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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편에서 이어집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은 일제 대신 남한에 진주했다. 미군은 일제가 쓰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군정 청사로 그대로 사용했다. 이때부터 조선총독부 건물은 '중앙청'(中央廳)이라 불렸다. 경복궁 안에 미군의 숙소가 지어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이 숙소를 관사로 활용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식 역시 중앙청에서 열렸다. 이때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중앙청을 정부 청사로 사용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은 중앙청을 청사로 쓰다가 퇴각할 때 불을 질렀다. 이때 경복궁 안의 여러 건물도 큰 피해를 입었다. 

해방 이후의 경복궁
 
경회루 왼편 작게 보이는 정자가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하향정’이다. 이승만은 경복궁에 하향정을 짓고 낚시를 즐겼다. 경회루 연못에서 낚시를 즐긴 그를 ‘도시어부’의 원조로 봐야 할지.
▲ 경회루와 하향정 경회루 왼편 작게 보이는 정자가 이승만 대통령이 지은 ‘하향정’이다. 이승만은 경복궁에 하향정을 짓고 낚시를 즐겼다. 경회루 연못에서 낚시를 즐긴 그를 ‘도시어부’의 원조로 봐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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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연못 북쪽에는 '하향정'(荷香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1959년 지은 이 정자에서 '낚시광' 이승만 대통령이 낚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궁궐에 낚시를 위한 정자를 짓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상처럼 숭배되던 그의 재임 시절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아닐까. 양녕대군 후손인 그는 경복궁을 '조상이 살아온 옛집'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지(관련 기사 : "내 생일을 임시 공휴일로"... 이승만 팔순 때 벌어진 일).

한국전쟁 때 파괴된 중앙청은 10여 년 만에 복구되어 1962년 11월부터 다시 중앙청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경복궁 북쪽 태원전 권역에는 청와대 방어를 명목으로 수도방위사령부 30 경비단이 들어섰다. 수방사 진주로 인해 신무문과 경회루의 출입이 한동안 통제됐다. 경복궁 일부 공간은 4.19 혁명 이후 일반에게 개방되어 프로레슬링 경기와 박람회가 열리기도 했다. 

1980년대 경복궁에 머물던 정부 부처가 떠나고 군부대까지 이전하면서, 경복궁은 온전한 궁궐로 다시 복원되기 시작했다. 1994년 교태전, 1995년 강녕전과 함원전, 1999년 자선당, 2001년 흥례문, 2005년 태원전, 2006년 건청궁이 차례로 복원됐다.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인 중앙청을 철거했고, 2009년에는 광화문을 원래 위치에 복원해서 일반에 공개했다.  

건청궁과 곤녕합에 담긴 뜻
 
‘건청’이란 하늘이 맑다라는 뜻이며, 청나라 자금성에도 같은 이름의 궁이 있다.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헐고 193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조선총독부 미술관은 해방 후 현대미술관을 거쳐 1960년 이후 전통공예미술관으로 쓰이다가 1998년 경복궁 복원정비계획에 의해 철거됐다. 건청궁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중건, 2007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지을 당시 252칸이었던 건청궁은 192칸으로 복원되었다.
▲ 건청궁(乾淸宮) ‘건청’이란 하늘이 맑다라는 뜻이며, 청나라 자금성에도 같은 이름의 궁이 있다.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헐고 193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조선총독부 미술관은 해방 후 현대미술관을 거쳐 1960년 이후 전통공예미술관으로 쓰이다가 1998년 경복궁 복원정비계획에 의해 철거됐다. 건청궁은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중건, 2007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지을 당시 252칸이었던 건청궁은 192칸으로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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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거처로 경복궁을 마지막으로 사용한 고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고종은 1863년 12월 즉위했지만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정국을 주도했다. 1873년 11월 5일 스물두 살이 된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고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고종은 경복궁 북쪽에 창덕궁 주합루, 서향각을 본떠 '건청궁'(乾淸宮)을 새로 지었다. 1873년 지은 건청궁은 고종의 권력 의지를 표상하는 건물이다. 조선 왕실은 궁 안에 궁을 두지 않았는데, 궁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유일한 궁궐 공간이다. 고종이 명성황후와 주로 머문 공간이며, 1887년 3월 6일 에디슨 전기회사를 통해 우리나라 처음으로 전깃불이 밝혀진 곳이기도 하다. 

