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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파주에는 한국의 대표 명품 전통주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다. 오늘도 이곳에서는 일찍이 육당 최남선이 조선 3대 명주로 꼽은 '감홍로'가 독 안에서 주홍빛으로 물들어간다.

본래 감홍로는 이곳 파주가 아닌 먼 북녘 땅 평안도가 고향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감홍로를 만드는 이기숙(62)씨 또한 실향민 아버지가 감홍로 빚는 모습을 어릴 적부터 보고 자랐다. 물 맑고 산세 좋은 파주 부곡리에서 술 그 이상의 것을 빚는 식품명인 43호. 감홍로 계승자 이기숙 명인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인터뷰는 지난 13일 전화로 진행했다.
  
"'조선 명주' 감홍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것"
 
식품명인 43호 감홍로 전수자 이기숙 명인
 식품명인 43호 감홍로 전수자 이기숙 명인
ⓒ (주) 감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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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홍로는 별주부전에서 토끼가 용궁에서 마시는 술이자 춘향가에서 춘향과 이몽룡의 이별주로 등장할 만큼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떨친 술이다. 감홍로가 이기숙 명인에게 전수되기까지는 명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숱한 난관이 있었다.

이기숙 명인의 할머니가 되는 '박씨 할머니'가 4대째 이어지는 술도가의 시작이었다. '박씨 할머니'가 전수해 준 주조법을 이기숙 명인의 아버지인 고 포암 이경찬 선생이 이어받아 평양에서 양조장을 경영했다. 이기숙 명인은 "아버지로부터 한때는 평안도 일대에서 굉장히 번성했던 양조장이라고 들었다"며 웃음 지었다.

일제의 전쟁은 막바지에 치달았다. 양조장의 사정도 악화됐다. 해방 후엔 정치적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월남했다. 한국으로 내려온 이경찬 선생은 지금의 미아리에 양조장을 다시 열었다.

그러나 술은커녕 먹을 양곡도 귀하던 시절. 정부는 술 빚는 것 자체를 금지했고(양곡관리법), 양조장은 결국 문을 닫아야 했다. 이 선생은 서울에 정착했고 1957년 다섯째이자 막내딸인 이기숙 명인이 태어났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고유의 전통주는 빠르게 잊혀졌다. 감홍로 또한 집안 제사나 행사 때 쓰는 가양주로 알음알음 명맥을 이어가야 했다.

뒤늦게 전통주를 계승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변경이 있었다. 1986년 이경찬 선생은 문배주, 감홍로 등의 주조기술을 인정받아 무형문화재 86호(문배주 기능 초대 보유자)로 지정됐다. 훗날 문배주의 주조는 큰 오빠(이기춘), 감홍로의 주조는 둘째 오빠(이기양)가 이어받았다.

아버지의 길을 걸은 딸

젊은 시절 이기숙 명인은 자신이 나중에 직접 술을 빚게 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고 했다. 오빠들과 아버지를 뒷바라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낯을 가리는 타고난 여린 성정도 한 몫 했다. 아버지의 꿈을 두 오라버니가 잇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2000년, 감홍로 주조 명인이었던 작은 오빠가 갑작스레 세상을 뜨고 만다.

감홍로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은 이기숙 명인밖에 남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감홍로를 보면서 자랐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술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다. 부담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랬던 이기숙씨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한 데에는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세상을 모르는 제가 유일하게 잘 아는 것이 그 술이었어요. 그런데 저 말고는 세상사람 모두가 그 술을 몰라주더군요." 자칫 문헌에만 남아 있는 그런 술이 되고 말겠구나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결정을 하고 보니 아버지의 다 못 간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러나 명인이 되는 길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의 빈 자리가 너무 컸어요. 작은 오빠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으니 주조법을 전수받았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도 없었죠." 2001년엔 감홍로에 대한 전수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명인 지정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만 같았다. "눈물 한 동이로도 모자라는" 시간이 이어졌다.

낙담만 하지 않았다. 우선 남편 이민형 대표와 함께 농업법인을 설립했다. 2005년엔 파주에 본격적인 시설을 갖춰 이듬해부터 감홍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인들의 도움으로 주조법 전수 관련 증빙 서류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마침내 2012년 이기숙씨는 당당히 명인의 타이틀을 걸고 감홍로를 만들게 되었다.

