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11 09:39최종 업데이트 19.09.03 09:54
뉴욕에서 뉴요커들과 함께 막걸리 빚기 행사를 했다. 미국은 1980년대에 들어 크래프트 맥주가 성장하면서 지금껏 세계 맥주 시장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크래프트 맥주는 주방이나 주차장의 홈브루잉(Home-brewing)에서 시작하여 붐을 이루었다. "만약 당신이 맥주의 새로운 트렌드를 보고 싶다면, 홈브루어들을 보라(If you want to see future trends in beer, look to the home brewers)"는 말을 할 정도다.

그런데 집에서 술 빚기는 맥주보다 막걸리가 훨씬 쉽다. 발효제인 누룩만 준비된다면, 밥을 찌고 식히고 적당량의 물을 넣어 혼합하면 막걸리가 된다. 뉴욕 맨해튼 한인마트에 가니 누룩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막걸리 빚기는 뉴욕에서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막걸리 빚기 행사는 지난 1일 뉴욕 퀸즈의 플러싱에서, 2일 맨해튼에서 진행되었다. 한식세계화추진위에서 '술빚는 뉴욕' 행사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한다는 기사가 한인신문에 나가자, 그 다음날로 100명이 마감되고 말았다.

행사 담당자는 마감된 뒤로도 끊임없이 오는 전화에 시달렸다고 하소연했다. 나는 행사가 있기 19일 전에 뉴욕에 도착하여 실습 때 맛볼 술을 100ℓ쯤 빚어 두었다. 미리 술을 빚어 두고, 실습 때 그 술을 걸러 맛보면서 똑같은 술을 빚기 위해서였다.

뉴욕에서 막걸리 빚기, 관심이 대단하다
 

술 항아리에 용수를 박아, 맑은 술을 얻는 장면을 보여주다. ⓒ 미동부 한식세계화추진위

 
뉴욕 퀸즈의 플러싱은 한인 타운이 거대하게 형성되어 있어서 한국인이 영어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마을이었다. 플러싱 머레이힐 역에 내렸더니, 역전구이, 쌈밥집, 노래방, 전주할매칼국수, 팔도맛집, 뉴욕대왕갈비탕 등 사방이 한글 간판이었다.

술 빚기 행사는 역 앞에 있는, 24시간 운영하는 음식점 함지박에서 진행되었다. 함지박은 떡집도 운영하고 있어서, 찹쌀 50㎏으로 50인분의 고두밥을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한인마트에서 누룩을 구입하고, 뉴욕 물이 좋다하여 정수한 물을 준비했다. 참여자들은 직접 빚은 술을 1갤런(3.78ℓ) 크기의 통에 담아 가져가기로 했다.

5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의 한 공간에서 술을 빚는데, 천정이 낮고 아늑하여 굳이 마이크를 쓰지 않고도 편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지역의 특성 때문에 참여자가 모두 한인이었고, 중년 여성들이 많았는데 더러 딸들이 따라왔고, 군데군데 막걸리 향수를 잊지 못하는 나이 지긋한 남성들이 앉아있었다.

3시간 동안 막걸리 빚기, 막걸리 걸러 시음하기, 수박 막걸리 칵테일 맛보기가 진행되었는데, 중간에 자리를 뜨는 사람 없이 모두가 흥미롭게 참여했다. 술을 빚는 이들의 눈빛과 손놀림만으로도 막걸리를 배우고 싶어 하는 열망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함지박 김영환 대표는 삼색전과 홍어회를 막걸리 안주로 내놓았다. 행사가 끝나고서도 이어진 "언제 다시 오느냐, 한국 누룩은 어느 것이 좋냐, 누룩을 직접 만들고 싶다. 한국 막걸리 키트를 수입하려고 한다"는 질문 속에서 막걸리에 대한 교포들의 관심이 크고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함지박에서의 나의 기억은 마을 잔치에 갔다가 아는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잔뜩 떨다가 온 느낌이었다.

6월 2일 이틀째 행사는 맨해튼 웨스트 32가의 소주하우스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행사는 한국인이 아닌 뉴요커들이 절반 이상 참여했다. 맨해튼에서 요리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김신정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동시통역을 해주었다. 김신정씨는 맨해튼에서 음식 행사를 할 때마다 꼬박꼬박 참석하여 문제점을 지적하는, 쿠킹 스쿨 오너 출신의 까다로운 미국 여성이 왔다며 긴장하는 눈빛을 보였다.

