자리다. 대관정은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가 살던 집이다. 헐버트는 한국 최초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인 육영공원과 관립중학교에서 수학, 자연과학, 역사, 정치를 가르친 이다. 교육 분야뿐 아니라 삼문출판사를 운영하며 <더 코리안 리포지토리>, <더 코리아 리뷰>를 발행해서 근대 언론출판 분야에도 큰 기여를 했다. 

헐버트는 고종 황제의 밀사로 두 차례나 활약했다. 을사늑약 체결 전인 1905년 10월 고종 황제의 밀사로 워싱턴을 방문,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친서를 전달했다. 

1882년 조선과 미국이 체결한 조미수호조약 제1조에는 "조약 체결국 중 어느 일방이 제3국에 의해 침략받을 경우 다른 한 국가는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우의(友誼)를 가지고 개입한다"는 '거중조정' 조항이 있다. 고종의 친서에는 이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미국이 나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담겼다. 하지만 당시 친일본 입장을 취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고종 황제의 요청을 묵살했다. 

헐버트는 1907년 4월 헤이그 밀사 파견 때도 깊이 관여했다. 고종의 요청으로 서울을 떠난 그는 스위스를 거쳐 헤이그에서 이상설, 이준, 이위종과 합류했다. 헤이그에서 헐버트는 열정적으로 움직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 명으로 알려진 헤이그 밀사 중 헐버트는 알려지지 않은 '네 번째 밀사'로 활약했다. 

네 명의 헤이그 밀사 중 그는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밀사였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된다.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초청으로 방한했다. 꿈에 그리던 한국땅을 밟았지만 86세였던 헐버트는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숨을 거뒀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
는 유언을 남긴 헐버트는 그가 사랑한 한국땅,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대관정은 워싱턴과 헤이그 밀사로 활약하며 대한제국 독립을 위해 분투했던 '독립운동가' 헐버트가 살았던 곳이다. 

헐버트가 조선에 있던 도서관으로부터 도움 받은 이야기를 글로 남긴 적이 있다. 1905년 헐버트는 고조선부터 러일전쟁까지 우리 역사를 <The History of Korea>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1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은 영문으로 쓰인 최초의 한국 통사다. 

헐버트는 이 책의 서문에서 "나는 특별히 허락을 받아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자료를 많이 갖춘 사설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가 책을 쓰면서 출입했다는 '서울에서 가장 크고 자료를 많이 갖춘 사설 도서관'(one of the largest and most complete private libraries in the capital)은 어디였을까. 왕실 도서관인 집옥재나 수옥헌(중명전)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보지만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는 격주로 목요일에 연재됩니다. 남산도서관 역사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남산도서관, #경성부립도서관, #헐버트, #대관정, #남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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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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