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글은 지난 2월, 우리 가족이 일주일 동안 머문 네덜란드 인상기다. 짧은 여행이라 영혼을 깨우는 깊은 통찰은 기대하지 못하더라도 무뎌진 감각을 꼬집어 잠자는 감성 정도는 일깨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씁니다. - 기자말

(*1편에서 이어집니다.)

잠시 옆길로 새보자면, 우리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들이 끌고간 도공들이 조선 최고의 장인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잡혀간 도공들은 대개 삼남지방에서 도자기를 굽던 공인들이었다.

조선 왕실에 납품하는 최고급 도자기는 경기 지방에 있는 관요(官窯)에서 만들었다. 최고의 장인들은 이천이나 여주 등의 가마에서 자기를 굽던 도공들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이들이 지니고 있던 지식과 기술은 단절되지 않았다. 전후 도공들은 관요를 되살려 도자기를 굽고 왕실에 납품했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 선원 하멜이 제주도에 표류했다. 제주도 목사 이원진은 이들을 억류하고 조정의 처분을 기다렸다. 한양에서 온 통역관을 보자 하멜 일행은 깜짝 놀랐다. 바로 그들과 같은 파란눈의 서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네덜란드인이자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였던 벨테브레였다.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하여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고 조정에서 벼슬까지 하고 있었다.

벨테브레는 하멜 일행을 이끌고 한양까지 가서 효종을 친견한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하멜 일행을 통해 중국 이외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오로지 상국인 청나라만이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의 전부였다.

성리학의 도그마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성리학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도그마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도그마는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배울 수 있는 질문이다.

만약 하멜을 통해 네덜란드 상인들이 자기를 구하러 일본에 왔다는ㅡ물론 자기만 구하러 온 것은 아니다ㅡ것을 알고, 조선이 자기의 선진국이라는 사실을 밝히며 하멜로 하여금 네덜란드 상인들을 불러들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동인도회사가 일본 자기를 처음 수입한 것이 불과 2년 전이었다.

조선의 말을 듣고 네덜란드 상인들의 발걸음이 한양으로 향했다면 암스테르담 항구에 하역되는 것은 '아리타 자기'가 아니라 '이천 자기' 혹은 '마포 자기'가 되지 않았을까. 서양의 부가 흘러들어오면서 세계 교역의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면 조선의 운명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역사에서 '만약(if)'은 없다고 하지만 부질없는 상상일지라도, 만약을 상정하면서 역사를 반추할 필요는 있다. 그때를 되돌아보며 지금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역사학자 E.H 카가 말하지 않았던가.
 
델프트 광장의 도자기 가게
 델프트 광장의 도자기 가게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이윤율이 높은 곳에 수익을 추구하는 사업가들이 벌떼처럼 달려드는 건 인간 사회의 속성이다. 돈이 되는 자기를 수입할 수 없는 네덜란드 도기 생산업자들은 눈만 껌벅이며 부러워할 순 없었다.

수입할 수 없다면 짝퉁이라도 만들어야 했다. 당시 네덜란드 도자기 사업은 로테르담과 델프트에 집중해 있었다. 안트페르펜에서 활동하던 마요르카 도자기 제조기술자 중 신교도들은 스페인의 탄압을 피해 로테르담과 델프트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델프트 도기 업자들은 중국 자기 때문에 달라진 소비자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기술혁명을 시도했다. 마요르카 도기가 구현할 수 없는 흰색을 나타내기 위해 주석유약으로 표면을 착색시켰고 그 위에 파란색으로 문양을 넣었다. 델프트 도공들은 청화백자의 고유한 색인 코발트블루를 재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진짜 자기라면 1300˚C가 넘는 고온에서 파란 안료가 다 날아가겠지만 다행히(?) 짝퉁 연질자기라서 8~900˚C의 낮은 온도에서 파란색이 남아 있었다. 이를 커버하기 위해 투명유약을 덧칠해 표면에 입체감을 주고 코발트블루의 부드러운 색감을 흉내냈다. 동인도회사에 부탁해 중국 현지 흙을 갖다 달라고도 하고 가마 형태를 그림으로 베껴올 것을 부탁했다. 수많은 실험과 시행착오 속에서 점차 완성도가 높아졌다.