나는 함지박과 달리, 맨해튼에서는 막걸리에 담긴 한국적인 정서와 막걸리의 차별화된 경쟁력에 대해 더 강조했다. 장황하지 않아야 했기에 나는 미리 김신정씨에게 메모를 건넸다.

"막걸리는 한국인들이 주식으로 삼는 쌀로 만들고 있다. 주식으로 술을 만드는 나라는 드물다. 와인은 포도, 맥주는 밀이 아닌 보리, 사케는 양조용 쌀로 만든다. 세계 음주 소비량의 80%를 차지하는 맥주가 보리로 만든 저알코올 탄산음료라면, 막걸리는 세계인구 77억 명 중에서 30억 명이 주식으로 삼는 쌀로 만든 저알코올 탄산음료다. 쌀로 된 저알코올 탄산음료를 만들어 한 민족이 보편적으로 마시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막걸리는 농사일을 하다가 새참으로 즐겼던 농주였고, 요사이는 노동과 놀이와 함께 하는 스포츠음료로 재해석되고 있다. 현대의 술은 노동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데, 막걸리는 태생이 그렇지 않다. 막걸리는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있는 내추럴(Natural)한 술이다. 막걸리는 직접 만들어 홈파티하기 좋은 알코올 음료로, 관리하기가 편하고, 김치 담그듯이 적은 양을 만들어도 좋고, 15일 정도의 짧은 기간에 완성되는 훌륭한 핸드메이드 식품이다."


맨해튼에서 뉴요커들과 함께 술을 빚으면서, 체험 행사의 힘을 다시금 느꼈다. 손에 일회용 장갑을 끼고, 스테인리스 볼에 고두밥과 누룩과 물을 섞고, 고두밥이 누룩물을 거의 흡수하고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올 때까지 손바닥으로 치대고, 이를 1갤런 통에 넣는데 모두가 신이 났다.
 

직접 빚은 막걸리를 들고 기뻐하는 뉴요커들과 함께. ⓒ 미동부 한식세계화추진위

 
적은 양이라 혹여 발효가 더딜까 봐, 실습용과 똑같이 빚어둔 막걸리 원주 한 컵씩을 통에 넣어주었다. 완성된 술을 한 국자 떠서 처음 빚는 술에 부어주는 것은 양조장에서도 채택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하면 생막걸리의 효모가 더해져서 안정된 발효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웨스트 32가에서 인정 많은 한식당으로 소문난 '더큰집'의 대표도 와서 술을 빚었다. 뉴욕 롱아일랜드의 와이너리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만난 외국인 부부도 참석하고, 맨해튼에서 활동하고 있는 심성철 셰프와 김경문 마스터 소믈리에도 참여하여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까다롭다는 쿠킹 스쿨 오너 출신 미국 여성 반응이 궁금했던 차였는데, 막걸리 시음회 평가에서 그녀는 마이크를 잡고서 "국순당 생막걸리는 상큼하고 마시기 쉬워서 좋았고, 바나나 막걸리는 너무 가공된 맛이 났다. 직접 만든 원주는 마시기 힘들었는데, 항아리에서 뜬 막걸리는 원주보다 살짝 옅어서 마시기 좋았다"는 평가와 함께 좋은 행사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통역가 김신정씨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날 행사에서도 "과일을 넣어서 막걸리를 빚을 수 있느냐, 약재는 언제 넣으면 좋냐, 얼마 동안 두고 마실 수 있느냐" 등 막걸리에 대한 질문이 길게 이어졌다.

뉴욕에서 막걸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뉴욕 함지박 음식점에서 막걸리를 빚고 함께 즐거워하다. ⓒ 막걸리학교

 
다민족 다문화가 공존하는 뉴욕 맨해튼에서 막걸리는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뉴욕에서 '술빚는 뉴욕' 행사를 준비하면서 내 머리 속에 한시도 떠나지 않던 질문이었다.

뉴욕에서는 막걸리보다 소주가 훨씬 더 인지도가 높다. 뉴욕에서 소주 구하기가 훨씬 쉽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전체 술 매출에서 대략 맥주가 55%, 소주가 25%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알코올 소비량으로 치면 소주가 50%가 넘는다. 한국인들이 음식점이나 술집에 앉아 주로 마시는 술이 소주다보니, 그 관성이 뉴욕까지 연장된 것이다.

