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배우 박명훈 영화 <기생충>의 배우 박명훈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에 출연한 배우 박명훈. ⓒ 이정민

  
영화 <기생충> 중후반부에 모습을 드러내며 관객들에게 충격적 반전을 선사한 캐릭터 근세. 이를 연기한 배우 박명훈은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칸영화제 현장에도 있었지만, 국내 개봉 뒤 한참 뒤까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었다. 

4년 3개월 하고도 17일. 근세가 박 사장(이선균) 저택 지하에 칩거한 기간이다. 자수성가 한 박 사장 식구 몰래 이 저택의 집사이자 아내 문광(이정은)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해왔다. 영화에선 기괴한 눈빛과 행동으로 공포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의 존재가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기에 봉준호 감독 이하 배우 본인 역시 정체를 철저히 숨겨야 했다. 촬영 전 비밀유지각서까지 써야 했을 정도.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그가 웃으며 말했다. 700만 관객을 넘긴 시점에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지금까지 <기생충>을 5번 정도 봤는데 앞으로도 더 볼 것"이라며 의지를 드러냈다. 캐릭터를 위해 머리숱을 일부러 치고, 체중 역시 8kg 정도 감량했던 그는 사실 편안한 느낌과 개성 있는 인상을 지닌 배우였다.

근세는 여기서 비롯됐다 

대중에겐 아직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는 1999년 대학로 무대를 밟은 이후 <지하철 1호선> <카르멘> <명성황후> <놈놈놈> 등의 공연으로 경력을 쌓아온 연륜의 배우다. 아내로 나온 배우 이정은과도 이미 2005년 연극 <라이어>로 인연을 맺은 사이. 봉준호 감독은 마침 박석영 감독의 <스틸플라워> <재꽃>에 출연한 그를 보고, "술주정 연기의 모든 것을 보였다"며 자신의 차기작에 이미 그를 점 찍어 놓았다고 한다.

"신기했던 일인 게 제 기억으론 감독님이 <옥자> 개봉 직후라 바쁘셨을 땐데 <재꽃> 모더레이터를 2시간 해주시고, 오디오 코멘트로 제 연기를 칭찬해주셔서 놀랐다. 그 후로 뵙진 못했다. 그러다 약 8개월 후 <기생충>으로 만나자고 연락하셔서 깜짝 놀랐지. 시나리오를 받고 읽는데 그 꼼꼼함과 반전에 또 놀랐다. 제가 어떤 장면에 나오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정말 충격적인 시나리오였거든. 동시에 실제 세상에서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기에 충분히 사실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다." 
 
 박명훈 배우가 출연해 술 취한 연기를 펼친 영화 <재꽃>의 한 장면

영화 <재꽃>의 한 장면. 박명훈은 이 영화에서 늘 술에 취해 있는 명호 역으로 분했다. ⓒ 딥 포커스

 
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나온 말이지만 영화 속 근세의 이름은 지금은 사라진 '갑근세'(갑종근로소득세)에서 따왔다고 한다. 다분히 1990년 말 감성이 포함돼 있다. 영화에서도 IMF 사태(외환위기)가 언급된다. 근세는 곧 개인의 무능력이나 잘못보단 사회 구조의 희생자였던 것. 박명훈이 봉준호 감독과 가장 많이 한 대화도 바로 캐릭터의 전사(영화엔 나오지 않는 이전 사연들)였다. 