건청궁에는 왕의 거처인 장안당(長安堂)과 왕비의 처소인 곤녕합(坤寧閤)이 있다. 하늘은 맑고(乾淸), 땅은 편안하고(坤寧), 오래도록 평안하기를(長安) 바라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다. 이름과 달리 하늘을 표상하는 왕은 온갖 풍파를 겪었고, 땅을 표상하는 왕비는 시해되고, 왕실의 평안은 망국으로 이어지고 말았지만. 

고종은 1891년 8월 13일 건청궁 안에 왕의 서재로 '관문각'(觀文閣)을 지었는데, 말 그대로 글을 읽는 집이라는 뜻이다. 사바틴(Sabatin)이 설계한 이 건물은 우리 궁궐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꼽힌다. 서양 문물에 대한 고종의 관심을 상징하는 관문각은 지은 지 10년 만에 헐리고 만다. 관문각이 헐린 이유는 '부실 공사' 때문이었는데, 대한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좌초를 상징하는 것만 같다. 

고종은 정조(正祖)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아 위상이 낮아진 규장각(奎章閣)을 강화했다. 1874년 민규호, 민영익, 민응식, 김윤식, 홍영식, 김홍집 같은 개화파 지식인을 규장각 요직에 임명하고, 규장각 제도를 예전처럼 복원했다. 이때 규장각 책에 대한 정리 작업을 실시해서 목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1876년 2월 2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후 개화 과정에서 고종은 중국을 통한 서양 신서적 구입에 신경을 썼다. 고종이 2차 수신사에 이어 일본과 중국에 조사견문단과 영신사 같은 시찰단을 파견하고, 개화 추진기구이자 오늘날 외무부 격인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한 것도 이 때다. 

고종이 규장각과 집옥재에 신서적을 모은 이유는? 
 
건청궁 장안당 뒤편에 지은 건물로 궁안에 세운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알려져 있다. 1873년 지은 관문각을 설계한 사람은 사바틴이다. 관문각은 부실공사로 인해 1901년 헐렸다. 복원된 건청궁 안에 ‘관문각터’가 남아 있다.
▲ 관문각 건청궁 장안당 뒤편에 지은 건물로 궁안에 세운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알려져 있다. 1873년 지은 관문각을 설계한 사람은 사바틴이다. 관문각은 부실공사로 인해 1901년 헐렸다. 복원된 건청궁 안에 ‘관문각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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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이 과정에서 입수한 책을 규장각에 내려주고 상당량을 '집옥재'(集玉齋)에 소장한 걸로 보인다. 건청궁과 나란히 자리 잡고 있는 집옥재는 '옥처럼 귀한 책을 모은 곳'이란 뜻이다. 1881년 함녕전(咸寧殿)의 북벌당(北別堂)으로 지은 집옥재는, 고종이 거처를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1891년 7월 20일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고종은 집옥재를 정보 습득과 개화 정책의 구상을 위한 왕실 도서관으로 건립했다. '전당합각재헌누정'(殿堂閤閣齋軒樓亭)이라는 건물의 위계로 보면 '재'(齋)에 해당하는 건물은 주거 또는 독서와 휴식을 취하는 건물인 경우가 많다. 그런 집옥재에 고종은 어진(御眞)을 봉안하고 영국, 일본, 오스트리아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어진의 봉안처가 되었다는 것은 왕정(王政)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집옥재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고종의 '집무실'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 있던 장서의 상당수는 서구 근대 문물에 관한 것이었고, 을미사변 전까지 집옥재는 동도서기(東道西器), 구본신참(舊本新參)으로 표현되는 개화 추진의 중심지로 기능했다. 

고종이 집옥재에 소장했던 장서는 4만 권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수집된 책에 '집옥재'라는 장서인을 찍고 집옥재서목과 집옥재서적목록 같은 도서목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1884년 작성된 목록을 보면 중국에서 수입된 서양 관련 책이 600종 수집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수집된 서양 관련 서적은 천문, 역서, 지구, 지리, 항해, 외국 사정, 어학, 공법, 외교, 군사, 전술, 무기, 수학, 의학, 농업, 식물, 물리, 화학, 전기, 증기, 광업, 음악 같은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전해진 조선 왕실의 책을 분석해보면, 규장각의 전성기인 정조 때부터 고종 이전 시대까지 중국에서 수집한 책보다 고종 시대에 수집한 중국 책이 더 많다. 전체 장서인이 찍혀 있는 3444종의 중국 책 중 이른바 '집옥재 도서'로 알려진 고종의 장서가 1924종으로 55%를 차지한다. 고종 시대에 얼마나 열정적으로 개화와 근대 문물에 대한 책을 수집했는지 알 수 있다. 

