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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일 지정 생존자>.
 <60일 지정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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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장관 박무진(지진희 분)을 제외한 대통령 및 국무위원 전원의 사망을 전제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tvN 드라마 <60일 지정 생존자>. 이 드라마에서 최장 60일의 대통령권한대행으로 등장하는 박무진한테는 약점이 하나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폭발 사고 당시,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의사당 본회의장에 있었다. 그 시각, 박무진은 가족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날 아침, 박무진은 대통령 양진만(김갑수 분) 면전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았다. 그래서 본회의장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문제에 관해 원칙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개진하다가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른 결과였다.

그런데 지지율이 30% 미만인 상황에서 국회 시정연설 준비에 정신을 빼앗겼기 때문인지, 대통령 양진만은 박무진 해임문서를 작성만 했을 뿐 서명을 하지 않았다. 현행 헌법 제82조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문서로써 하며"라고 규정했다. 문서화되지 않은 대통령의 행위에 법적 효력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드라마 <60일>은 해임문서의 적법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점을 근거로, 유일한 생존자 박무진을 권한대행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의 신임을 이미 상실했다. 그래서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현행 헌법상의 장관(국무위원)은 국민에 의해 뽑히는 것도 아니고 국회 동의를 받아 뽑히는 것도 아니다. 국회는 청문회를 열 수는 있지만 동의권은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총리의 제청과 대통령의 임명만 있으면 장관이 임명될 수 있다. 총리의 제청권이 실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거의 전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처럼 대통령의 신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므로, 해임문서에 서명이 있건 없건 구두로 해임 통고를 받은 장관은 아무래도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통령 유고나 궐위 시에 합법적인 권한대행은 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

드라마 속의 박무진도 그 때문에 좀 위축돼 있다. 드라마 속의 양진만이 양(楊)씨인지 양(梁)씨인지 양(樑)씨인지 양(襄)씨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박무진이 양심(-心)의 지지를 잃은 권한대행인 것만은 확실하다.

박무진과 황교안 그리고 허정

2016년 10월 29일 제1차 촛불집회 3일 뒤인 11월 2일 오전 9시 30분, 청와대는 '황교안 국무총리의 후임자로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내정했다'고 발표했다. 이때 황교안이 사전에 통보조차 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정황들이 언론에 보도됐다.

그는 오전 8시부터 있었던 '제14차 SBS 미래한국 리포트' 축사 때 "국정을 조기에 정상화하여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30분 뒤부터 있었던 제2차 총리·부총리 협의회에서도, 국정 전반을 꼼꼼히 체크하면서 배석한 장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전 9시 30분의 내정자 발표로 그의 심리 상태가 바뀌었다는 점은, 9시 59분경 총리실이 '오후 1시에 총리 이임식을 하겠다'고 발표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9시 30분 이전만 해도 비상시국 돌파에 대한 의지를 보였던 그가 9시 30분 이후에는 정반대 태도를 보인 것이다. 해임 사실을 사전에 통보받았다면, 9시 30분 전후로 그처럼 태도가 확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서는 비상시국에 갑자기 해임 통고를 받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고, 청와대가 사전 통보 없이 공식 발표부터 먼저 한 것도 유쾌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심(朴心)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그는 인정해야 했을지 모른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황교안은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이전에 총리실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내정자 발표가 있은 지 한 달이 넘도록 그러지 못했다. 김병준 내정자가 비판적인 여론의 벽을 끝내 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권위를 상실한 박근혜가 그를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박심'의 지원을 확신할 수 없는 황교안이 12월 9일 권한대행이 됐다. <60일>의 박무진처럼, 황교안도 떨떠름한 상태에서 권한대행이 됐던 것이다. 드라마 속의 박무진이 '양심'의 버림을 받은 상태에서 권한대행이 됐다면. 실제 세계 속의 황교안은 떠난 '박심'이 돌아왔다고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권한대행이 된 것이다.

1960년 4·19혁명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상황에서, 야당 출신인 장면 부통령이 4월 23일 국회에 '부통령 사임서'를 제출했다. 이승만의 하야를 간접적으로 촉구하는 일이었다.

국민 직선제 하의 부통령 사임은 국회에 대한 사임서 제출로 효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부통령이 사임서를 제출할 때에 이를 수리할 기관은 헌법상 명문이 없으나,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 통고·접수됨으로써 부통령의 사임은 사실상의 효력을 발생하는 것으로 법률가들은 해석하고 있다"고 1960년 4월 24일자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사표 수리가 없어도 사임이 된다고 해석됐던 것이다.

국무위원들도 이미 사표를 제출한 뒤였다. "국무위원 일동 10명은 21일 상오 10시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방문하고 4·19 데모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였다"고 1960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는 보도했다.