명인은 오히려 그런 경험이 아버지를 더욱 잘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30년이 훨씬 넘게 술을 빚으셨는데 저는 겨우 인정 받은 지 10년 남짓 됐습니다. 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힘든 길을 가셨는데도 결국 이 술을 지키셨죠. 저는 그래서 앞으로 걸어갈 길도 너무 걱정만은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보다야 고되겠나요."

"판매량보다 감홍로 본연의 모습이 더 중요해"
 
감홍로에는 진피, 생강, 지초, 정향, 감초, 계피, 용안육의 7가지 약재가 사용된다.
 감홍로에는 진피, 생강, 지초, 정향, 감초, 계피, 용안육의 7가지 약재가 사용된다.
ⓒ (주) 감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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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전통주 제조 사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업보다 전통 계승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처음 10년 동안은 양조장 사정이 많이 어려웠죠. 명인으로 지정된 후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지금도 녹록지는 않고요."

사람들은 익숙한 술을 찾는다. 정부도 쌀로 만든 탁주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한약이 들어가는 도수 높은 증류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막걸리 같은 탁주나 약주로 변경해 우선 적자라도 줄이라고 권하는 이들도 많았다. 명인은 애초에 이 길을 걷기로 한 이유가 아버지가 만든 그 감홍로를 계승하기 위해서라고 잘라 말했다. 그래서 높은 도수와 까다로운 재료를 고집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감홍로의 도수를 낮추면 훨씬 수익이 나지 않을까. 이 명인은 상품성을 위해 술 자체의 농도를 희석할 생각은 없다고 단호하게 답했다. 오히려 명인은 도수를 높이거나 재료를 좀 더 고급화 해 원형에 가까운 감홍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외국의 고급 전통술처럼 한국에도 그런 술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도 토종 메조(조의 한 종류)처럼 더 좋은 곡물과 약재 등을 사용해 감홍로 본연의 완전한 향과 빛깔을 완성하려 노력중이죠. 문헌마다 약간씩 다른 감홍로를 복원하는 작업도 함께 병행하고 있습니다."

술도 사람을 만든다
 
강연에서 감홍로에 대해 소개하는 이기숙 명인
 강연에서 감홍로에 대해 소개하는 이기숙 명인
ⓒ (주) 감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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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숙 명인은 강연이나 대중 앞에서 음식이나 술을 만들게 되면 술에 대한 철학을 이야기한다.

"술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술을 어떻게 마시고 즐겨야 하는지 잘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항상 체감합니다. 그런 교육이 없어 술로 인한 실수와 사건이 너무 많아요."

명인은 술과 관련된 사고를 보게 되면 술에 대한 회의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책임도 느낀다고 했다. 옛 선인들이 주도라고 불렀던 술 문화 또한 이기숙 명인이 계승하고 싶은 또 하나의 유산인 셈이다.

"저도 술 빚는 사람이지만 술로 일어나는 사건들은 더 경각심을 가지셨으면 합니다. 술로 변명을 해서도 안 되고 술이 그런 화풀이의 수단도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술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은 가중처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술 문화가 조금씩 변한다고 하더군요."

이런 뚜렷한 가치와 철학이 이기숙씨를 명인으로 부를 수 있게 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본이 되지 않는 철학과 전통은 실전되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수백 년간 사랑받은 맛과 향, 한 집안이 우직하게 지켜온 전통,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외길을 걸어온 한 사람의 삶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무형의 가치다.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전수하고 지켜온 곳에서 그런 가치를 알아본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명인의 감홍로는 지난 2014년 이탈리아 국제 슬로푸드 본부가 선정하는 '맛의 방주'(Ark of Taste : 소멸 위기에 처한 각 나라의 특색 있고 가치 있는 전통 음식과 지역 문화의 보전을 위한 국제적 프로젝트)에 등재됐다. 명인의 철학처럼 술 빚는 자의 품격이 언젠가 마시는 자들마저 변화시키기를 기대해 본다.

태그:#감홍로, #이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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