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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이 무너져 내린 것은 2017년 5월 1일, 노동절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휴일이었지만 공기에 쫓기는 현장 하청업체와 물량팀 노동자들에게는 언감생심. 그렇게 1400명이 넘는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절 아침부터 거제 삼성중공업에 출근했다.

머나먼 노르웨이의 바다에서 원유를 뽑아 올릴 해양플랜트 마틴 링게 P블록 현장은 변함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촛불 시민들이 부패한 정권을 끌어내렸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 8일 전이었지만, 조선소는 그대로였다.
 
<나, 조선소 노동자>엔 주목 받지 못했던 조선소 노동자들의 절실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나, 조선소 노동자>엔 주목 받지 못했던 조선소 노동자들의 절실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 코난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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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바가지(현장에 올 때 은색 안전모를 쓴다고 해서 높은 분들을 이렇게 부른단다)'들은 건재했고, 하청 바가지 수백명은 고작 10분의 휴식시간 동안 한 칸의 간이화장실과 정수기, 재떨이를 이용하기 위해 수십미터를 내려와야 하는 것도 그대로였다.

크레인이 꺾이고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그 쇳덩어리 구조물, 변함없는 현실 위에 올라앉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던 노동자들의 휴게 공간이었다. 그 억울하고 아득한 사연이 지면으로 옮겨졌다. 노동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면 사고의 연원까지 짐작하고 남는다.
 
"근로계약서는 K기업이랑 썼는데 실질적으로는 T물량팀 소속이라니요? 어떻게 저도 모르는 물량팀 소속이 될 수 있어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저는 T물량팀 소속도 아니었어요. 거기에 또 새끼 물량팀이 있더라고요. E라는 듣도 보도 못한 업체였어요." 

특별사법경찰관인가 하는 사람이 이야기했다는 '조선소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소속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현장에 투입되어 일하고 있었다. 위험은 일을 시작하는 고용 관계에서부터 현장의 도처에 어디에나 있었다.
 
"클리닝을 하라 그랬어요. 클리닝하고 있는데 옆에서 뭐가 푸식거려요. 용접을 하는 거예요… 제가 그때 신나 걸레를 비닐봉지 통으로 들고 있었거든요. 안에다 신나를 부어가지고 걸레를 집어들고 첨벙첨벙하는 거예요. 거기에 용접 불꽃 튀면 큰일 나요."

그야말로 "진짜 개판인" 현장이었지만 위험한 혼재 작업은 용인되었다.
 
"용접하믄 안 되는데 하니까 '예? 저도 지금 오더받고 하는 건데'카는 거예요. 그거 뭐지? 종이… 아, 작업허가서. 작업허가서 있어? 카니까 자기도 작업허가서 있다는 거예요."

배 나갈 일정이 다가오면 안전은 안중에도 없었다. 실제로 불도 났었고, 용케 소화기로 조기 진압한 노동자에게 돌아온 것은 칭찬이 아닌 욕설과 더불어 '이번 일은 없었던 일로 그냥 덮겠다'는 이야기였다.
 
"말로는 안전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납기일에 쫓긴다 싶으면 위에서 용접하고 밑에서는 페인트 바르고, 그러다 사고 나면 일하는 너그들 책임이다 하고. 우리가 페인트 바르려고 오는데 용접하고 있으면 작업자들끼리 싸워요. 위에서 이렇게 지시를 내려놓고는… 탱크 안에서 불나는 이유도 다 그거예요. 불이 왜 나는데."

폭발하고 떨어지고 무너지는 진짜 이유를, 허무한 죽음의 진짜 책임자를 노동자들은 낱낱이 알고 있다. 무너진 것은 크레인만이 아니었다. 6명의 생명과 소우주가 사라져 버렸고 수십 명의 육체와 생활이 망가졌으며, 또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많은 마음과 정신이 다쳤고 여전히 아파하고 있다.

늘상 죽음과 손상에 근접해서 일하고 살아왔지만 애써 외면할 수 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던 위험은 동료들의 처참하게 잘려나가고 터져 버린 핏빛 육신으로 닥쳐들었고 공포는 일상을 압도하고 말았다. 죽어가던 동료들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 크레인만 보면 피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무력감과 허무감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용돈 2만원(일주일 치) 받아와서는... 6일 동안 담뱃값도 안 돼요... 그렇게 빠닥빠닥 살아서 아파트 전세로 살다가 내 거로 바꿨다고 자랑했는데, 뭐 해요. 죽어 뿌는데, 쎄 빠지게 일하던 놈은 디져 뿌고 허무하죠…."

하지만 쎄 빠지게 일하다 디져 뿌는 인생이 허무해도 생계를 이어 가야하는 가장으로서 버거운 삶의 무게는 지탱해야만 한다.
 
"그람 뭐 먹고 사노? 와이프한테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되노? 사고 나고 1년 동안 그 때가 제일 두렵고 힘들었어요. 진짜 가슴이 철렁하드라구요. 산재 이런 거는 생각도 못 하고 당장 뭐 먹고 살아야 되노? 이런 생각밖에 안 들더라구요."  

산재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산재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 것이고, 둘째로는 산재로 다친 몸과 마음을 생계의 걱정 없이 충분히 치료하고 치유할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며(2차 예방), 마지막으로는 돌아가야 할 현장이 불안을 잠재울 만큼 안전하다는 것을 보장하고 노동자들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복귀를 돕는 것이다(3차 예방). 노동자들의 구술로만 정리된 이야기는 죽음에 이르는 산재로 인한 고통만이 아니라 산재가 빚어지는 구조적인 원인과 해결을 위한 개입지점, 그리고 책임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처벌이 명확했으면 좋겠어요. 책임도 명확했으면 좋겠어요. 피해자에게 '니 잘못이 아니야' 이야기해줄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어요. 피해자는 있는데, 피해자는 힘든데, 가해자는 아무 책임이 없잖아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이 돌아가야 할 현장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짓눌리고, 부러지고, 갈라지고, 터지고, 잘려나간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 활자로 남기는 일은 "크레인에서 끊어진 육중한 와이어가 활선이 되어" 기록자의 "몸과 마음 여기저기를 휘갈기는 것"같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남겨져야 했고, 그 역할을 해내고야만 분들에게 먹먹한 감사를 보낸다.

일상의 삶이 존중받는 만큼 고통도 죽음도 존중받을 수 있다. 노동자들의 삶을 존중하는 것은 노동자 건강권과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일터 내외에서의 행동할 권리를 지지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경험하지 못한 일들에 대한 공감과 지지를 위해서는 일들의 연원을 알아야 한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류현철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소장이며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입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6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나, 조선소 노동자 - 배 만들던 사람들의 인생, 노동, 상처에 관한 이야기

마창거제 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코난북스(2019)


태그:#나조선소노동자, #삼성중공업, #조선소, #노동자건강권, #산업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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