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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용자와 도서관 사서가 함께 쓴 도서관 역사 여행기입니다. 대한제국부터 대한민국까지 이어지는 역사 속 도서관,  도서관 속 역사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편집자말]
한지민과 정해인 주연의 MBC 드라마 <봄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의 '재탕'이라는 반응부터 '수작'이라는 평까지 화제를 뿌리면서 방영하다가 종영했다. 드라마 <봄밤>의 남주인공 유지호(정해인 분)는 약국에서 일하는 '약사'다. 여주인공 이정인(한지민 분)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그녀의 직장이 도서관인데, 그녀의 '직업'은 뭘까?

드라마 10화에 드디어 그녀의 직업이 등장한다. 유지호의 엄마(김정영 분)를 만난 이정인은 인사를 하면서 자신을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서'(司書)라고 소개한다. 유지호 아들 유은우(하이안 분)가 부르곤 했던 "도서관 선생님"은 사서다. 영어로는 라이브러리언(Librarian).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

'도서관 선생님'이라 불리는 일
 
도서관 사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로 화제를 모은 <봄밤>(안판석 연출). ‘사서’가 주연으로 등장함에도 여주인공의 직업인 ‘사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드라마였다.
▲ 드라마 <봄밤> 도서관 사서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로 화제를 모은 <봄밤>(안판석 연출). ‘사서’가 주연으로 등장함에도 여주인공의 직업인 ‘사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은 드라마였다.
ⓒ i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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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은 언제부터 '사서'라고 했을까. 조선시대 '사서'(司書)는 세자를 교육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6품 관직을 의미했다. 조선시대 사서 역시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세자에게 가르치기 위해 '책'을 다뤘으나 지금처럼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을 의미하진 않았다.

조선의 왕실 도서관, 규장각에서 서책을 담당한 사람은 '검서관'(檢書官)이라 칭했다. 검서관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사검서'(四檢書)로 알려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일 것이다. 양반의 서얼 가운데 학식과 재능이 탁월한 사람을 검서관으로 발탁했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책 전문가'라 할만하다.

검서관은 규장각 관원을 보좌하며 서책을 관리하고 필사하는 일을 맡았다. 대한제국 대신 중 유일하게 독립운동을 했던 동농 김가진도 관직 생활을 '검서관'으로 시작했다.

조선의 국립대학 성균관의 도서관은 '존경각'(尊經閣)이다. 존경각에서 책의 대출과 반납을 담당한 관리는 '책색관'(冊色官)이라고 불렀다. 존경각 초기에는 성균관 관원 중 정4품 사예(司藝)와 정8품 학정(學正)이 책의 대출.반납을 맡다가 선조 때를 전후로 정4품 사예와 정6품 전적(典籍)이 책을 담당했다(관련 기사 : "책 분실하면..." 정조가 성균관 도서관에 내린 명령) . 

'도서관'과 '사서'는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용어
 
일본에서 ‘사서’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1897년 제국도서관 관제에 ‘사서장’과 ‘사서’가 언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07년 우에노공원에서 문을 연 제국도서관은 1947년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9년 ‘국립국회도서관’으로 통합되었다. ‘우에노도서관’(上野圖書館)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0년부터 국립국회도서관 산하 ‘국제어린이도서관’으로 쓰고 있다.
▲ 일본의 옛 ‘제국도서관’ 일본에서 ‘사서’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1897년 제국도서관 관제에 ‘사서장’과 ‘사서’가 언급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07년 우에노공원에서 문을 연 제국도서관은 1947년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49년 ‘국립국회도서관’으로 통합되었다. ‘우에노도서관’(上野圖書館)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0년부터 국립국회도서관 산하 ‘국제어린이도서관’으로 쓰고 있다.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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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라는 말은 이 땅에서 언제부터 쓰였을까. 일제 강점기의 유산이다. 대한제국이 주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근대 문화시설인 도서관의 도입도 일제 강점기 즈음 이뤄졌다. 식민 시기에 도서관 제도가 보급되다 보니, 일본이 번안한 도서관 개념과 용어를 그대로 받아들여 쓰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사서'라는 용어를 언제부터 사용했을까? 1897년 제국도서관 관제에 도서관장 아래 '사서장'(司書長 : 나중에 '사서관'으로 바뀐다)과 '사서'를 두면서 쓰기 시작했고, 1899년 <도서관령>에 '사서'를 명시하면서 법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사'(司)는 직무나 벼슬, 관리를 뜻하는 말인데, 책에 관한 관직이라는 의미로 '사서'라는 명칭이 쓰이지 않았나 싶다. 일본에서 라이브러리언(librarian)을 '사서'로 번안한 이유와 계기가 있을 텐데, 그 정확한 유래를 알기 어렵다.

