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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탈출하는 미 해병대
▲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된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탈출하는 미 해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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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만큼이나 정치적인 전쟁도 드물 것이다. 한국전쟁은 내전과 국제전의 성격이 한데 뒤엉켜서 나중에는 전쟁의 원인이나 성격조차 제대로 규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논쟁적인 전쟁이 되어 버렸다. 전쟁에 참전한 나라나 정치세력, 곧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전쟁의 성격이 상반될 정도로 흡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과 같은 전쟁이 바로 한국전쟁이다.

정치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전쟁은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대표하는 냉전형 국제주의와 스탈린이 구상한 종래의 현실주의 정치문법이 향후 국제질서의 향방을 놓고 벌인 국지적 형태의 무력충돌이다. 국지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결과가 냉전의 구체적 형태가 무엇인지를 규정함으로써 1990년대 소련을 위시한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로 냉전질서의 해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측면에서 세계사적 성격을 지녔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전쟁은 진보적 판결로 이름이 높았던 브랜다이스 대법관의 시보를 역임하고 미국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의 총아로 떠오른 애치슨과 산전수전 다 겪으며 집권 30년 차에 접어든 백전노장 스탈린의, 전후 국제질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념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한반도 38선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기존 예상을 뒤엎고 빠르게 움직였다. 미주리 주 자택에서 휴가 중이던 트루먼 대통령은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한국전쟁 개전소식을 듣고 워싱턴으로 급거 복귀했다. 당시 백악관은 개보수 중이었기 때문에 임시거처로 사용하던 블레어하우스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6월 25일과 26일, 두 차례의 수뇌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를 주도하고 한국전쟁에 대규모의 미군을 파병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애치슨 국무장관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채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규모 병력을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는 극동의 궁벽한 신생국에 파병한다는 결정은 민주당 입장에서는 표 떨어지는 소리가 우수수 들리는, 미국 국민들에게 대단히 인기 없는 정책이었음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에 파병할 군인들 가운데는 종전 직후 점령지 일본에 발이 묶여서 고향 땅 조차 제대로 밟아보지 못한 미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야당인 공화당은 트루먼 행정부가 본토에서 축출당한 장개석 대만을 내버렸다고 연일 비난하며 의회에서 칼을 갈고 있었다.

참전이 일단 결정되면 전비 역시 치솟을 수밖에 없다. 이는 결국 미국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으며 희생자 숫자 역시 가늠조차 어려웠기 때문에 존슨 국방부 장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을 비롯한 미군 수뇌부 역시 참전을 내심 반대했다. 이처럼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도 어려운 한국전쟁 참전 결정을 애치슨 국무장관의 지도력이 아니었다면 의회와 언론을 위시한 미국 국민들을 설득하면서 비교적 용이하게, 무엇보다도 그렇게 빠른 시기에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이 바로 애치슨 국무장관이었다. 애치슨 장관은 한반도의 정치상황이 정상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한정부 수립이후 차츰 안정화되고 있고 38선 부근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은 있을지언정 대규모의 전면적인 무력충돌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애치슨 국무장관은 이 전쟁은 북한 정군의 단독행동이 아니라 고도로 노회한 스탈린의 대외전략 구상이 반영된 것임을 직감했다.

다시 말해서, 남북한 간의 군사충돌이 한국전쟁의 표피에 드리워진 현상이라면 중국과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소련의 정치적 구상의 일단을 내보인 게 전쟁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국지전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미소 간에 향후 국제질서의 주도권의 향방이 걸린 전쟁으로 규정했기에 미국의 그만큼 발 빠른 대처 역시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오마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5월 15일 상원청문회에서 중국 본토로의 확전을 골자로 하는 맥아더의 롤백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맥아더의 그러한 작전구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다 the wrong war,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 and with the wrong enemy"(Hearings, 1951:732). 브래들리 장군의 이 증언은 단지 중국으로의 확전 반대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전반에 대한 미국 수뇌부의 평가를 웅변적으로 잘 보여준다.