"감독님이 갑근세에서 따왔다고 하시긴 했지만 농담도 진지하게 하는 분이라 그 말이 진짜인진 잘 모르겠다(웃음). 우리 둘 다 근세를 열려 있는 인물로 봤다. 감독님께서 우리 동네로 오셔서 식사하며 전사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만 카스텔라 가게로 자영업 하다 사채를 쓴 인물이었다. 과연 이 사람이 한 번에 망했을지 혹은 여러 사업을 전전하다 그 마지막이 카스텔라였을지, 아마 착한 성품 때문에 이전 회사에서 금방 명예퇴직을 당했을 거라는 얘기도 했다. 특별히 규정한 건 아니고 대화하면서 근세에 대해 생각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전 근세가 기이하고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굉장히 전형적인 모습이 나왔을 것이다. 빚에 허덕이던 일반 직장인이 지하실에 들어가게 됐고, 그 상황이 사람을 기이하게 만든 거지, 사람 자체가 기이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 남자라면 군 제대 앞두고 병장일 때 몸이 편해지니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잖나. 그런 느낌을 상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박 사장을 존경하는 심리? 이선균씨가 저랑 동갑인데 실제로 촬영장이던 전주에서 이선균씨가 절 맛집으로 안내하며 많이 사줬다. 리스펙트가 절로 생기더라(웃음)."


영화 대사인 "리스펙트(Respect, 근세가 박 사장에 존경심을 드러내며 외치는 말)!"도 현장에서 유행어처럼 사용했다는 후문. 보통 촬영 직전 파이팅 구호를 외치는데 <기생충> 팀은 "하나, 둘, 셋 리스펙트!"를 외쳤다고 한다. 그만큼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는 방증이다.
 
'기생충' 배우 박명훈 영화 <기생충>의 배우 박명훈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명훈이 영화 <기생충> 속 근세의 등장 장면을 재연했다. ⓒ 이정민

 
잦아들지 않는 연기 열정

근세가 몰락했던 1999년의 공기를 실제 박명훈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연기가 하고 싶어 연극영화학과에 지원했지만 낙방했고, 군 제대 후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학로에 입성했을 시기였다. 배우가 꿈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을까. 폐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봉준호 감독이 칸영화제 출품 직전 극소수 스태프와 진행한 내부 시사 때 박명훈과 박명훈의 부친을 초대한 일화가 최근 알려지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가 연기에 관심을 가진 게 당연히 아버지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 행사를 하면 꼭 무대에 올라가곤 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행정학과를 다니다가 군 제대 후 복학하지 않았다. 취업할 것인가, 다시 연기 입시를 준비할까 고민하다가 학벌이 뭐가 중요하나 싶어 대학로로 바로 가서 포스터 붙이는 일부터 시작했지. 1999년, IMF 당시 전 배우로 살았다. 제가 사업을 한 건 아니지만 무너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봐왔고, 그때 기억이 있어 근세를 이해할 수 있었지.

봉준호 감독님이 사석에서 제 아버지 얘길 들었던 것 같다. 폐암에 귀도 많이 안 좋아진 상태였다. 아들이 영화 작업해서 되게 좋아하셨는데 미리 보여드리겠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셔서 보신 거지. 아버지가 사실 영화광이시다. 지금까지 몇 천 편은 보셨을 거다. 모든 게 감독님의 배려였다. 영화를 보신 뒤 감독님과 악수하는데 아버지 눈시울이 붉어져 있더라. 감독님의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있지만 전 거기에 앞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감독님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마흔 나이, 박정범 감독의 <산다>(2015)로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철저히 실력과 열정으로 조금씩 지평을 넓히고 있다. "그때 결혼도 했고, 제 인생의 기점이 온 것이라 생각한다"며 박명훈은 "무대 연기야 고향과도 같기에 언제든 할 것이고, 영화든 드라마든 배우로서 메일 필요 없이 열어두고 경험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솔직히 아직 구체적으로 제가 뭘 하고 싶은지를 생각하진 못했다. 이제야 인터뷰를 경험하기 시작했고, 관객분들이 스포일러를 지켜주셔서 조금씩 반응이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조심스럽다. <기생충>을 계기로 많은 작품을 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전 선택받아야 하는 위치기에 그 안에서 최대한 많이 경험해보고 싶다."
 
'기생충' 배우 박명훈 영화 <기생충>의 배우 박명훈이 12일 오후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전 근세가 기이하고 무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으면 굉장히 전형적인 모습이 나왔을 것이다. 빚에 허덕이던 일반 직장인이 지하실에 들어가게 됐고, 그 상황이 사람을 기이하게 만든 거지 사람 자체가 기이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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