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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틀 때마다 우~웅 소리가 나는 구형 에어컨을 처분했다. 덕분에 3년째 선풍기로 여름을 지내고 있다. 다행히 10층 아파트창문이 남북으로 바람이 잘 통해 웬만한 폭염은 견딜 만하다. 찜통 폭염이 심한 낮에는 에어컨 있는 카페나 도서관으로 피신한다. 그래도 밤에 오는 열대야는 꼼짝없이 견뎌야 한다. 몇 차례씩 찬물로  샤워하고 물수건을 동원한다.

옛사람은 겨울 지내기가 힘들다 했지만 요즘 사람은 여름 보내기가 더 힘들다. 못 견딜 만큼 더위가 심할 때면 선문답을 암송해본다.

"동산(洞山; 807~869) 선사에게 수행승이 물었다. - 추위나 더위를 어떻게 피하는 게 좋습니까?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으로 가면 되겠지!' -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추울 때는 추위에 뛰어들고 더울 때는 더위에 뛰어드는 것이다.' <禪問禪答 / 曺五鉉편저>"

더위든 추위든 피하고 도망치는데 열중해온 소시민이 듣기에 가슴 후련해지는 역설이다. '에펠탑이 보기 싫어 에펠탑 안에 들어와 식사한다'는 모파상의 역설이 생각난다.

더위를 피해 더위 속으로 뛰어드는 역설이 가능한 이유는 '수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한 스님은 "농부는 가을의 수확을 얻기 위해 여름에 땀을 흘려야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하듯, 문제가 생기면 피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맞서 이겨내야 한다"고 선문답을 풀이했다.

우리는 수행을 하는 스님, 땀을 흘려야 하는 농부가 아닐 수 있다. 더위 피하는 데만 열중하는 현대 생활인일 수 있다. 그러나 살다보면 누구나 피할 수 없이 맞서야 할 문제를 만난다. 복잡한 생각이 많은 현대인일수록 선문답이 더 필요한 이유이다.

한때 불면증증세로 고생한 적이 있다. 남 보기에는 멀쩡한데 당하는 사람에겐 심각한 괴로움이다.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복용했다. 약발이 떨어질 때면 불안증세가 몰려왔다. 약 중독되지 않나 새로운 불안까지 겹쳤다. 아예 '며칠 잠 안 자고 버티기', 불면(不眠) 속으로 뛰어들어 보았다. 효험이 있었다. 잠이 스스로 찾아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유태인 정신의학자 빅터 프랭클(1904~1997)은 '발한증(땀을 많이 흘리는 땀 공포증) 환자 치료경험을 얘기한다. 선문답을 연상케 하는 '역설적 의도(逆說的 意圖)치료법'이다. 프랭클은 환자에게 역설적으로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릴 수 있는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권한다. 환자는 '지난번에는 한 쿼터밖에 땀을 흘리지 못했는데 이제는 열 쿼터는 흘려야지!'라고 작정한다. 환자는 일주일도 안 되어 4년간 고통 받았던 땀 공포증에서 벗어난다.

"'땀을 안 흘려야겠다(불안)'는 작정을 '땀을 많이 흘리자(역설적 소망)'로 바꾸니 공포가 사라진다. 공포를 향해 질주하는 돛단배를 밀어주던 불안이라는 바람이 소망이란 반대 방향으로 바뀌며 돛단배 앞길을 막게 된다"고 빅터 프랭클은 설명한다.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심리치료법, 로고테라피는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3년간 죽음 문턱을 수없이 넘고 28사1생으로 살아남은 결과물이다.

사실 땀을 한 말 흘린다고, 잠을 사흘 안 잔다고 죽는 것은 아니다. 큰 돈이 드는 일도 아니다. 역설은 불안한 마음을 소망(?)으로 바꾸어 공포를 벗어나게 한다. 마음이 돌아가니 몸도 따라 돌아간다. '더위 속에 뛰어들라'는 역설 선문답에 난제를 대입해본다. '가난, 피하지 말고 가난 속으로 뛰어들어라!' '죽음, 피하지 말고 죽음 속으로 뛰어들어라!' 가난이나 죽음에 온 마음을 던져 뛰어드는 일이 여름날 물속에 뛰어들 듯 가능한 일일까?

땡볕이 내리쬐는 들판을 본다. 폭염이 벼이삭을 무럭무럭 키워준다. 폭염은 곡식을 무르익게 만드는 위대한 존재다. 땡볕 더위를 고마워 하는 농부 마음 속에 뛰어들어본다. 폭염이 한결 견딜 만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보급판, 반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은이), 이시형 (옮긴이), 청아출판사(2017)


태그:#선문선답, #죽음의 수용소에서, #더위, #역설, #빅터프랭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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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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