'도서관' 또한 일본이 번안한 명칭이다. 이 땅에서 쓰인 서적관, 종람소 같은 명칭이 '도서관'으로 통일되는 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부터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먼저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서구 근대 문물을 번안하는 '우선권'과 '작명권'을 그들이 선점한 탓이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남이 지어준 이름대로 불리는 자를 '식민지 백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도서관과 사서 모두 일본이 '지어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식민지를 겪지 않고 스스로 근대화를 추진했다면 우리는 '도서관'과 '사서'를 뭐라고 이름 지어 불렀을까.

조선인 '최초의 사서'는 누구인가?
 
대한교과서주식회사는 <현대문학>(1955), <새소년>(1964) 같은 잡지를 발간했고, 어문각, 아이세움(아동), 와이즈베리(성인)를 통해 단행본 출판사업을 병행해왔다. 교육 출판 사업뿐 아니라 계열사로 에너지, 레저,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 ‘미래엔’ 사옥 대한교과서주식회사는 <현대문학>(1955), <새소년>(1964) 같은 잡지를 발간했고, 어문각, 아이세움(아동), 와이즈베리(성인)를 통해 단행본 출판사업을 병행해왔다. 교육 출판 사업뿐 아니라 계열사로 에너지, 레저, 투자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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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은 그렇다 치고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후 조선인 중에 가장 먼저 '사서'가 된 사람은 누구일까? 도서관계에서는 국립도서관 부관장 박봉석이라고 짐작하는 분이 많을 텐데, 박봉석은 '조선인 1호 사서'가 아니다.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사서 검정시험에서 가장 먼저 자격증을 취득한 조선인은 최장수(崔長秀)다.

1909년 생으로 리츠메이칸대학(立命館大學)을 졸업한 최장수는 당시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촉탁으로 일했다. 최장수는 1937년 조선인 중에 가장 빨리 사서 검정시험을 통과했다. 일본 문부성이 사서 자격 검정을 예고한 것이 1936년인데, 1937년 치러진 제1회 시험에서 사서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다.

당시 일본 문부성의 사서 검정시험은 필기와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자격증을 발급했다. 필기시험 과목은 국민도덕요령, 일본어, 한문, 일본사, 도서관관리법, 도서목록법, 도서분류법, 사회교육개론, 외국어(영어, 독어, 불어 중 택일)였다. 박봉석은 1939년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사서 자격증을 취득했다. 자격증 취득을 기준으로 보면 최장수가 박봉석보다 2년이 빠르다.

조선인 사서 자격증 1호인 최장수는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하다가 도서관을 떠나 '출판계'로 자리를 옮겼다. 해방 후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관리를 맡은 최장수는 문교부 편수국장이 된 외솔 최현배의 요청으로 교과서 제작 업체를 급히 물색하는데, 이 과정에서 김기오를 만났다. 최장수는 1931년 고학당, 1936년 문화당인쇄소를 창업해서 인쇄 출판업을 이어온 김기오에게 교과서 제작 사업을 제안했다. 