국순당이 생막걸리로 미국 수출 누적량 1천 만병을 돌파했지만, 혼자 힘만으로는 문화를 만들어내기 어렵다. 살균 막걸리인 서울탁주의 월매와 보해양조의 순희가 한인 마트에 진열되어 있지만, 존재감이 약했다. 웨스트 32가 한식당 운영자들은 한결같이 막걸리의 유통 기간이 짧아서 폐기했다는 기억을 들춰냈다. 그렇다면 막걸리는 어떻게 뉴욕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즐겁게 막걸리를 빚는 뉴욕 한인 교포와 뉴요커 들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되도록 안정된 맛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막걸리 생산을 현지화하는 것이다.

술의 유통 기간을 늘리는 방법은 살균하는 것이다. 살균은 현대 양조 공정에서 맥주나 와인이나 사케에서 도입하고 있고, 막걸리도 똑같이 도입하고 있다. 그런데 막걸리는 앙금이 많고, 페트병을 사용하다보니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의 맛이 확연하게 갈린다.

그렇다고 막걸리의 앙금을 줄이면 막걸리 맛이 가벼워지고 싱거워진다. 이 싱거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막걸리의 대외 경쟁력을 위해서도, '플라스틱 아웃(Plastic Out)'을 외치는 시대에 동행하기 위해서도 페트병과 결별해야 한다.

맥주도 유통 기간을 늘리는 문제를 고민하면서 맑아졌고, 향기 성분이 강화되는 쪽으로 진화했다. 영국의 에일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페일에일-이때 페일(pale)은 창백한, 옅은을 뜻한다-이 되었고, 인도로 수출되는 과정에서 홉이 많이 들어간 인디아페일에일(IPA)이 등장했다. 막걸리가 앙금으로 맛의 무게를 유지해 왔다면, 이제는 앙금이 줄어들면서도 밀도와 맛의 깊이를 유지하는 다양한 제조법이 등장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묵묵히 생막걸리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생우유와 생화가 유통 기간이 짧다고 상품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막걸리에는 효모와 유산균이 살아있고, 그 생명체가 함께 하는 동안은 신선하고 건강 기능성이 좋지만, 사멸하면 맛과 향은 흐트러지게 된다. 막걸리의 유통 기간이 짧다는 것은 오히려 막걸리의 신선함과 친자연적인 요소가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요소가 된다.

이를 존중한다면, 막걸리는 주전자 들고 직접 받으러갔던 동네 막걸리처럼 소비자와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냉장하지 않고 살균하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나는 식재료로 식단을 구성하려는 운동과 생막걸리는 맥락을 함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논이 있는 곳에 막걸리 제조장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구 5천만 명에 막걸리 양조장이 1천개 가까이 있으니, 막걸리 양조장은 인구 5만 명에 1개꼴로 있는 셈이다. 미국에 250만 한국 교포가 살고 있으니 막걸리 양조장 50개 정도는 생길 수 있다. 막걸리의 세계화 속에는 현지화의 전략도 들어있어야 한다.

막걸리의 기술이 세계에 퍼져나가는 것을 기술 유출이 아니라 문화 전파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음식이나 술은 즐기는 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막걸리가 널리 퍼지게 되면, "진정한 막걸리를 맛보려면 막걸리 양조장이 전국에 골고루 퍼져있는 한국을 여행하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어야 한다.
 

행사에 참여한 이들에게 직접 디자인하여 선물로 준 막걸리 원주. ⓒ 임형섭

 
두 차례의 막걸리 빚기와 한 차례의 한국 전통 증류주 시음 행사가 끝나면서 나의 23일간의 뉴욕 일정도 끝이 났다. 1갤런 통에 들고 간 막걸리는 뉴욕 가정 100군데에서 한창 익어가고 있을 것이다. 고두밥과 누룩이 섞여 뽀글거리며 기포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술 속에 생명체가 있다는 신비로운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행사를 했던 소주하우스와 함지박에 막걸리를 한 단지씩 빚어두고 왔다. 술이 익거든, 나를 한 번 더 생각하라고. 막걸리 빚기에 참여했던 100명의 뉴요커들도 술이 익으면, 한국을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술은 사람을 취하게 하고, 사람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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