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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이 해남읍 연동마을에 뿌리를 내린 지 500년이 지났다. 그 뿌리는 더욱 단단해져 현산면 바닷가 백포마을과 초호마을에 잔뿌리를 내렸다. 해남윤씨 가문은 해남읍과 삼산면 너른 옥토를 벗어나 바닷가에까지 뿌리를 뻗은 것이다. 350년 전 백포마을에 공재고택이, 100여 년 전 초호마을에 윤철하고택이 자리 잡은 후 후손들이 번성하였다.

백포마을
  
백포마을 전경 마을뒷동산에서 바라다본 백포마을 전경이다. 공재 후손 집으로 오래된 기와집 몇 채와 개량한옥이 뒤섞여 있다.
▲ 백포마을 전경 마을뒷동산에서 바라다본 백포마을 전경이다. 공재 후손 집으로 오래된 기와집 몇 채와 개량한옥이 뒤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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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마을은 뒷산, 망부산에 오긋하게 안기고 바닷가 향해 헤벌어져 있는 고요한 마을이다. 백포만 간척사업이 있기 전에는 마을 가까이까지 바닷가였다. 고산 윤선도(1587-1671)와 공재 윤두서(1668-1715)를 거쳐 1930년대까지 이어온 해남윤씨 집안의 간척사업 사례는 많다. 그 중 하나가 백포만 간척사업이다.

공재의 큰아들 윤덕희(1685-1776)가 지은 공재행장(行狀, 죽은 이의 행실을 기록한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자, 공재는 백포만에 간척지를 개간하고, 염전을 만들어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화염)을 구워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택에서 본 마을 앞 논과 백포바닷가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멀리 물러나 있다.
▲ 고택에서 본 마을 앞 논과 백포바닷가 간척사업으로 바다가 멀리 물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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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생긴 간척지는 여기에 별서(別墅)를 짓고 관리하였다. 고산이 백포마을에 공재고택을 짓고 생활하려 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작 고산은 바닷바람이 심해 여기에서 살지 않았고 생을 마감하기 전, 2년 남짓 해남에 머문 공재마저 녹우당을 보금자리로 삼고 공재고택에는 거의 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백포마을은 공재고택을 비롯하여 일곱 채 오래된 기와집과 개량한옥 집이 뒤섞여 있다. 오래된 기와집은 공재의 후손 집들로 조선후기에서 개화기를 거치며 변화된 주거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공재고택을 중심으로 윤씨 집안의 재실쯤으로 보이는 모선당(慕先堂)과 공재의 9대손인 크라운제과 창업자, 윤태현회장의 생가가 있다.
  
백포마을 공재 후손집  골기와는 곰삭고 푸슬푸슬 성긴 흙돌벽은 색이 바래서 묵은 향기가 난다. 집채 모두 우진각지붕인 점이 눈여겨볼만 하다.
▲ 백포마을 공재 후손집  골기와는 곰삭고 푸슬푸슬 성긴 흙돌벽은 색이 바래서 묵은 향기가 난다. 집채 모두 우진각지붕인 점이 눈여겨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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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마을 옛집 한때 서당으로 쓰였다 한다. 눈썹지붕이 달려있는 아름다운 집이나 기둥이 삭아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다.
▲ 백포마을 옛집 한때 서당으로 쓰였다 한다. 눈썹지붕이 달려있는 아름다운 집이나 기둥이 삭아 무너질 위험에 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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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 바로 위에 예전에 서당으로 쓰였던 기와집이 있다. 사람훈김이 사라져서 그런지, 바닷바람 탓인지 기둥은 삭아 곧 부러질 듯 위태롭게 보인다. 공재고택 서쪽 건넛집의 곰삭은 우진각지붕 골기와와 색 바랜 흙돌벽은 꽤 볼 만한 것이다.

공재고택
  
공재고택 담 기단을 막돌로 높고 두텁게 쌓고 그 위에 흙돌담을 쌓았다. 웬만한 바닷바람에 끄떡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 뵌다.
▲ 공재고택 담 기단을 막돌로 높고 두텁게 쌓고 그 위에 흙돌담을 쌓았다. 웬만한 바닷바람에 끄떡하지 않을 만큼 튼튼해 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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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350년 된 공재고택은 사랑채와 문간채는 사라지고 안채와 사당, 헛간, 곳간채만 남아 있다. 후손의 말로는 사랑채는 화재로 소실되고 고택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이 훼손되었다 한다. 'ㄷ' 자형 안채 중 동서 양 날개 채는 맞배지붕, 대청이 있는 안채는 합각이 아주 작은 팔작지붕이다. 지붕이 쳐들려 있지 않고 합각이 아주 작은 것은 바람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공재고택 안채  ‘ㄷ’ 자형으로 안채 양 날개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대청이 있는 안채는 합각이 아주 작은 팔작지붕이다.
▲ 공재고택 안채  ‘ㄷ’ 자형으로 안채 양 날개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대청이 있는 안채는 합각이 아주 작은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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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청우재(聽雨齋)’ 편액  빗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인가. 녹우당이 초록 색감으로 눈을 시원하게 한다면 청우재는 귀를 맑게 한다.
▲ 안채 ‘청우재(聽雨齋)’ 편액  빗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인가. 녹우당이 초록 색감으로 눈을 시원하게 한다면 청우재는 귀를 맑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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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는 '청우재(聽雨齋)' 편액을 달고 있다. 빗소리를 듣는 집이라는 뜻인가. 똑똑똑 청우재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참 좋다. 녹우당은 눈을 시원하게 하고 청우재는 귀를 맑게 한다. 나는 청우재가 왜 자꾸 청우림(聽雨林)으로 읽히는지 모르겠다. 장대비가 내리는 모양이 '비숲'처럼 보여 우림(雨林)이라 했다면 이 집안사람들의 풍부한 예술적 감성에 나름 어울리는 이름 아니겠는가.