책에 대한 고종의 관심은 그의 서재 또는 도서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종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을 복원했을 뿐 아니라 건청궁 안에 세운 관문각과 집옥재,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시대의 수옥헌에 이르기까지 서재와 도서관을 갖추고 수만 권의 장서를 끌어 모았다. 개인 도서관이라 하기에도 장서량이 만만치 않은데, 그가 책을 좋아한 군주였음을 그의 서재 또는 도서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집옥재 시대의 종말과 책의 행방
 
건청궁 안에 왕비의 처소로 지은 건물이 ‘곤녕합’이다. 동쪽 누각에는 ‘사시향루’(四時香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남쪽 누각에는 ‘옥호루’(玉壺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사시향루는 사계절 꽃향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옥호’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을 말하지만 ‘옥호빙’(玉壺氷)의 줄임말로 옥병 안의 얼음, 즉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곤녕합 옥호루는 을미사변의 현장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다.
▲ 곤녕합 건청궁 안에 왕비의 처소로 지은 건물이 ‘곤녕합’이다. 동쪽 누각에는 ‘사시향루’(四時香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남쪽 누각에는 ‘옥호루’(玉壺樓)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사시향루는 사계절 꽃향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옥호’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을 말하지만 ‘옥호빙’(玉壺氷)의 줄임말로 옥병 안의 얼음, 즉 깨끗한 마음을 뜻한다. 곤녕합 옥호루는 을미사변의 현장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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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나면서 도서관이자 고종 정치의 중심 공간이던 집옥재의 시대도 저물었다. 

1년 6일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 시대를 열었다. 경운궁을 기반으로 개혁과 개화에 박차를 가하던 고종은 경운궁 한편에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을 지어 이를 '왕립 도서관'으로 발전시킬 구상을 가진 모양이다. 수옥헌이 왕립 또는 황실 도서관으로 제대로 발전했다면 집옥재 시대에 수집한 책이 핵심 장서(藏書)가 되었을 것이다. 

집옥재에 있던 책은 어떻게 되었을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을 거쳐 경운궁에 자리 잡으면서 집옥재 장서 일부는 수옥헌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수옥헌은 1901년 11월 16일 화재로 불타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수옥헌에 있던 '숱한 귀한 서책'도 함께 소실되었다.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쓴 이태진 교수에 따르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설치한 통감부는 1908년 9월 규장각에 도서과(圖書課)를 설치했다. 규장각 도서과는 규장각, 홍문관, 집옥재, 시강원, 북한산성 행궁에 흩어져 있던 책을 합쳐 '제실도서'(帝室圖書)로 정리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 이후 제실도서는 왕실 사무를 담당하던 이왕직(李王職) 도서실이 담당했다. 이왕직은 1910년 12월 30일 일제가 조선 왕실 업무를 관장하고 왕족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다. 훗날 조선총독부도서관장이 되는 오기야마 히데오(荻山秀雄)가 조선에 건너와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이왕직 도서실이다.

1911년 6월 조선총독부가 11만 권에 달하는 제실도서를 점유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취조국(取調局)이 책을 강제 인수했다. 취조국은 왕실 관련 일부 자료만 이왕직에 남겼다. 이 자료가 창경궁 장서각을 거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의 장서로 이어졌다. 

조선총독부 취조국은 왕실로부터 넘겨받은 제실도서에, 경복궁 경성전에 있던 강화사고 책 5천 권, 태백산 봉화사고, 오대산 평창사고, 적상산 무주사고 같은 여러 사고(史庫)에 있던 책까지 합쳐 참사관실(參事官室)로 넘겼다. 참사관실은 분실(分室)을 만들어 도서 관리를 전담케 하는데, 1915년 12월 도서 정리 작업을 시행했다. 