미국의 대외정책을 책임졌던 트루먼 대통령이나 애치슨 국무장관의 입장에서도 한국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과 싸우는 잘못된 전쟁'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개전 초기, 미군 수뇌부는 공군력만으로 남한의 생존을 보장하기에 충분하며, 즉각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지상군 투입에는 거의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이 판단은 분명 수개월 전의 '애치슨라인' 선언이나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안보적 가치가 거의 없다는 전쟁 직전의 합동참모본부의 평가에 기초했음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미국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지상군 투입을 포함한 한국전쟁에의 대대적 개입을 전격적으로 단행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개입결정은 기존 정책을 변경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반도공약의 일관된 이행이었을까? 위와 같은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노선으로 자리 잡은 국제주의의 기본 성격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은, 한편으로는 '대서양헌장'으로 상징되는 국제주의 노선을 천명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조건 항복론'을 통해서 2차 대전을 압도적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종전과 함께 소련과의 힘의 대결이 본격화되자 미국은 대 소련 봉쇄를 선택했다. 미국이 봉쇄정책을 채택했다고 해서 국제주의 노선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북대서양조약기구와 미일안보조약으로 상징되는 군사적 봉쇄에 더해서 트루먼의 국제주의에는 마셜플랜과 같은 적극적인 경제적 관여조치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제주의를 한반도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트루먼 행정부에게는 고민거리가 하나 생겨났다. 전략적 가치가 거의 없는 남한과 같은 지역에서 봉쇄정책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미국은 이에 대해서 군사적 고려에 따른 미군철수를 통해 동아시아정책 기조는 유지하면서도 정치, 경제적 관여를 통해서 봉쇄정책과 한반도정책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앞에서 '신탁통치안'이 미국과 소련 공히, 한반도문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의 결과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아주 역설적이게도 1948년, 분단과 단정 수립 이후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관심이 제고됐다. 왜냐하면, 트루먼 독트린으로 상징되는 봉쇄정책의 근저에는 남한과 같은 신생독립국에서의 정치, 경제적 역량강화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확보하겠다는 국제주의적 함의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1950년 1월에 행해진 애치슨 장관의 프레스클럽 연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애치슨 장관의 그날 연설 제목은 공교롭게도 "위기의 아시아(Crisis in Asia)"였다. 이 연설에서 애치슨 장관은 한반도문제에 대해서 상당한 발언을 할애했다. 그것은 역대 어떤 국무장관 연설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애치슨은 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적 보호의 무조건적 보장 없이도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제한된 원조만 제공함으로써 강력한 민주국가의 건설을 촉진하고 있는 대표 사례로 남한을 꼽았다. 그는 남한에서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는 기회가 매우 훌륭하여 이를 위해서 미국이 군사보호라는 과도한 공약을 할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피력했다.

애치슨은, 대만과 다르게, 남한이 미국의 원조를 원할 뿐만 아니라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국의 전략은 성공할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예견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아시아의 어느 지역에서보다 남한에서 미국의 전략이 "효과적으로 달성될 수 있는 기회가 더 크다"고 결론내림으로써 트루먼 행정부의 아시아정책에서 남한이 지니는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Acheson, 1950:117).

애치슨 장관의 이 같은 평가는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남한의 정치상황이 미국에게 상당히 고무적이었음을 반증한다. 그래서 정치적 관여와 경제 원조를 통해 한반도 공약을 이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애치슨은 한반도에서 만일 군사적 위기가 초래된다면 그것의 책임 내지 배후에는 소련이 있음을 강하게 암시했다.

애치슨은 미국은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온 반면, 소련은 이들 국민들이 자신의 일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왔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아시아지역에서의 공산주의 정권을 이기적인 이유에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공산주의가 '소련 제국주의의 첨병'이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소리 높였다. 결국 애치슨 장관의 이날 발언은 군 수뇌부의 지상군 투입반대에도 불구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대규모 군사개입을 전격 단행할 수 있었던 결정적 알리바이로 작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잘 증명해 주듯이, 한국전쟁에 대한 트루먼 대통령의 평가는 단호했다. 한마디로, 북한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이 남한 전역으로 확대되자 트루먼 대통령은 어떠한 대가를 치루더라도 남한을 보호하기로 결정했다.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향후 세계평화와 안보가 남한의 생존여부에 달려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들은 북한이 남한을 정복한다면, 소련은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무력침략을 사주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 결과, 무제한적인 공산주의적 팽창주의는 궁극적으로 미국의 국가안보조차 위협할 것임을 경고했다(Matray, 1989:296).