공재의 자화상, 낙향의 이유를 담다

공재고택은 공재의 나이 46세에 해남으로 낙향하여 잠시 머문 집이다. 48세에 저세상 사람이 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잠시 머문 집이 되었다. 한양에서 가장 먼 변방, 땅 끝에 내려와 절망감을 훌훌 떨어버리고 숨어 지내며 인생2막을 설계하려 했으나 이마저 못다 이룬 꿈이 되고 말았다.

공재는 연동마을 녹우당에서 태어나 녹우당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공재는 15세에 결혼하여 18세에 아들, 덕희를 얻고 26세 진사시를 합격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27세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삼사십 대 그의 인생은 파란을 맞는다.

30세에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간 셋째형, 윤종서(1644-1697)가 사망하고 비록 무죄로 판명됐지만 이영창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에 대한 회의와 절망에 빠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목숨과 집안 재산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 벼슬길을 접는다. 절친한 선후배 벗들, 39세에 이잠(1659-1706)이 옥사하고 43세에 심득경(1673-1710)이 사망하면서 절망감은 깊어진다. 결국 46세 낙향을 결심한다.

증조할아버지 윤선도가 은거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를 끊임없이 세상에 내보이고 세상의 기회를 엿본 인물이라면 공재는 친한 벗들과 형이 정치적 핍박을 받으며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좌절하여 재능을 스스로 포기하고 갈등과 고뇌를 반복한 끝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은 인물이다. 내적 갈등과 고뇌는 그를 지치게 하였다. 이런 내적 갈등이 고스란히 표현된 것이 45세에 그린 그 유명한 자화상.
  
공재 자화상 얼굴에 내면이 담긴 듯 그의 인생이 보인다.
▲ 공재 자화상 얼굴에 내면이 담긴 듯 그의 인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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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앞세운 채 수염을 곤두세우고 졸지 않겠다며 정면을 응시하는 눈은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고 압도한다. 그러면서 그간 살아온 고독과 고뇌와 슬픔이 담겨 있어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좌절, 체념,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당색이 달랐지만 예술적 동지인 담헌 이하곤(1677-1724)이 공재의 초상화를 두고 한마디 하였다.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긴 수염 길게 나부끼고 얼굴은 기름지고 붉으니 바라보는 자는 사냥꾼이나 검객이 아닌가, 의심하지만 저 진실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은 돈독한 군자로서 부끄러움이 없구나."

세상을 향해 정면을 응시하여 도전하였으나 끝내 그의 눈은 내부로 향한다. 세상을 향해 응시하는 눈빛은 세상을 향해 던진 도전이지만 결국 세태가 어찌할 수 없다고 판단되면서 그 눈빛은 우수로 가득한 눈빛으로 변한다. 공재는 자신에게 '1712년 조선 땅에서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묻고 있다. 그 물음은 나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2019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공재고택 굴뚝

안채 부엌은 두 군데로 장독대가 있는 부엌 쪽 굴뚝은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었고 건넛방 부엌에 딸려 있는 굴뚝만 겨우 찾았다. 안채 후원 쪽 토방 기단에 숨어 있는 기단굴뚝이다.
 
안채 뒤 토방 안채 뒤편 토방과 안채 후원 사이에 물길이 길게 나있다. 토방 기단에 굴뚝이 숨어있다. 굴뚝 연기가 나와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 안채 뒤 토방 안채 뒤편 토방과 안채 후원 사이에 물길이 길게 나있다. 토방 기단에 굴뚝이 숨어있다. 굴뚝 연기가 나와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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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고택 안채굴뚝 굴뚝을 감추고 또 감추어 한참을 찾아 발견하였다. 은둔자, 고산, 공재의 생각을 잘 나타낸 굴뚝 아닌가 싶다.
▲ 공재고택 안채굴뚝 굴뚝을 감추고 또 감추어 한참을 찾아 발견하였다. 은둔자, 고산, 공재의 생각을 잘 나타낸 굴뚝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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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을 찾을 때 굴뚝이 없으면 토방을 유심히 살피면 찾을 수 있다. 고르게 다져 있는 토방이 약간 도드라져 있으면 그 아래 기단에 구멍이 나 있다. 이게 가래굴로 굴뚝 역할을 하는 기단굴뚝이다. 은둔에 익숙한 고산이나 은거를 시작한 공재에게 잘어울리는 굴뚝이라 생각한다.
 
공재고택 사당굴뚝  키는 크지 않으나 당당하고 우람하다. 6척도 안 되는 키, 기름지고 붉은 얼굴의 공재를 닮은 건가.
▲ 공재고택 사당굴뚝  키는 크지 않으나 당당하고 우람하다. 6척도 안 되는 키, 기름지고 붉은 얼굴의 공재를 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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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도 굴뚝이 있다. 안채굴뚝이 은자의 굴뚝이라면 사당 굴뚝은 공재 자신과 어울리는 굴뚝처럼 보인다. 6척도 안 되는 몸, 자신을 낮추고 양보하는 기품, 기름지고 붉은 얼굴로 표현되는 공재처럼 키는 담을 넘지 않고 불그스레하고 두툼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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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