조선총독부 참사관 분실은 도서 정리 작업을 통해 조선본과 중국본으로 책을 나눈 후 4부 분류법으로 책을 분류하고, 도서 번호를 기입했다. 도서 카드와 유별 임시 목록, 간단한 도서 해제도 작성했다. 규장각 도서로 전하는 책에 '조선총독부도서지인'(朝鮮總督府圖書之印)이라는 도장이 찍힌 것도 이 때다. 

참사관 분실이 관리하던 제실도서는 경성제국대학 부속도서관을 거쳐, 해방 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다. 정리하면 집옥재에 있던 고종의 장서 중 수옥헌으로 옮긴 일부 책은 불탔고, 상당수는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이어졌으며, 일부 자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전해졌다. 

'작은도서관'으로 재탄생한 집옥재
 
경복궁 집옥재는 궁궐을 개방하지 않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집옥재와 팔우정만 개방되며, 협길당은 개방하지 않는다. 집옥재에 비치된 책은 열람만 가능하고 대출할 수 없다.
▲ 집옥재 경복궁 집옥재는 궁궐을 개방하지 않는 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집옥재와 팔우정만 개방되며, 협길당은 개방하지 않는다. 집옥재에 비치된 책은 열람만 가능하고 대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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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옥재 영역은 1990년대 말까지 청와대 경호대가 주둔하면서 일반에게 개방하지 않다가 1996년부터 경복궁 영역으로 돌아왔다. 문화재청은 집옥재를 '작은도서관'으로 꾸며 2016년 4월부터 시민에게 공개했다. 

작은도서관으로 단장한 집옥재는 장서각 자료, 한국문학 번역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실 관련 및 규장각 자료, 일성록, 조선시대 사상 생활 풍속, 조선 시대 예술 문학 역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장서 1천여 권과 조선 시대 문헌 230여 권을 갖추고 있다. '궁궐에서 만나는 왕실 문화' 같은 주제로 인문학 강의를 진행하기도 한다. 

중국풍으로 지어진 집옥재는 지어질 당시에는 이국적인 '신식 건물'이었다. 집옥재의 양쪽 벽은 목재가 아닌 벽돌을 쌓아 만들었고 청나라풍 건축양식으로 지었다. 집옥재는 강녕전, 교태전, 경회루 같은 경복궁의 주요 전각과 달리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이며, 외부에 원기둥을 세우고 내부에 사각기둥을 배치했다. 집옥재 현판 글씨는 북송(北宋) 명필 미불(米芾)의 글씨를 집자한 것으로, 경복궁 다른 전각이 가로글씨인데 반해 세로글씨 현판이다. 

집옥재는 동쪽과 서쪽, 북쪽에 대청마루보다 한 단 높은 둘레마루를 놓았다. 책을 두는 서가는 동쪽과 서쪽 마루 벽면에 두었다. 바깥에서 볼 때 집옥재는 단층 건물이지만 북쪽 둘레마루 위에 다락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남쪽 대청마루 위는 통층이고 북쪽 둘레마루 위는 중층인 독특한 건물이다. 

집옥재를 중심으로 좌우에 협길당(協吉堂)과 팔우정(八隅亭)이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집옥재와 중층 복도로 연결된 팔우정은 고종의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집옥재가 '도서관'이라면 팔우정은 '개인 서재'로 기능했다.

팔우정은 1층과 2층의 난간 모양이 다르고, 지붕 처마 아래에 닫집 같은 낙양각을 붙였다. 집옥재와 팔우정을 연결하는 복도도 집옥재 쪽 복도는 1층, 팔우정 쪽 복도는 2층으로 구성했다. 향원정과 함께 경복궁을 대표하는 정자로 꼽힐 팔우정은 한때 고종이 즐긴 '가배'(coffee)와 음료를 파는 북카페로 운영했으나 지금은 카페 시설을 철거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황제에 즉위하면서 마한·진한·변한, 삼한을 아우르는 큰 한이라는 뜻으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했다. 연호를 '광무'(光武)로 삼은 것은 힘을 길러 외세로부터 벗어나 나라를 빛내자는 의미였다. 한나라를 다시 일으켜 후한(後漢) 시대를 연 광무제(光武帝)처럼 대한제국을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왕비를 잃고 경복궁을 떠나 해외 공사관에 피신했던 그는 대한제국을 열고 광무개혁을 추진했으나 제국의 건국도 개혁도 늦었다. 

