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필자가 제작한 영화 <1991,봄>이 얼마 전 206일간의 극장 개봉을 마쳤다. ①이참에 영화 속에 담지 못해 아쉬웠던 1991년 5월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마치 튜바 소리 같아서 기타로 속삭이는 영화에는 차마 담지 못했던 이야기. 
    
 영화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영화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 해밀픽처스

관련사진보기

   
광주 도청으로 갈 것인가, 망월동 묘역으로 갈 것인가

신군부 쿠데타 세력의 집권기였던 1991년, 그해 4월 26일 시위 도중 정권의 폭력에 희생된 강경대의 유족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도청 앞에서 노제를 지낸 후, 광주의 영령들이 잠든 망월동에서 장례절차를 마무리하겠다고 그 이전부터 공언해왔다. 그러나 1987년 시청 앞 이한열의 장례식이 몰고 온 힘을 기억하고 있던 공권력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18일, 서울 시청을 제외한 어느 곳에서든 노제를 허용하겠다던 당국의 말을 믿고, 유족들과 대책위는 운구행렬과 함께 연세대에서 출발했지만 가는 곳마다 경찰병력이 진을 치고 길을 막아섰다. 대책위는 이대 입구에서 세 시간의 공방전을 벌이다 해질녘이 되어서야 공덕동 로터리로 물러나 수만 명 추모인파 속에서 첫 노제를 지냈고 깊은 밤이 되어서야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추모행렬에까지 경찰병력이 돌을 던지고 최루탄을 쏘아대는 가운데 연대 사거리에서 노동자 이정순, 그리고 전남 보성고등학교 고3 김철수가 분신했다는 소식이 강경대의 유족과 대책위에 전해졌다. 

그 시각, 광주 대책위와 남총련 준비위를 비롯해 광주 시민들과 학생들은 밤을 새워가며 도청 주변과 운구행렬이 진입할 운암 톨게이트, 양쪽에서 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18일 밤에야 서울을 떠난 운구차량이 광주 진입로인 서광주 IC에 도착한 것은 19일 새벽 네 시였다. 경찰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4개 중대 병력을 배치한 후 운구차량의 광주 시내 진입을 저지했다. 길이 막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일 오전 여섯 시부터 5천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운암동 주공 아파트 입구 사거리로 모여들어 경찰과 대치했다. 

수적 우위에 있었던 시위대의 전술은 곧고 단순했다. 경찰병력의 최루탄을 다 쓰게 한 뒤 물리적으로 저지선을 뚫겠다는 것이었다. 경찰이 쏘아댄 최루탄 연기가 운암동 하늘을 뒤덮었고, 그 연기가 사라질 때까지 잠시 쉬었다가 시위대가 다시 싸움을 거는 방식으로 대치가 지속되었다. 정오가 지나자 4월 29일 분신했던 전남대 박승희가 병원에서 운명했다는 소식이 시위대에 전달되었다. 그러자 시위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경찰이 지키고 있던 둔덕을 향해 돌진했다. 그렇게 공방이 16시간여 반복되고 있었다. 

이러한 난국 속에 운구 차량 위에 올라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강경대의 아버지, 강민조씨였다. 그는 운구 차량 위에서 시위대를 향해 이 긴 싸움을 끝내고 망월동 장지로 바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시위대는 꼼짝하지 않은 채 침묵으로 답했다. 노제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광주대책위의 오종렬 의장과 문익환 목사까지 나서서 설득했으나, 그곳에서 이틀을 지새운 시위대의 의지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80년 광주민주화항쟁 직전 서울역 앞에서 시위대를 돌렸던 학생 대표들의 결정을 돌아보면, 유족과 지도부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시위대의 모습은 분노에 휩쓸린 군중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91년 운암동에서 재현된 80년 5월의 금남로

싸움은 예상치 못한 일부 시민의 기지로 끝을 볼 수 있었다. 시민 중 몇몇이 고속도로의 가드레일을 걷어내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모여 경사면의 보도블록과 공사장 쓰레기 자루를 날랐고 배수로를 메워 길을 내었다. 그 사이 학생 시위대는 경찰이 쏘아대는 최루탄을 연막탄으로 만들며 배수로의 작업을 가렸다. 마침내 시민들이 추모행렬 선두에 있던 영정차에 밧줄을 묶어 옮기자 운구차가 뒤따르며 행렬은 중외공원 쪽으로 빠져나갔다. 

영정차와 운구차가 문예회관 앞 8차선 도로로 진입하자, 시민들은 박수를 치고 "도청"을 연호하며 그 큰 도로를 메우며 달렸다. 이어 자동차에 타고 있던 시민들이 경적을 울려 그 공간을 채웠다. 경찰의 저지선이 있었던 도청에서의 또 다른 충돌을 우려해 운구행렬은 19일 밤 10시, 도청이 보이는 금남로3가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멈춰 섰고 10만이 넘는 시민, 학생의 애도 속에 노제를 진행했다. 자정을 넘긴 20일 오전 3시, 망월동 묘역에 도착한 추모행렬은 유족과 학생 시민들이 오열하는 가운데 하관식을 갖고 문익환 목사의 기도가 끝난 뒤 강경대의 시신을 안장했다. 

18일 오후 9시경 시작해 20일 오전 2시까지 30시간 넘게 지속된 시위는 80년 광주항쟁 이후 최대 규모였다. 전남도경은 화염병 8천여 개, 돌과 보도블록 90여 톤을 사용했으며 64발짜리 연발최루탄을 스물다섯 번 쏘았고, K.P탄 2916발 등 총 4천여 차례에 걸쳐 최루탄을 발사했다고 발표했다. 노제가 끝난 뒤에는 (구)화니백화점 앞에서 공권력의 보복성 폭력으로 인해 한 시민이 의식 불명의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  

그곳에는 거리에 솥을 놓고 쌀 다섯 가마로 1천인분의 김밥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나눠준 운암동 주공아파트 주민들이 있었고, 닭튀김 등을 날라 준 샛별교회 사람들 그리고 프라이드 승용차에 과일 등을 가득 싣고 온 천주교 정평위 간사가 있었다. 의대, 치대 학생들은 간이 진료소를 만들어 부상자를 치료했으며, 박물관 앞과 다리 위의 시민들은 시위대의 공격에 함성을 지르고 최루탄 발사에 야유를 퍼부었다.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 그저 말뿐일 것 같았던 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은 그날 광주에 실현되고 있었다. 그날 광주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은 강경대가 망월동에 묻혔다는 헤드라인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다.② 모두를 통제하지 않아도 집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당시 집권 세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물에 지역감정이라는 독을 타왔다. 

추모연대의 통계에 따르면, 국가 폭력에 맞서다가 희생된 사람의 수는 집계가 시작된 1959년부터 1987년까지의 희생자 수(100명)보다 이한열의 죽음 이후인 1987년에서 1991년까지 4년 사이의 희생자(113명)가 더 많다. 민주화의 역사는 승패만을 저울질하는 어느 영웅의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그 시간들은 위헌적인 국가권력에 어김없이 저항권을 발동한 이름 없는 이들의 희생과 물러서지 않는 애도의 역사로 채워질 뿐이다.  

 
① 오케스트라나 취주악에서 가장 낮은 음넓이를 담당하는 금관악기로 밸브에 의한 변음장치를 갖고 있다 
② 2016년 강경대의 묘역은 광주 망월동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이천 민주화기념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권경원 님은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 감독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19년 7-8월 합본호에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