이처럼 부통령이 공석이 되고 국무위원이 일괄 사직한 상태에서, 이승만이 승부수 하나를 던졌다. 제자이자 측근인 허정(1896~1988년) 전 서울시장을 외무장관으로 발탁한 것이다. 4월 25일의 일이다.

이승만이 YMCA 교사로 재직하던 1910년경, 고등보통학교(중학교) 학생 허정은 YMCA 학당에서 영어 과외수업을 받았다. 사제의 연을 맺은 이때, 이승만은 35세 정도, 허정은 14세 정도였다.

이들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허정이 1919년 3·1운동 이듬해에 미국으로 건너가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보좌함에 따라, 이들의 인연은 태평양 건너에서도 계속됐다. 허정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교통부장관·사회부장관·총리서리·서울시장 등을 역임하다가 4·19혁명 와중에 외무부장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관계 때문이다.

4·19 당시의 헌법 제52조는 "대통령, 부통령 모두 사고로 인하여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는 법률이 정하는 순위에 따라 국무위원이 그 권한을 대행한다"고 규정했다. 이 조문을 근거로 당시의 정부조직법(법률 제384호) 제8조 및 제13조는 외무부-내무부-재무부-법무부-국방부 장관 등의 순서로 권한을 대행하도록 규정했다.

현행 헌법 및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외교부장관이 총리-경제부총리-교육부총리-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에 이어 제5순위 권한대행 후보이지만, 1960년 당시에는 외무부장관이 부통령에 이어 제2순위 권한대행 후보였다. 그때는 부통령이 있는 대신에 총리가 없었기 때문에, 외무부장관이 부통령 다음이 될 수 있었다.

장면 부통령이 사임했으므로 1960년 4월 25일 현재의 1순위 권한대행 후보는 외무부장관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자기 제자를 수석국무위원인 외무부장관에 임명했던 것이다. 하야 요구에 시달리던 이승만이 허정을 그 자리에 임명한 것이 임기응변 차원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 전략에 입각한 측면도 있다는 점은, 허정 임명 몇 시간 전에 발행된 1960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보도에서도 나타난다.
 
"허정 씨가 외무장관에 취임하게 될 경우, 그는 수석국무위원으로서 국무원을 콘트롤할 것이며 내각책임제 개헌이 단행된다면 국무총리로까지 그 권한이 확대되리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고 모 소식통은 말하였다."
 
 
추가경정예산 문제로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는 허정 대통령권한대행. 1960년 6월 4일자 <경향신문>이다.
 추가경정예산 문제로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는 허정 대통령권한대행. 1960년 6월 4일자 <경향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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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당장의 위기 국면을 돌파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자신이 원치 않는 내각제 개헌이 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허정을 권한대행 1순위에 임명했다는 보도다. 이 보도에서 느낄 수 있듯이, 허정은 '이심(李心)'의 지원을 듬뿍 받는 상태에서 4월 26일부터 권한대행 업무를 개시했다. 이승만이 허정을 임명한 다음날 하야성명을 발표한 데 따른 결과였다.

'이심'의 지원을 받으며 권한대행이 된 허정은 스승의 '은혜'에 단단히 보답했다. '선(先) 선거, 후 개헌'이 되면 4·19 열풍 속에 총선이 치러질 수밖에 없으므로, 그는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선 개헌, 후 선거'가 되도록 만들었다. 자유당이 개헌에 참여해 4·19 후폭풍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이 때문에 1960년 6월 15일의 개헌 때는 적폐 청산이 제대로 관철될 수 없었다.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4·19 진압 책임자들을 처벌할 헌법적 근거도 만들어놓지 못했다. 그래서 그해 7월 29일 총선으로 자유당이 단 2석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뒤인 11월 29일, 새롭게 개헌을 해서 헌법적 근거를 만들어놓아야 했다.

허정이 '이심'에 보답하고자 벌인 좀더 대담한 일은, 미국대사관과의 협력 하에 그해 5월 29일 이승만을 미국으로 도주시킨 사건이다.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할 이승만을, 감옥이 아닌 하와이로 보낸 것이다. <60일>의 박무진이나 실제 세계의 황교안과 달리, 대통령의 심(心)을 듬뿍 받은 허정 권한대행이 만들어놓은 결과였다.

허정과 달리 황교안은 대통령의 의중을 확신할 없는 상태에서 권한대행을 지낸 뒤에도 박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지난 2월 27일 전당대회 대표 경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그랬다. 박근혜 변호인인 유영하 변호사가 '황교안에 대한 박심의 부재'를 천명하는데도, 황교안은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박심에 대한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표가 된 뒤에도 그 점은 달라지지 않았다. 권한대행 때도 얻지 못한 박심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보수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태그:#60일 지정 생존자, #대통령권한대행, #허정, #황교안, #대통령 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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