우여곡절 끝에 코발트블루의 색감을 재현한 유럽 최초의 도기 '델프트 블루'가 탄생했다. 값비싼 중국산을 구입하지 못한 중산층들은 그런 대로 만족해가며 델프트 블루를 사랑해 주었다. 이런 성공 덕에 16세기 중반에는 델프트 노동자의 4분이 1이 어떤 식으로든 도기 거래에 관여했다(티머시 브룩, <베르메르의 모자>).

델프트에 공장이 급격히 늘어나고 경쟁이 심해지자 나중에는 중국산과 거의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로 기술 진보가 일어났다. 심지어 중국에서 델프트 블루 스타일에 맞춰 자기를 생산하는 역짝퉁 현상까지 일어났다. 유럽 전역에서 파란염료로 그림이 그려진 자기는 모두 '델프트 블루'라는 보통명사로 불렸다. 
  
도자기 가게 안의 진열 상품
 도자기 가게 안의 진열 상품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폴란드 왕이자 작센의 제후 아우구스트 1세는 '이마리'라고 하는 일본 자기에 심취해 있었다. 특히 가키에몬 도자기에 반해 미친 듯이 사 모았다. 수집 욕구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자기 생산에 도전했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연금술사 뵈트거를 드레스덴의 성 안에 연금시킨 후 자기 개발을 명령했다. 뵈트너는 두 차례나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자신이 살아서 나가는 길은 도자기 제작에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뵈트너는 실험에 몰두했다. 8년의 연구 끝에 1710년 드디어 자기 제작에 성공했다. 작센과 보헤미아 경계의 산에서 태토(백토)를 찾아낸 것이다. 인공 코발트블루가 개발되기까진 앞으로도 백년 가량 더 세월이 흘러야 했지만 백색 자기가 탄생한 것만 해도 경이로운 성과였다.

아우구스트 1세는 마이센(Meissen)에 공장을 세우고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술 유출을 꺼린 아우구스트 1세는 뵈트너를 풀어주긴 하되 완전한 자유를 주지 않았다. 작센 지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고 이제 금을 만들어 보라는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ㅡ아우구스토 1세도 금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뵈트너를 평생 가둬놓고 싶었던 것이다ㅡ지독히도 운이 없는 사내 뵈트너는 5년 후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온갖 실험으로 화학약품에 중독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명한 마이센 자기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자기 생산 노하우가 쥐도 새도 모르게 유출돼 불과 이십년도 안 돼 오스트리아, 스웨덴, 헝가리 등지에서 공장이 세워졌다. 수송비 부담이 없는 유럽산 자기는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기술발전까지 이루어냈다. 동시에 디자인을 선도하면서 금세 유럽시장을 장악했다. 영국도 그들만의 비법으로 본차이나를 개발해 도자기 시장을 석권했다.

17세기 초 '화이트 골드'라고까지 불리던 중국 자기는 18세기 중반에 들어와 유럽산 자기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 갔다. 한때는 신기하고 신비로웠던 중국풍 그림도 식상해졌다. 무엇보다 유럽 사람들의 기본적 미감인 화려한 장식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유럽에선 로코코와 아르누보 양식의 화려한 장식문화가 꽃피면서 그들의 취향에 맞는 유럽산 자기를 더 선호했다. 질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산 못지않게 아니 어떤 면에서 더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 취향 선호를 뜻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 문화를 이끌었던 델프트 블루도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태토가 부족한 네덜란드 환경에서는 새로운 양식의 자기 문화를 이끌어갈 말 그대로의 토양이 부족했다. 그리하여 델프트 블루는 1620년경부터 1720년경까지 100년 동안의 전성기를 우울하게 마감하고 지금은 과거의 향수만을 파는 몇몇 기념품 가게로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델프트 블루의 자존심이 아직까지 죽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델프트 타일'이다. 델프트는 자기에 그치지 않고 소성(塑性) 기술을 타일에도 적용했다. 타일은 엄청나게 성공하여 '델프트 타일'이라는 브랜드로 전 유럽에 공급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은 델프트 타일에 열광해 온 나라의 성당과 기념비적 건물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이베리아 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거의 비슷비슷해서 문화적 맥락에서 별 차이를 못 느낀다. 단 한 가지를 빼고. 그 한 가지가 타일 문화다. 스페인의 타일은 과거 무어인이 지배하던 시절에서부터 전승된 이슬람 양식의 타일이 주류다.

