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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창에 비행기 날개와 엔진이 보이고, 눈높이에 구름이 나란히 있는 사진은 우리를 늘 설레게 한다. 닿아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에 맞닿는 일이기에 그렇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가 청년이 맞을까, 정치라는 영역에 발 담굴 사람인 건 맞을까'라는 생각 속에 부유하고 있었다. 같은 고민을 하던 친구들과 독일, 베를린이라는 낯선 땅에 발을 내디뎠다.

'진보정치 4.0 아카데미'는 정의당에서 진행한 정치 인재 육성 교육 프로그램이다. 2018년 9월에 시작해 정치·경제·젠더·사회·환경·생태 영역을 아우르며 한국 사회를 둘러싼 진보 정치를 교육받았다.

8개월의 대장정을 끝으로 우수 수료생 8명이 이정미 전 당대표, 강상구 전 교육연수원장과 독일의 정치를 엿볼 기회를 얻었다. 연수생들이 가장 보고자 했던 것은 '청년 정치'였다. 역사 이래 처음으로 부모 세대보다 잘 살 수 없다는 세대, 우리의 삶을 바꿀 답을 얻을 기대감으로 지난 5월 31일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월 31일 새벽 6시. 독일의 청년 정치를 보러 떠나기 직전 인천 공항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번 회차의 저자이다.
▲ 진보정치 4.0 아카데미 독일 연수단 출정식 5월 31일 새벽 6시. 독일의 청년 정치를 보러 떠나기 직전 인천 공항이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번 회차의 저자이다.
ⓒ 김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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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박 9일의 일정 동안 독일 베를린에서 연수생들이 만난 단체는 기독민주당(CDU), 사회민주당(SPD), 녹색당(Grune), 좌파당(Linke)의 청년 조직이었다. 또한 정당과 무관한 시민사회단체로 '독일환경자연보전연맹(BUND)'와 '베를린세입자협회(Bmgev)'를 인터뷰했고, 정부출연기관인 '독일연방정치교육원'도 만나봤다. 그리고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한국 공무원들이 독일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야기를 들었다.

5주간 연작 기고를 통해 '진보정치 4.0 아카데미'의 연수생들이 보고 온 독일사회, 독일의 청년 정치를 풀어낼 예정이다. 첫 회로 전반적인 청년정치 현황과 유학 중에도 정의당에 힘을 보태고자 하는 '해외 당원' 간담회 결과를 나눈다.

[정치] 좌파당 "녹색당 약진은 유튜버 '레조' 영향력 때문"

5월 23일부터 26일까지 진행된 유럽의회선거에서 녹색당은 독일 내 득표율 20.5%를 기록하며 집권당인 기독민주연합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유럽 전반적으로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체감한 것이 지지율상승으로 드러났으리라 추측했다. 이에 청년좌파당의 프란지 루케(Franzi Lucke, 27세, 좌파당 대변인)는 이런 평가를 내놨다.

"유튜버 레조(Rezo)가 녹색당을 자주 언급한 게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레조는 독일의 유명한 유튜버로 2019 유럽의회선거 1주일 전에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집권 기민당 등이 우리의 삶과 미래를 파괴하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또한 그는 기후변화 등 이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좌우를 떠나 기후변화 이슈는 독일 내 젊은 유권자들에 큰 영향을 끼친 게 확실했다. 2014년 42%로 저조했던 투표율이 올해 52%로 상승한 건 30세 이하 유권자 3명 중 1명이 투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청년기민당(Junge Union, CDU)은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는 기후행동 시위인 '프라이데이 포 퓨처'(Friday for Future, 아래 FFF)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자평했다. 청년사민당(Jusos, SPD)은 모정당인 사민당이 집권당 기민당과의 연정으로 확실한 스탠스를 취하지 못한 게 지지율 하락과 당 대표 사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된 원인으로 분석했다.

