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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 가는 날. 무키녜(Mukinje) 마을에서 플리트비체(Plitvička) 출입구2 정류소까지는 숙소 주인 그루비치(Grubic) 씨가 데려다 주었다. 지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한 그를 크로아티아 여행 중에 만났다는 것도 이번 여행의 큰 행운이었다.
 
코라나 강. 라스토케의 석회암 지대 위로 시원스러운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 코라나 강. 라스토케의 석회암 지대 위로 시원스러운 물줄기가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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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플리트비체를 출발한 버스는 낮은 구릉지대의 나무 숲을 통과하고 있었다. 자그레브까지 가는 길은 좁은 2차선 도로였지만 포장이 잘 되어 있고 차량 왕래도 많지 않아 한적했다. 폭포수가 관통하는 마을로 유명한 라스토케(Rastoke)를 흐르는 코라나(Korana) 강의 물줄기도 시원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독립전쟁 박물관. 내전을 겪고 독립을 쟁취한 크로아티아 군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 독립전쟁 박물관. 내전을 겪고 독립을 쟁취한 크로아티아 군의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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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가 가까워지자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박물관이 나왔다. 야외 전시장에는 독립전쟁 당시 사용되었던 전투기, 장갑차,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다. 세르비아 군대의 침공을 막고 결국 독립에 성공한 크로아티아의 전쟁 유물들을 과시하고 있는 곳이다. 전쟁 당시의 무기들을 늘어트려 놓은 수준이지만 이 박물관은 확장 공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우리는 자그레브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먼저 여행 가방 보관소를 찾았다. 아직 숙소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아서 짐을 일단 버스터미널에 맡기고 오후 시간 동안 자그레브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자그레브 버스 터미널에서 여행자들의 짐을 보관해 주는 가르드로바(garderoba)는 1층의 106번 플랫폼 옆에 있었다.

여행가방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리면 접수하는 직원 아저씨가 짐의 무게를 확인하고 보관 일시가 적힌 영수증을 발급해주는 시스템이었다. 짐을 맡기는 곳이 마치 버스의 화물칸 같이 그려져 있고 그 안으로 짐이 쏙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이 짐 보관소에서 일하는 아저씨였다.
 
자그레브 버스터미널. 여행가방 보관소의 직원 아저씨 농담에 여행자들이 함께 웃고 있다.
▲ 자그레브 버스터미널. 여행가방 보관소의 직원 아저씨 농담에 여행자들이 함께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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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방을 접수하면서 오스트리아 여행객으로 보이는 아가씨들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담을 계속 나누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습니까? 예쁜 여인들. 자그레브에서는 며칠 머무를 건가요? 자그레브에는 잘 생긴 남자들이 너무 많아요. 오, 여행가방이 너무 무겁군요."

처음에는 조금 짜증이 나려고 하였지만 여행객들도 즐겁고 아저씨도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며 나도 같이 웃고 말았다. 자칫 따분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도 매일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인생을 즐기려는 아저씨의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나는 며칠 후 오스트리아 비엔나 행 버스 티켓을 산 후, 터미널 앞에 줄을 서 있는 택시를 탔다. 자그레브 시내로 가면서 네비게이션 지도를 보았더니 택시기사는 길을 돌아가지 않고 내가 생각했던 길로 잘 가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로 다가가자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새파란 트램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국의 수도답게 자그레브는 꽤 넓고 도로도 시원스럽게 뚫려 있었다.
 
자그레브 중심가. 주말의 수많은 인파 사이로 파란 트램이 지나가고 있다.
▲ 자그레브 중심가. 주말의 수많은 인파 사이로 파란 트램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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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그레브 시내의 한 중심지인 반 엘라치치 광장(Ban Jelačić Square)에 내렸다. 자그레브는 한적한 도시라고 들었는데, 내가 도착한 자그레브는 그렇지 않았다. 파란 트램을 타려는 사람들로 인해 버스정류장 앞은 매우 붐비고 있었다. 예상치 않은 활기 넘치는 모습을 보며 오늘 자그레브에 도착한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그레브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되는 반 엘라치치 광장은 자그레브 최대의 번화가로서 주변에는 식당, 카페, 쇼핑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17세기에 오스트리아 양식으로 조성된 광장 주변으로는 고풍스러운 중세시대의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동시에 멋스럽게 공존하고 있다. 크로아티아 아드리아해 주변의 도시들과는 다른, 유럽 내륙 도시의 격조가 느껴지는 곳이다.
 
반 엘라치치 광장. 주말의 광장에는 특산 농산물들이 팔리는 가판 시장이 열린다.
▲ 반 엘라치치 광장. 주말의 광장에는 특산 농산물들이 팔리는 가판 시장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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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의 심장인 이 광장에는 대중교통인 트램을 제외하고 자동차는 들어올 수 없다. 광장에 가득한 트램들은 오랜 건축물들과도 아름답게 어울리고 있었다. 게다가 토요일 오후 시간을 맞아 광장에 가득 들어찬 가판 가게에서는 자그레브 인근 농민들이 직접 수확해서 가져온 농산물들이 팔리고 있었다.