상당한 투자와 리스크가 예상되는 사업이지만 김기오는 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김기오는 1946년 11월 15일 문화당인쇄소를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직원 50명의 규모 있는 인쇄 출판업체로 확장했다.

1948년에는 문교부로부터 교과용 도서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을 승인받아 9월 24일 회사를 창립했다. 이렇게 탄생한 회사가 바로 '대한교과서주식회사'다. 대한교과서는 1999년 5월 3일 국정교과서주식회사를 인수 합병하고, 2008년 9월 '미래엔'으로 회사명을 바꿨다.

미 공군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폭격한 이유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권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이 제작했다.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과 1948년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달리 ‘화폐 개혁’을 미루고, 일제 강점기에 쓰인 조선은행권을 그대로 유통했다. 해방 후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제작했다.
▲ 조선은행권 일제 강점기 조선은행권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이 제작했다. 해방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과 1948년 출범한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 달리 ‘화폐 개혁’을 미루고, 일제 강점기에 쓰인 조선은행권을 그대로 유통했다. 해방 후 발행된 조선은행권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서 제작했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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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최장수가 관리를 맡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자. 민족문제연구소 이순우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비용 절감을 위해 직영하던 인쇄소의 민영화를 추진해서 1923년 3월 28일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총독부 관보를 비롯한 각종 인쇄물과 교과서, 달력을 도맡아 인쇄해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 회사의 발기인으로 이완용, 박영효, 송병준, 민영기, 이병학 같은 친일파가 대거 참여했다. 박영효는 1935년 5월까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대표로 재임했고, 이병학은 감사를 지냈다. 창씨개명 이름이 아오키 가쿠가쿠(靑山柄學)인 이병학은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의 조부다.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1936년 용산에 66만㎡의 부지(지금의 용산구 용문동 38번지 일대)를 마련해 6천㎡ 규모 인쇄공장을 신축해서 이전했다. 당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2색 인쇄기와 자동 접지기, 정합기 같은 첨단 인쇄시설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보유한 곳이었다.

총독부 인쇄소에서 담당하던 조선은행권 발행은 대일본제국정부 내각인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해방 후 일본에서 조선은행권 반입이 중단되면서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화폐 발행까지 맡게 되었다. 해방 후 최장수가 맡은 조선인쇄서적주식회사는 '국정교과서'와 '조폐공사'를 합친 회사라고 보면 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진 후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의 화폐 인쇄시설은 고스란히 인민군의 손에 떨어졌다. 북한은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으로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서 유통시켰다. 인민군의 조선은행권 유통으로 '화폐 대란'이 일어나자 이승만 정부와 미군은 조선은행권 유통을 중단하기로 하고, 1950년 7월 26일 '용산대폭격' 때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도 폭격했다(관련 기사 : 남일당, 그리고 이곳... 용산4구역에 숨겨진 역사).

미 극동공군 폭격기 사령부 소속 B-29 47대가 동원된 '용산대폭격'은 철도기지와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폭격해서 인민군이 장악한 교통과 금융 인프라를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폭격 직전인 1950년 7월 22일부터 조선은행권을 퇴출시키고 '한국은행권'을 새롭게 유통하기 시작했다. 1951년 10월 1일부터는 한국조폐공사를 출범시켜 화폐 발행을 담당토록 했다. 

1946년 12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미군정청이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관리인이었던 최장수를 '조건부 파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울러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 노동자 4백 명이 최장수의 파면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업을 하겠다며 크게 반발했다는 내용을 함께 전하고 있다. 도서관계를 떠난 최장수가 새로운 일터에서 함께 일한 노동자들에게 신망을 얻지 않았나 추측하게 된다. 

