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28 09:09최종 업데이트 19.06.28 09:09
"뭔 놈의 날씨가 이리 덥다냐."
"우매 못 참겄어야."


정광임은 연신 손부채를 하더니 웃통을 훌러덩 벗었다. 대낮이기는 하지만 삼복더위의 푹푹 찌는 날씨라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기 방은 피난민들에게 세를 주고, 자신의 가족은 하꼬방에서 지낸 터라 더욱 그랬다. 하꼬방은 말 그대로 불가마 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등목을 하기 위해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중이었다.


바가지로 물을 등에 끼얹는 순간 '쾅'하는 소리와 동시에, 경찰들의 군홧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박만호 나왓"하며 5~6명의 경찰이 동시에 뛰어 들었다. 그러자 세 들어 사는 청년 일부가 쪽문으로 다람쥐같이 내달았다. 정광임은 양 손으로 젖가슴을 가린 채 어리둥절해 있었다. 경찰이 하꼬방과 인근 방을 수색했지만 그들이 찾는 이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들은 정광임에게 "남편 어디 갔어?"하며 다그쳤다.

"멀리 돈 벌러 갔당게유."

정광임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경찰들은 그녀에게 옷 입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수갑을 채웠다. 그러자 그녀는 거세게 항의했다. "사람이 어디 도망가요? 옷은 입어야 할 거 아니에요." 특히나 그녀의 둘째가 갓난아기라 젓이 퉁퉁 불어 있었다. 경찰들도 민망했던지 수갑을 풀고 옷을 입게 했다.

대전경찰서 유치장은 만원이었다. 정광임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남편과 아이 둘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간수가 불러냈다. 면회실로 가니 남편이 큰애 손을 잡고, 둘째를 업고 있었다. 아내가 경찰에게 잡혀갔다는 소문을 들은 남편이 집에 왔을 때는 아이들이 콧물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었다. 엄마가 경찰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본 아이들이 놀라 밤새 울어대자, 박만호는 아이들을 데리고 제 발로 경찰서로 찾아왔다.

그 시간부로 남편이 유치장으로 들어가고 아내는 석방되었다. 정광임처럼 풀려난 아내들이 경찰서 앞에서 "안에 있는 사람들 나올 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해, 주린 배를 안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오후 5시경 사이렌이 울림과 동시에 트럭이 경찰서 안으로 연신 들어갔다. 트럭이 나올 때는 적재함에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적재함 네 귀퉁이에는 총을 든 경찰들이 긴장을 한 채 서 있었다. 여러 대의 트럭이 산내로 갔고, 그곳에서는 피의 살육제가 벌어졌다.

1950년 7월 14일 늦은 오후였다. 대전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던 정광임과 수십 명의 여성들은 그 일이 남편들과 죽음을 '바톤 터치(baton touch)'한 것이라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동무, 산내에 가보자우"

남편이 죽은 지 일주일이 채 못 되어 북한군이 진주했다. 인공(人共)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바뀔 것도 없었다. 전쟁 중이라 항시 긴장상태에 있었다. 그나마 북한군들이 보도연맹원 유가족들에게 쌀 한 말씩을 나눠주어 굶어죽지는 않았다. 그러다 하루는 북한군 여러 명이 몰려 왔다. "동무, 산내에 가보자우." 정광임은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했는데, 뒤따르던 동네 아줌마들 얘기가 "산내로 시신 수습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약 20명의 여성들이 북한군 뒤를 따랐다. 7월 말의 푹푹 찌는 날씨에 약 십오 리(6km)를 걸어 산내 현장에 도착하니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파리와 모기떼들이 하늘을 시커멓게 덮었고,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정광임이 수천 구의 시신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는 데서 남편을 찾는다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였다. 집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그녀는 남편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남편이 금니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지 보름이 지난 시체는 급속히 썩어 들어갔다.

켜켜이 쌓인 주검들 속에서 밑에 깔려 있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위에 있는 시신의 팔을 잡아당기는데, 팔이 '쑥' 빠져 버렸다. 그녀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하고는 괭이로 시신을 뒤적거렸다. 이번에도 물컹물컹한 시신들이 그녀의 괭이질에 손상이 났다.

더 이상 남편의 시신을 찾기 위해 다른 이를 훼손할 수는 없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낙심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학살현장에서의 악취는 일주일 넘게 옷과 몸에 배어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69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날의 악취는 가셔지지 않았다.