가판 가게에서 파는 농산물 중에는 올리브 기름, 아카시아 꿀, 허브 제품이 많고, 체리, 블루베리, 복숭아로 주스와 잼을 만들어 파는 가게도 많다. 말린 호박, 병아리 콩, 서양 고추냉이, 향신료 처트니(chutney), 겨자 등 식재료를 파는 가게들 그리고 피망, 고추, 가지, 토마토와 같은 채소를 파는 가게들이 있다. 도토리를 한 무더기로 묶어서 파는 가게들도 있으니 크로아티아 농촌에서 만들어지는 제품들은 다 모인 것 같다.
 
올리브유를 파는 할머니. 외국 사람에게도 자신의 특산품을 열심히 설명한다.
▲ 올리브유를 파는 할머니. 외국 사람에게도 자신의 특산품을 열심히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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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손님들을 많이 상대해보지 않은 가게 주인들은 손님을 대하는 표정들이 대개 어색하지만, 질문을 하면 자기 제품을 자랑스럽게 홍보한다. 아내는 앞으로의 여정 중에 간식과 비상식량으로 이용할 해바라기 씨 한 봉지를 사자고 했다. 해바라기 씨를 시음하던 아내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가게 주인 할머니와 의사소통을 문제없이 하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다. 손짓과 표정만큼 확실한 의사소통 수단도 없는 듯하다.

광장의 중앙에는 반 엘라치치(Ban Jelačić)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 당시 크로아티아를 대표하는 민족주의자로 평가받는 반 엘라치치 백작의 기마상은 늠름하게 광장을 지키고 있다. 반 엘라치치 백작이 들고 있는 칼은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처럼 날카로워 보이는데, 광장에 모인 크로아티아 인들에게 마치 긴장감을 잃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 같이 보인다.
 
반 엘라치치 동상. 날카롭게 조각된 그의 칼날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 반 엘라치치 동상. 날카롭게 조각된 그의 칼날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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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엘라치치 광장에서 보니 광장의 북쪽에 꽃 시장이 열려 있고 그 위쪽으로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계단이 보인다. 나와 아내는 이 계단을 통해 자그레브에서 가장 시민들의 삶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는 돌라치 시장(Dolač Market)으로 올라갔다. 1926년부터 시장이 열렸던 이곳은 노천광장에서 열리는 백 년 전통의 과일시장이다.

계단 위 돌라치 시장 입구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큰 광주리를 머리에 올린 시장 상인의 청동상이 서 있다. 이 청동상에는 시장에서 삶을 살아가는 중년 여인의 힘겨운 인생이 녹아있다. 탄탄하고 다부지게 묘사된 시장 상인들의 실제 모습은 이 동상 뒤의 큰 시장에서 현실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이 시장은 크로아티아의 여러 시장 중에서도 과일 가격이 단연 저렴한 곳이다. 좌판 시장 곳곳에서 시장 아주머니들이 직접 재배하거나 채취해서 파는 농산품들은 우수한 품질에 가격이 너무나 저렴하다. 정말 저렴한 가격에 체리, 자두, 복숭아, 오렌지, 석류, 포도 등의 과일들을 질려서 다 못 먹을 정도로 많이 살 수 있다. 게다가 크로아티아의 특산품인 허브 티와 라벤더 등의 품질과 가격도 이 돌라치 시장이 가장 좋다.
 
말린 과일을 파는 여인. 수북이 쌓인 말린 과일들은 싱싱하고 가격도 너무 저렴하다.
▲ 말린 과일을 파는 여인. 수북이 쌓인 말린 과일들은 싱싱하고 가격도 너무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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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일가게들을 돌다가 말린 과일들을 가득 쌓아놓고 파는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건실해 보이는 한 젊은 여인이 말린 과일들을 좌판 가득히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우리는 며칠 전 한번 사 먹어 보았던 달콤한 무화과 열매를 한 봉지 샀다.

"무화과를 이렇게 많이 줘요? 수박 만한 큰 봉지 한 개에 몇 천원 밖에 안 되는데..."

이 싱싱한 무화과는 너무 양이 많아서 유럽여행 기간 중에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었다. 1kg도 훨씬 더 되는 무화과 봉지 속에는 상해버린 무화과는 전혀 없고 싱싱한 무화과만이 쌓여 있었다. 싼 값의 무화과 열매가 맛도 좋으니 여행 중간에 버릴 수도 없었다. 이 말린 무화과는 유럽 여행 내내 우리의 여행 가방 속에서 여행길을 따라다녔다.

돌라치 시장의 웅성거림 속에 노랗고 빨갛게 탐스러운 과일들이 자그레브 시민들의 장바구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 시장 속에 파묻혀 들어가니 나와 아내가 온전히 크로아티아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기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체코, 슬로바키아 여행기를 게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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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