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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덴 대학을 나와서 우리는 어슬렁거렸다. 미리 방문을 계획한 곳이 아니다보니 사전 지식도 없었고, 지도도 없으니 딱히 갈 곳도 몰랐다. 그러나 계획 없이, 지도 없는 어슬렁 거림이 좋았다.

루카치는 별도 지도도 없는 길 찾기의 허망함을 경고했지만 낯선 도시에서의 지도 없는 방황은 낭만으로 치장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별이 보이지 않아도 지도가 없어도 당황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게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운하에 비친 거꾸로 선 건물들의 만화경 같은 풍경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지하층 창턱에서 불과 두어 뼘 차이로 흐르는 물이 아슬아슬하게 여겨져 괜히 걱정해 보기도 한다. 운하 안쪽의 골목길을 걷다가 어느 집의 거실 풍경을 살짝 훔쳐보는 재미 또한 삼삼하다.

정처 없이 골목길을 걷다 어떤 건물 앞에 안내판이 있는 것이 보였다. 읽어보니 1463년에 지은 건물이다. 17세기까지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며 건물 앞의 광장은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의 대각선 맞은편에 라틴스쿨이 있었는데 렘브란트가 어린 시절(1616~1621) 이 학교에서 드로잉 수업을 했다고 써져 있다.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건물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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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건물을 구경하면서 뒤편으로 돌아갔는데 활짝 열린 대문 안으로 사람들이 꽤 모여 있다. 무슨 행사를 하는 것 같았다. 들어가 구경해도 될까, 이방인의 어색함으로 우물쭈물하며 탐색하고 있는데 지긋한 나이의 노인 한 분이 나오더니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라고 한다. 우리는 노인을 따라 들어갔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중앙에 커다란 홀이 있고 좌우에는 계단식 객석을 갖춘 연주장이다. 복도에는 사람들이 모여서 음식과 옷가지, 그리고 생필품과 같은 잡동사니를 팔았다. 바자회 같았다.

장사 분위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웃고 떠드는 축제 분위기다. 노인한테 오늘이 무슨 날이며, 어떤 행사를 하냐고 묻자,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정기음악회가 열리는 날이라고 한다. 음악회라면 입장권을 끊고 들어와야 하는데 매표소를 보지 못했다고 하니까. 주민들을 위한 공짜 행사라고 한다.

무대에는 사오십 명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 단원이 연주 준비를 하고 있고, 지휘자는 단상에서 지휘봉을 흔들며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다. 동네 행사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를 갖추고 진지하게 준비하고 있다. 노인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는데 시끄럽기도 하거니와 네덜란드식 이름을 알아듣기 힘들어 대충 고개만 끄덕이며 반가움을 표했다. 그 역시 내 이름을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동네 음악회가 열리는 홀
 동네 음악회가 열리는 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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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에 참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노인들이다. 모두 잘 차려입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담소를 즐기고 있다. 그럴만한 장소이니 그런 사람들만 모였겠지만 흔히 말하는 선진국 노인들의 여유로운 삶을 엿보는 것 같아 살짝 부러움이 일었다.

악기를 조율하는 오케스트라가 드디어 연주를 시작하려고 자리에 앉자 우리는 건물을 나왔다. 안내했던 노인이 연주회를 같이 듣자고 했으나 일정 핑계를 대고 사양했다.

연주회장을 나오면서 문득 우리나라 노인들의 처지가 떠올랐다.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십년 넘게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불명예스러운 두 가지 지표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이다.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평균의 3배가 넘는데 이보다 주목해야 할 건 상승 속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가파르다는 것이다.

한 언론에 따르면, 노인 자살률 또한 58.6명으로 OECD 회원국 평균(18.8명)의 무려 3배가 넘는 부동의 1위라고 한다. 부러움과 씁쓸함이 섞인 채로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골목길을 좀더 걷다가 문득 시청에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도시든 시청은 그 도시의 상징이 아닌가. 특히 유럽의 시청들은 건축의 기능성보다는 역사성과 상징성을 더 중요시하는 문화재 성격이 짙다. 우리의 친절한 안내인 구글맵을 켜자, 시청은 의외로 지척의 거리에 있다.

2분 정도 걷자 고풍스런 시청 건물이 나타났다. 그런데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가 없다. 레이덴 시 문양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니 복도가 나오고, 문이 닫힌 사무실 공간만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보통 관공서라면 먼저 커다란 홀이 보여야할 텐데 우리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나 싶어서 도로 나왔다.

건물 뒤로 돌아가니 아담한 광장이 나오고 붉은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좀전의 고풍스런 건물과 맞대어 있다. 이곳이 시청의 정문 출입구다. 광장에 안내문이 있어서 읽어보니 원래의 건물은 16세기에 지어졌는데 1923년 화재가 나서 일부가 무너졌다. 시에서 건축위원회를 구성하여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광장을 조성했다. 이전까지는 레이덴에 광장이 없어서 시민들의 불만이 컸는데 화재를 계기로 조성했다고 한다.
 
레이덴 시청
 레이덴 시청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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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덴 시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역으로 향했다. 대략의 방향을 잡고 지름길을 택하다보니 다시 골목길로 들어섰다. 몇몇 건물의 벽에 그린 특이한 화면이 눈에 띄었다. 세계인권선언(영문)을 적어 놓은 벽이 있고, 물리학공식을 적은 벽이 있다. 이는 대학도시다운 면모로서 지적 허영이라기보다는 자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였다.

물리학 공식은 호우트스미트Samuel. A. Goudsmit의 '스핀' 공식이다. 호우드스미트는 레이덴 대학 출신으로 같은 대학 울렌벡(G. E. Uhlenbeck)과 함께 1025년 스핀이론을 발표했다. 전자는 질량이나 (전기적 성질인) 전하를 갖고 있듯이 스핀이라는 고유의 성질을 원래부터 갖고 있는데, 축을 중심으로 동일한 회전속도를 유지하면서 영원히 돈다고 했다.

이는 마이크로 물리학의 기본 개념으로 중성자, 양성자 등의 소립자의 기본 특성을 밝힌 것이다. 호우트스미트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건, 노스웨스턴, MIT 교수를 역임했다. 2차대전 말기 독일의 가공할 폭탄(원자폭탄)개발 첩보를 입수한 미국이 그 진위와 진전 단계를 알아내기 위한 특별 연구소 알소스(Alsos)를 설립했는데 호우트스미트가 책임을 맡았다.
 
호우트스미트의 스핀 공식을 그린 벽화
 호우트스미트의 스핀 공식을 그린 벽화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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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을 나와 가장 번화한 상가를 지나갔다. 거리는 지나치리만큼 깔끔하고 사람들도 바쁘지 않았다. 사람들이 붐빌 시간대가 아닌 탓도 있지만 왠지 모를 한가함이 보도에 깔려 있어 밟을 때마다 느긋해! 나긋해! 하고 속삭이는 것 같다. 상점들은 대부분 자영업 분위기다. 대기업 냄새가 풍기는 프랜차이즈라곤 찾아 볼 수 없다.

그 흔한 스타벅스도 이곳에선 어디론가 숨었다. 과문 탓일까, 혹은 선입견 때문일까. 레이덴의 작은 가게들은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며 (성공이라는) 승부에 집착하지 않고 설렁설렁 (삶이라는) 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물론 지나가는 자의 시선일 뿐이다. 거기라고 생존의 곤고함이 없을까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악착같아 보이진 않았다.
 
시내 번화가 풍경
 시내 번화가 풍경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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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PERDIX, #홀란드 인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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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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