청년 정당들은 상당히 자유로운 행보를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청년사민당은 모정당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캠페인 자체도 달리하고 있다. 청년사민당의 미아(Mia, 26세)는 '대기업 임원 중 여성 비율을 30%로 확충하자'는 모정당에 "최소 40% 이상을 확보하라는 압력을 넣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청년좌파당(Links'jugend Solid) 역시 마찬가지다. 좌파당의 자라 바겐크네히트 원내대표는 '독일 청년들에게 일자리가 먼저 주어져야 한다'는, 난민 유입에 반대하는 듯한 발언을 내놔 논란을 일으켰다. '독일인이든 시리아인이든 빵은 모두 1유로'여야 한다는 청년좌파당원들은 그에게 대화를 요청했지만 원내대표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정당 내 부문위원회의 입지가 아니라 독립적인 정당으로 활동하는 독일 청년정당은 모 정당에 진보적 견제와 활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정의당을 비롯한 한국의 정당들이 청년 정당에 어느 정도의 자율성과 유연성을 부여할 수 있을까.

[주거] "행복할 줄 알았던 독일... 베를린 월세가 10년새 2배로 올라?"

독일에서 주거 문제를 마주할 줄은 몰랐다. 베를린은 1평방미터 당 평균 임대료가 5.6유로(2008년 기준)에서 10년 사이 11.4유로로 2배 뛰었다.

지난 4월 베를린 알렉산더플라츠에서는 '미친' 임대료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는데 주최 측 추산 4만 명의 시민이 모였다고 한다. 독일 최대의 부동산 회사인 '도이체보넨'을 몰수하라는 시민청원도 진행되고 있다. 주택난과 치솟는 임대료에 독일 국민들은 '거대 부동산 회사를 국유화하자'고 주장한다.
 
베를린세입자협회의 회장과 이정미 당 대표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이정미 전 당 대표와 베를린세입자협회 회장의 인사 베를린세입자협회의 회장과 이정미 당 대표가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 김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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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진보정치 4.0 아카데미' 연수생들이 찾았던 '베를린세입자협회(Berliner MieterGemeinschaft 아래 베세협)'는 80명의 변호사와 50명의 상근 직원을 두고 있는 시민사회단체다.

저렴한 월 회비로 회원들은 주거 문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베세협의 활동 중 노인 주거권 확보를 위한 대안이 인상적이었다. 최근 베를린에서는 폭염 중 쫓겨나는 노인 세입자 문제가 커지고 있다. 베세협은 임대인이 계약을 해지해도 70세 이상의 세입자가 안전을 목적으로 일정 기간 주거를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베를린 시 정부에 요구 중이다. 이들은 '필요한 주거의 크기가 상반되는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 간 주택을 교환하는 대안도 준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해외에 있는 정의당원 박아무개씨(하이델베르크, 생물정보학 전공)는 정의당의 미래 전략에 힌트를 줬다. 지난해 옥스퍼드대는 전 세계 원시부족을 돌며 '인류의 공동선이 무엇인가'를 찾은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10가지 인류의 '선' 중 한 가지는 '공동체에 충성하라'였다. 그런데 노동조합이나 정당에 가입하는 것은 공동체 충성에 반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게 박아무개씨의 견해다. 직장생활을 오래 하면서 주위 사람들이 정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걸 본 내게도 퍽 공감됐다.

베세협과 같이 문제가 발생했을 때 기댈 곳으로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정당이나 노동조합 가입의 문턱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에게 거친 정치 메시지 같은 것이 정당의 첫 인상이 되어서는 앞서 언급한 '부정적 인식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알바하다 억울하게 잘렸을 때 찾아가는 곳' '월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곳', 이런 곳이 정당 청년 조직의 미래가 돼야 하지 않을까.

[산업]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는 독일, 그런데...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던 그 날의 충격. 대부분의 직업은 AI(인공지능)의 몫이 된다는 시대를 앞두고 우리는 '노동의 미래'를 어떻게 그려야 할까.

베를린 연수의 첫 인터뷰 상대는 독일연방노동조합연맹(DGB, Deutsche Gewerkschaftsbund)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노동조합, 670만 조합원이 선출한 대의원 400명이 참여하는 DGB 총회에는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도 참석한다.

DGB의 도로 친케(Doro Zinke, 전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부 회장)는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놨다. "Industry 4.0(우리가 흔히 말하는 4차산업혁명)은 기존 산업과 크게 차이가 없다"거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노동자의 재교육"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사실 실체적이고 뚜렷한 대안이 준비돼 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DGB에서 느낀 의아함은 주독 한국대사관에서 풀렸다. 경제 담당인 이진희 조사관은 3년간 지켜본 독일 산업을 이렇게 설명했다.

