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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고 있다.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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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특별담화 4·13 호헌선언 중에서

"'박정희 집권 기간이 18년이었는데 (전두환이 이제는) 노태우까지 앞세워 군부독재 40년까지 해먹겠단 소리구나'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

1987년 6월 10일은 노태우가 전두환 후계자로 지명받은 날이었다. 대다수 국민은 7년간의 독재가 세습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향린교회'에 모인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국민 저항이 단결되기 시작되었다. 

"그때는 집회를 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어.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넘쳐났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어. 주요 인사들이 이미 도청, 미행, 연금 등을 당하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어. 그때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가 출범한 거지."
 
오늘 우리는 전 세계의 이목이 우리를 주시하는 가운데 40년 독재 정치를 청산하고 희망찬 민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거보를 전 국민과 함께 내딛는다. 국가의 미래요 소망인 꽃다운 젊은이를 야만적인 고문으로 죽여 놓고 그것도 모자라서 뻔뻔스럽게 국민을 속이려 했던 현 정권에게 국민의 분노가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 주고, 국민적 여망인 개헌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4·13 폭거를 철회시키기 위한 민주 장정을 시작한다.
- 6·10 국민 대회 선언문 중에서
 
엄마 윤정모의 말에 따르면 신문 배달로 가장한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향린교회'라고 쓰인 쪽지를 돌렸고 이를 사람들끼리 공유했다. 5월 27일 그날은 희한하게도 명동성당, 성공회대성당, 기독교회관 등 모든 곳에 경찰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을지로에 있는 향린교회에는 경찰이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호헌철폐 및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발기인 2천여 명 중 150여 명이 향린교회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고 거기에서 모든 강령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9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한장. 한 청년이 태극기 앞으로 손을 들고 뛰쳐 나가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을 상징하는 사진 한장. 한 청년이 태극기 앞으로 손을 들고 뛰쳐 나가고 있다.
ⓒ 6월항쟁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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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년 전 6월 항쟁 이야기를 꺼낸 엄마 윤정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들어보면 6월항쟁은 쌓여 있던 분노가 터지면서 모두가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로 하나 된 날이었다. 영화 < 1987 >을 보면서도 감동이었는데 실제는 더 긴박하고 감동적이었나 보다. 

"그때 대학생들이 참 많이 고생했어. 한번은 경희대, 외대 쪽 학생들이 집회에 합류하기 위해 청량리에서 전철을 탔는데 기관사가 인천까지 멈추지 않고 운행해 허탕을 치게 만들기도 했어. 어떤 날은 무작위로 버스나 전철에 백골단이 밀고 들어와서 집회하려는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잡아내 구타하고 연행했지. 그때는 경찰서에 연행된 사람들로 꽉 찼었어." 

당시 문인들은 서울역에 자리를 잡고 연일 집회를 이어갔다. 채광석, 김정환, 김남일, 이창동 등 작가회의 젊은 회원들은 백골단에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 그러나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김규동 선생, 현기영 선생 등 나이 있는 작가들까지 모두 모여 집회를 이어나갔다. 

"시위를 하다 보면 여기저기서 하얀 머리들이 올라오는데 이는 '백골단의 폭력이 시작된다'는 의미야. 정말 그들은 사람을 죽일 듯이 팼어.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는데 의과 대학생들이 가운을 입고 들것을 들고 나타나기 시작했어. 누가 다치거나 하면 바로 치료하고 심각하면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을 담당했지. 이 학생들 덕분에 한열이 이후로 사망자가 안 나온 것 같아."

경찰들의 폭압과 연일 집회에 대한 피로감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최루탄'이었다. 당시 소득세 1위가 최루탄 생산회사인 상양회사의 회장 한영자씨였을 만큼 집회 진압에 엄청난 양의 최루탄이 사용되었다. 

"최루탄은 정말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 눈물 콧물 다 흐르고 정신이 어질어질해졌지. 그래도 우리 나름대로 방법이 있었어. 랩으로 눈 근처를 둘둘 말아서 최루가스를 막는다든가, 치약을 눈과 코 주변에 발라서 매운 기운을 피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지. 심지어 배춧잎이 최루가스를 막아준다고 해서 농민들이 실어와 지원해주기도 했어."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은 직후 동료의 부축을 받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 정문앞에서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은 직후 동료의 부축을 받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
ⓒ 이한열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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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6월항쟁이 시작됐다면, 6월 9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전국의 수많은 시민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심지어 아들이 최루탄을 직격으로 머리에 맞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 엄마의 심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열이 엄마는 굉장히 빨리 상황과 정서를 파악하셨어. 바로 투사가 되어 나섬으로써 다른 아이들이 죽는 것을 막는다고 생각한 분이었지. 품이 넓고 포용력 있는 조용한 분이셨어. 한마디로 품위 있는 투사. 그리고 그 옆을 지키시던 문익환 목사님 등 참 이야기할 분들이 많구나.

마지막 날 아마 6월 26일이었을 거야. 시청 계단에 모여 있는데 30분 있으면 부산행 열차가 떠날 참이었지. 그때 청량리에서 연행된 대학생들이 그 열차에 타고 있다는 첩보를 듣게 되었어. 부산으로 보내서 구속할 참이었던 거지. 그때 김규동 선생이 기찻길에 뛰어들어 앞에 막아섰어. 그 작고 깡마르신 분이 온 힘을 다해 '날 죽이고 가!'라고 소리치셨어."


기차는 결국 떠나지 못했고 그날 밤 시민은 승리의 소식을 들었다. 전두환이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3일 후 6·29 선언을 통해 발표했다.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평화적 정부 이양,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및 교육 자율화 실시, 정당 활동 보장, 사회정화조치 시행, 유언비어 추방, 지역감정 해소 등을 통한 신뢰성 있는 공동체 형성 등 8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결과 4·13 호헌조치는 철회되었고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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