조선인 최초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그가 도서관에서 활약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 하지만 도서관을 잘 아는 그가 출판계에서 이어간 활동으로 해방 후 대한민국 책 생태계가 활력을 얻은 건 아닐까. 해방 후 조선도서관학교 강사로도 활약한 최장수는 대한교과서주식회사 이사와 감사, 부사장, 어문각 전무를 지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으로 추적한 조선인 '사서'
 
1929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조선인 사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조선인 사서’가 최초로 일한 도서관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다.
▲ 조선인 ‘최초의 사서’ 1929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조선인 사서’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조선인 사서’가 최초로 일한 도서관은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이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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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부성이 1937년 사서 자격증을 발급하기 이전에는 '사서'가 없었던 걸까. 그렇지 않다.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인 중에도 '사서'로 일한 사람이 있다.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통해 확인해보면 조선인 중에 가장 먼저 '사서'가 된 사람은 이긍종(李肯鍾)이다. 이긍종은 1929년 '사서'로 이름을 올렸다. 조선인 중 최초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에서 일한 이긍종은 1927년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도서관 '촉탁'으로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조선인 중에 가장 빠르다. 촉탁으로 일하면서 받은 월 수당이 무려 100원으로 나오는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엘리트로 대우받은 초등학교 교사의 초임이 45원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임용 제한 불문율' 중 하나로 "조선인 고등관 봉급은 100원에 그친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긍종이 받은 봉급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긍종은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1925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를 감안한 대우가 아닌가 싶다. 1925년 10월 17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미국에서 6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아 '금의환향' 했음을 보도했다. 일본 유학도 흔치 않은 시절, 미국 유학을 통해 '석사'가 된 그의 소식이 화제였음을 알 수 있다.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조선인 사서 1호' 이긍종은 조선은행원과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장을 거쳐, 친일 언론사와 친일 단체에서 두루 활약했다. 친일 행적으로 이긍종은 '교토제국대학 조선인 졸업생 1호'이자 경성도서관을 세운 삼촌 이범승과 나란히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해방 후 이긍종은 2대 총선에서 충청남도 연기에 무소속 출마해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는데, 임기 중인 1951년 1월 사망했다. 최초의 조선인 사서, 이긍종이 창씨개명한 이름은 미야무라 훈(宮村薰)이다(관련 기사 : 종로도서관 친일파 동상, 그냥 두고보면 안 되는 이유).

조선인 중에 두 번째 사서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성달영(成達永)이다. 1927년 조선총독부 체신국 감리과 촉탁으로 일을 시작한 성달영은, 이긍종이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장을 그만둔 이후부터 후임 분관장을 맡았다. 그는 1934년 조선인 중 두 번째 '사서'로 기록을 남겼다. 성달영은 '조선도서관연구회' 이사를 맡기도 했다.

1926년 3월 발족한 '경성도서관연구회'는 1928년 3월 '조선도서관연구회'로 이름을 바꿨다가 1939년 4월 '조선도서관연맹'으로 발전하는데, 조선인이 임원을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성달영과 강진국(姜辰國) 정도가 조선도서관연구회 이사로 이름을 남긴 사례다. 성달영은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이름이 남아 있다. 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세 번째는 초대 국립도서관장 이재욱이다. 이재욱은 1939년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조선인 중 처음으로 '사서'가 되며, 이때부터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서열 두 번째가 된다. 박봉석은 1940년 '사서'로 이름을 올린 네 번째 조선인이다. 사서 자격증 취득 순서로 보나 실제 조선총독부 기록으로 보나 박봉석은 '조선인 사서 1호'가 아니다.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는 나중에 서울대학교 도서관 초대 관장이 되는 김진섭(1929년)보다 김구경(1927년)과 박정식(1927년)이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촉탁'으로 더 빨리 이름을 올렸다. 김진섭은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에서 가장 빨리 일을 시작한 조선인이라기보다 가장 오래 일한(11년 근무) 조선인이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은 단 한 명의 '조선인 사서'도 허용하지 않았다. 

(*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경성부립도서관과 종로분관 옛터'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태그:#사서, #도서관, #최장수, #이긍종, #경성부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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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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