"4차산업혁명을 선진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악한 디지털 인프라를 활성화시켜 제조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이어가고자 한다."

실제로 독일은 현재까지 5G 주파수를 공식적으로 선정하지 못했다. 독일연방정부는 Cyber Physical Systems(Internet of Things의 독일식 표현)를 도입하고자 애쓰지만 대다수 중견기업들은 필요성을 크게 못 느끼는 상황이란다.

[기후] "한국 환경운동은 어떤 상황?"... 독일에서 받은 질문
 
Friday for Future 시위 중인 6월 5일 오후 2시 경의 Invaliden 주립 공원. 자유로운 발언 무대와 낮은 연령대가 인상적이다.
▲ 밝은 Friday for Future 시위 현장 Friday for Future 시위 중인 6월 5일 오후 2시 경의 Invaliden 주립 공원. 자유로운 발언 무대와 낮은 연령대가 인상적이다.
ⓒ 김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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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기간 중 FFF 시위에 참가할 수 있었다. 스웨덴의 그레타 툰레비가 시작해 전 세계로 퍼진 이 시위는 청소년들이 금요일마다 학교를 가지 않고 정부 기관 앞에서 기후 행동을 촉구하는 것.

약 2만 명 정도의 인원이 무더운 오후 인발리덴(Invaliden) 주립공원에 모였다. 트럭 대신 자전거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자유롭게 발언을 하고 있었다. 집회 참가자 중에는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정치의 탓인지, 교육의 발전 탓인지, 사회적 인식 차이 때문인지, 한국에서 기후행동에 나서는 소수 청소년이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베를린의 환경 이슈를 이끌어가는 독일환경자연보전연맹(BUND, Bund Fur Umwelt und Naturschutz Deutschland)과도 인터뷰를 진행했다. BUND는 플라스틱 줄이기, 의류 재활용과 같은 실생활운동에서부터 베를린 훔볼트 대학과 협업해 환경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베를린 시 의회에서 환경 의제에 대해 어느 의원이 어떤 의견을 내고 의결을 하는지도 파악해 연맹 회원들에게 주기적으로 알리기도 한다.

BUND는 한국의 환경운동을 궁금해 했다. 독일의 전기 요금은 1kW 당 30센트로 프랑스의 14센트에 비해 비싼 편이다. 그런데도 독일의 화력발전소 의존도는 아직 48%이며, 올해 초에야 석탄위원회의 타협안으로 더 이상 화력발전소를 짓지 않기로 결정됐다. 기민당은 신재생에너지가 전기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한국의 환경운동 현황을 묻는 BUND에게 시원한 답을 해줄 수는 없었다. '이제야 논의를 시작했다'는 말밖에 못했다.

7박 9일의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1평 남짓한 고시원 방으로 돌아와 버렸다. 모든 답을 얻지는 못했다. 4차산업혁명이라 불리는 시대적 흐름 앞에서 독일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보고자 했으나 뚜렷한 실체를 보진 못했다. 또한 5월 유럽의회선거에서 약진한 녹색당의 성장 동력이 무엇인지 제대로 찾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답을 찾는 것만이 목적이어선 안 된다. 출발할 때의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어디론가 떠나는 행위를 통해서 '나침반'을 얻는다. 베를린에서의 연수를 통해 우리는 한국의 정치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베를린 좌파당의 프란지 루케에게 정치인으로서의 진로를 물었다. 14세에 입당해 현재 당 대변인이 된 그녀는 "저는 이미 정치인이에요"라고 답했다. 우문현답이다. 정의당 '진보정치 4.0 아케데미' 1기 활동은 인천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면서 끝났지만, 우리는 더이상 예전의 '연수생'이 아니다. 청년 정치인이 됐다고 할까. 

태그:#독일 정치, #청년, #정의당, #진보정치 아카데미, #베를린 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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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까비가 나보다 먼저 천국에 가면 다른 멍냥이들과 아주 즐겁게 지내다, 뒤따른 우리 가족을 맞아주길 바라는, 모든 존재의 평등을 꿈꾸는 꼬꼬마 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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