"나 우리 아버지 이름도 몰라"
 

정광임의 젊은 시절 ⓒ 박만순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중림리에서 태어난 정광임(94세. 충북 청주시 현도면 시동리)은 5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정광임 집안은 손바닥 만한 곳에 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대책이 없는 이였다. 극빈층이었음에도 노름과 술에 절어 살았던 것이다. 물론 살기가 어려우니 비관해서 그럴 수밖에 없긴 했으리라.

그런 와중에 정광임이 9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새엄마를 들인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다 보니 입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동시에 발생했다. 9세 소녀 정광임이 희생양이 되었다. 대전역장 집에 애기업개로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문턱을 밟지도 못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친정아버지 이름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 우리 아버지 이름도 몰라"라고 답변하는 정광임의 얼굴은 쓸쓸하기만 했다.

1년을 애기업개로 보낸 때, 대전역장이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같이 가자고 하는 손길을 뿌리쳤다. 서울까지 따라가면 가족들과 영원히 이별할 것 같아서다. 대신 부농 집에 수양딸로 갔다. 말이 좋아 수양딸이지 실제로는 머슴이었다. 그 집에서 5~6년 일하면서 손과 발이 모두 짓물렀다. 그나마 그 집에서 정광임을 좋게 봐줘 결혼까지 시켜줬다. 시골 마당에서 찬물 떠놓고 치른 소박한 결혼식이었지만, 그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남편 박만호는 면사무소 앞에서 구두 닦는 일을 했다. 그 일로 네 식구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서 새롭게 찾은 일이 산에서 솔뿌리를 캐다가 공장에 파는 일이었다. 아내 정광임은 길거리에서 참외장사를 했다. 겨울에는 대전역 앞에서 떡국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던 정광임에게, 꿈속에서 "송영리를 찾아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눈을 뜬 그녀는 남편을 설득해 친정집에 갔다 오겠다고 했다. 기차와 우마차를 타고 어렵사리 친정집에 가서 가족들을 만났다. 집 떠난 지 14년만의 일이다.

결혼도 하고, 자식도 둘 낳고, 친정집도 찾은 그녀가 마냥 행복할 순 없었다. 보도연맹원이었던 남편이 6.25가 나면서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학살되었기 때문이었다. 정광임 부부가 알콩달콩 살던 행복한 상황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더군다나 뒤늦은 피난길에 돌아와 보니, 집은 경찰에게 뺏긴 상태였다. 소위 '빨갱이 집'이라는 이유였다. 졸지에 집을 뺏기다 보니 갈 곳이라고는 시어머니가 살고 있는 충북 청원군 현도면이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도 찬밥신세였다. 시어머니가 개가한 상태이다 보니 의붓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이웃집 골방에 세를 얻었다. 아이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동냥질에 나섰다.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인지, 남의 밭떼기를 조금 얻어서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고구마를 쪄놓고 나가,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행상을 했다. 광주리에 비누, 사카린 등을 담아 시골 마을을 다니며 파는 일이었다. 그러면 집에 남아 있는 아이들은 엄마가 쪄놓은 고구마를 먹고 학교에 갔다. 큰 아들 박성관(74세. 충북 청주시 현도면 시동리)은 당시 4년제였던 현도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지만, 둘째 아들 박성국은 그나마 졸업을 못했다.

가난은 대물림될 수밖에 없었다. 박성관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남의 집 머슴을 살았다. 그 후 청주와 서울에서 점원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2019년 현재는 신탄진에서 영세규모의 고물상을 하고 있다. 박성국도 어릴 적부터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16년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남편과 아들 하나를 먼저 보낸 정광임의 삶도 평탄치 않았다.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신세이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모내기철에는 이웃 마을을 다니며 모를 심었다. 가을에는 벼 베기를 다녔다. 그런데 이 일은 이웃 마을만 다닌 것이 아니다. 기차를 타고 평택까지 가 5일간 모를 심기도 했다. 계절농업노동자였던 것이다.

94세 할머니의 소원
  
평생을 가난과 씨름한 94세 정광임의 소원은 무엇인가? 아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남편을 다시 보는 것이고, 교통사고로 죽은 둘째 아들이 살아와 얼굴을 쓰다듬어 보는 것이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보통사람에게는 너무나 소박한 꿈이 왜 그녀에게는 불가능한 소원이 되었을까?
 

정광임 모자 현도면 시골집 앞에 선 정광임 모자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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