그 옛날 바빌론, 페르시아 제국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슬람 타일은 기하학적인 문양을 세련되게 구사하고 다양한 색감으로 풍부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를 계승한 '세비아 타일'과 '발렌시아 타일' 역시 화려한 색깔을 뽐내며 정교하고 세밀한 문양을 구현하면서 스페인을 대표하는 타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스페인 타일은 폴리크롬 타입으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데 반해 포르투갈은 모노크롬 타입으로 우아하고 차분한 느낌을 준다. 전자가 젊고 발랄하다면 후자는 정숙하고 기품있다. 스페인의 타일 벽화가 화려한 채색과 정밀한 묘사로 화면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면 단조로운 모노톤으로 구성된 포르투갈의 타일 벽화는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에서 의미를 되새기며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벽장식용 타일을 아슐레호(azulejo: 영어식으로 아줄레조)라고 한다. 이 아슐레호가 델프트 타일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에 델프트 타일이 유행하게 된 계기를 살펴보자.

17세기 중반 스페인 사람 가브리엘 델 바르코(Gabriel del Barco)가 리스본에 타일 공장을 세우면서 홀란드 사람 빌럼 반 드 클로엣(Willem van de Kloet)와 얀 판 오르트(Jan van Oort)를 초빙한다. 바르코는 스페인 타일의 식상함을 극복하고자 나름대로 신상품을 들여온 것이다. 암스테르담에서 온 오르트와 클로엣은 이전보다 큰 패널에 흰색 바탕에 파란색으로 그린 타일을 선보였다.

사람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스타일에 이내 마음이 뺏겼다. 델프트 스타일로 장식한 '마르퀘스 드 프런티어 궁'과 '하느님 어머니 수녀원(Convento de Madre de Deus)'의 타일 벽화가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졌다. 유행은 전염병처럼 번졌다. 델프트 타일은 순식간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온갖 건물을 치장했다. 리스본에서 생산되는 것만으로 충족될 수 없어서 홀란드에서 수입했다.

1698년 국왕 페드로 2세는 델프트 타일 수입이 지나치다면서 수입금지 조처를 취했다. 갈수록 수입이 힘들어지자 바르코는 공장을 넘기고 스페인으로 떠난다. 이후 델프트 타일은 포르투갈 자체에서 공급되었고, 아슐레호라고 불리며 자체의 고유한 양식과 문양으로 발전한다.

멀리서 보면 파르스름한 포르투갈의 성당들은 예외 없이 아슐레호로 장식한 것이다. 각종 역사화와 성서화가 델프트 양식의 타일로 붙여졌다. 이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포르투갈만의 특이한 풍광이다. 애초 델프트 자기가 포르투갈 상선의 납치로부터 시작했는데 델프트 타일이 포르투갈 건물의 최고 애용품이 되었으니 이야말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외벽을 아슐레흐로 장식한 포르투갈 성당
 외벽을 아슐레흐로 장식한 포르투갈 성당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중의 하나로 소문난 포르투 상벤투 역 안의 아슐레흐 장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중의 하나로 소문난 포르투 상벤투 역 안의 아슐레흐 장식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북구의 해는 가차없다. 더 이상 미련을 두지 마라는 듯, 아니 아쉬움 속에서 더욱 미련을 가지라는 듯 도시를 어둠의 장막 속으로 밀어넣고야 만다. 기약 없는 떠남이지만 다음에, 라는 거짓말로 나 자신을 위로해 본다. 그 뻔한 거짓말이 맘을 달랠 때도 있으니 마음의 얄팍함을 마냥 탓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델프트를 떠나면서 나의 눈길은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이 자그맣고 예쁜 도시의 카페에서 차라도 한 잔 마셔주는 게 예의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은 나의 일정을 상기시키며 떠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델프트는 얼핏 보았지만 한 눈에 반하게 하는 여인같이, 상사의 염을 일으키는 도시였다. 어쩌면 매직 아워, 그 블루의 시간에 만나 더욱 신비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깔리고 있는 델프트 광장
 어둠이 깔리고 있는 델프트 광장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이상으로 홀란드 인문기행을 마칩니다. 애초 계획은 암스테르담까지였으나 개인적 사정으로 집필을 지속할 수 없어 아쉬움 속에서 펜을 놓습니다.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태그:#PERDIX, #홀란드 인문산책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