주인이 제 역할을 못할 때 나라는 어떻게 될까
 
고종은 개화와 서양 근대 문물에 대한 수만 권의 책을 집옥재라는 신식 도서관에 구비했지만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책에 담긴 지식은 혁신의 바탕이 되지만 혁신 그 자체는 아니다. 사진 가운데 있는 건물이 ‘집옥재’이고 왼편에 있는 2층 정자가 ‘팔우정’, 오른쪽 건물이 ‘협길당’이다.
▲ 집옥재와 팔우정, 협길당 고종은 개화와 서양 근대 문물에 대한 수만 권의 책을 집옥재라는 신식 도서관에 구비했지만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했다. 책에 담긴 지식은 혁신의 바탕이 되지만 혁신 그 자체는 아니다. 사진 가운데 있는 건물이 ‘집옥재’이고 왼편에 있는 2층 정자가 ‘팔우정’, 오른쪽 건물이 ‘협길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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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의 첫 번째 비극은 근대화를 추구했어야 할 그 중요한 시기에 국권(國權)을 잃고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서구 문물에 대한 고종의 관심은 그의 도서관, 집옥재를 채웠던 수많은 장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좋은 리더(leader)는 좋은 리더(reader)'라고 하지만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 모양이다. 도서관에 근대 문물에 대한 책이 수만 권 모여 있더라도 그 자체가 근대화를 보장하진 않는다. 근대에 대한 관심과 갈망이 있더라도 책 속의 지식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아버지를 잘 둔 덕에 왕위에 오른 고종은 흥선대원군 하야 이후 왕으로서 자격과 능력을 입증하지 못했다. 오히려 세습 체제의 한계를 증명했다. 조선의 다른 왕보다 고종이 더 무능해서 조선이 망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소임을 감당하기에 그의 능력은 부쳤고, 시대는 그에게 벅찼다.

한 사람의 비운(悲運)이 개인의 비운으로 그치면 좋으련만,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개인의 비운'은 '역사의 비운'으로 직결되기도 한다. 고종의 비운은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국가와 모든 조선인의 비운으로 이어졌다.

나라의 '주인'이 제 역할을 못할 때 나라는 어떤 운명에 처하는가. 우리는 식민지를 거치며 뼈저리게 경험했다. 이것이 시민이 주인인 공화국 시대, 고종과 집옥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아닐까. 

중국의 계몽 지식인 량치차오는 1907년 쓴 <아! 한국, 아! 한국 황제, 아! 한국 국민>이라는 글에서 황제(고종)와 양반뿐 아니라 한국 국민이 어떻게 나라를 망쳤는지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인민이 어떻게 한국을 망하게 했는가? 한국 인민은 양반 관리들을 마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미천한 관직이라도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오직 사당(私黨)을 키워 서로 끌어주고 서로 밀치며, 자기 자신만 알고 국가가 있음은 몰랐다.

그 일반 백성은 국사(國事)를 자신과 아무 관계 없는 것으로 여기고 줄곧 정치 분야에서의 운동을 하지 않았으며, 오직 위에서 은택을 베풀기만 바랐다. 권세와 이익에만 우르르 달려들어, 외국 사람이라도 나라 안에 세력이 있는 자를 보면 숭배라는 말이 부족할 정도였다. 한국에 이러한 인민이 있음으로 인해 한국은 마침내 망했다." 


량치차오가 글을 쓴 시점으로부터 112년이 흘렀다. 우리는 그의 지적으로부터 얼마나 더 나아갔을까. 다시 전환기에 선 우리는 조선 망국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깨달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을까. 

[경복궁 집옥재]

- 주소 : 서울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 이용시간 : 10:00 - 16:00
- 휴관일 : 매주 화요일
- 이용자격 : 이용 자격 제한 없음. 경복궁 입장료 : 만 25세-64세 3천 원
- 홈페이지 : http://www.royalpalace.go.kr:8080/
- 전화 :  02-3700-3900
- 운영기관 : 문화재청 경복궁 관리소

덧붙이는 글 | 경복궁 '집옥재'를 다룬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태그:#고종, #경복궁, #집옥재, #규장각,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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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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