'치안유지'로 명명한 한국전쟁과 같은 국지전에다가 2차 대전 규모의 지상군 투입을 결정한 과정 또한 미국 특유의 정치문법에 따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을 제외하고 30년 종교전쟁을 마무리 지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어떤 나라의 참전 이유도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가치판단에 근거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전쟁에 미국이 전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배경에는 봉쇄형 국제주의라는 전후 미국의 대외정책 노선이 자리 잡고 있음을 잘 확인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전황에 따라 수세에서 반격으로, 반격에서 공세로 변화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참전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했다. 이 역시 종래의 국제정치 문법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냉전형 국제주의의 일환으로 간주할 수 있다. 개전 당일인 6월 25일 작성된 유엔안보리 결의안 82호 1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적대행위의 즉각적 중지를 요구하며, 북한당국은 그들의 군대를 북위 38도선까지 즉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Calls upon the authorities in North Korea to withdraw forthwith their armed forces to the 38th parallel"(동아시아연구원, 2008:110).
 

연속해서 작성된 안보리 결의안은 UN의 작전범위를 38선 이남으로 제한했고 임무 또한 전쟁 전의 경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에 따라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전쟁의 기본개념을 "적의 격퇴와 원상회복을 목표로 하는 봉쇄의 제한전"으로 수립할 수 있었다(도진순, 2010:104).

하지만, 수세에 있던 UN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전쟁목표가 국토완정론에 입각한 '북한군 격멸'로 변경되고 작전범위 역시 '전 한반도의 통일'로 확대됐다. 전쟁의 성격이 38선 이남의 봉쇄적 제한전에서 한반도 전역의 체제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한국전쟁의 국제화는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을 격퇴하고 38선 이북으로 진격해 들어가는 '롤백'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참전 역시 시기선택의 문제로 남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사태 전개는 미 행정부가 기존의 전쟁목표를 공식 수정함으로써 발생한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면서 승리 분위기에 도취해 급작스럽게 전략변화가 발생했다. 롤백작전의 폐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영국은 38선 이북으로의 반격이 시작되자 본래의 전쟁목표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철수시키겠다고 강력히 항의했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민간인을 포함한 전투원들의 희생이 불필요하게 늘어났다. 치안유지를 목표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 역시 예상외로 희생자가 늘어나고 전쟁에 대한 피로가 누적되면서 결국 정전협상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한전에서 롤백으로의 급격한 전략변경은 '군사행동주의'라는 미국 대외정책의 아비투스가 재현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군사행동주의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미국인들의 독특한 우적관에 더해, '전쟁이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으로 정의한 클라우제비츠의 전쟁관을 거부함으로써 나타난 결과이기도 했다. 롤백으로 인한 전쟁의 장기화는 한반도의 미래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남북 사이의 군사적 적대가 불필요하게 심화됐다. 나아가, 한반도가 전 세계적 냉전의 대치선을 따라 가장 첨예한 군사적 대립지역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 참고문헌
도진순. 2010. 「한국전쟁의 기본개념으로서 제한전의 성립과 분화」. 한국역사연구회 현대사분과 편. 『역사학의 시선으로 읽는 한국전쟁』. 휴머니스트.
동아시아연구원 한미동맹태스크포스. 2008. 『변환시대의 한미안보협력』. 동아시아연구원.
Acheson, D. G. 1950. "Crisis in Asia; An Examination of United States Policy." Department of State Bulletin 22.551(23 January).
Acheson, D. G. 1962. 『힘과 외교』. 서울: 문화당.
Hearings. 1951. Military Situation in the Far East. 82nd Congress. 1st session Part 2.
Matray, J. M. 1989. 『한반도의 분단과 미국: 미국의 대한 정책, 1941-1950』. 을유문화사.

태그:#맥아더, #제한전, #롤백, #라쇼몽, #국제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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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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