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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름히 깔린 노을을 등지고 집에 들어선다. 퇴근 후 곧바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오늘은 무엇을 만들까? 냉장고를 열어보니 울퉁불퉁한 감자와 눈이 마주친다. 감자볶음을 만들어봐야겠다. 재빨리 감자를 채썰어 볶아낸다. 하루 내내 일하고 피곤하긴 하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유일하게 아내와 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뜨거워진 조리기구 만큼이나 달아오른 얼굴에서 하품이 절로 나고 피로가 쏟아진다. 요리를 도와달라고 할 법하지만 아내는 온 방을 헤집고 다니는 아이 뒤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없어 보인다. 어릴 때 보았던 만화인 톰과 제리의 추격전을 보는 듯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만지고 싶어 하는 아이와 어지럽혀진 집안을 보기 싫은 엄마의 추격전은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오랜 자취 생활로 인해 요리에 대해선 전문가까지는 아니지만 수준급이라고 자부한다. 아내도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자취 요리 마스터인 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주방은 나의 영역이 되었다.

사실 요즘은 굳이 요리를 할 필요가 없다. 데우기만 해도 훌륭한 한 끼 식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완제품들이 시중에 많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만들어낸 요리보다 맛도 훨씬 좋다. 늘어나는 1인 가구 수에 맞추어 제품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 완제품을 자주 먹는 혼자 사는 지인의 경우 집에 있는 유일한 조리도구가 전자레인지일 정도로 쉽고 간편하다. 그렇다보니 요리라는 예술적 행위에서 사람들은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SNS에서 지역소식을 보다가 집 근처에 있는 농촌진흥청에서 우리 농산물로 만드는 요리공모전을 개최한다는 게시물을 접했다. 일상적인 음식을 만드는 실력이지만 요즘 세태에 미뤄볼 때 내 실력 정도면 도전해 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등에 업고 공모전 도전을 감행했다. 먼저 무엇을 만들지 고민했다. 도전자들 중에는 주부 9단인 프로주부님들도 있을 것이고 요식업에 종사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전문가들을 제치려면 일반적인 음식을 선보여선 안 될 것 같았다.

당시 아이가 미음을 먹기 시작해 쌀가루를 만들어서 여러 종류의 미음을 만들고 있었다. 모든 생활이 아이에게 맞춰져 있다 보니 공모전에 제출할 요리 또한 아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준비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아이도 먹을 수 있고', '우리 농산물로 만들어진' 요리를 고민하다 아이 미음을 만드는 방식을 응용한 쌀아이스큐브를 만들게 되었다. 그다지 멋있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아이에게 특화된 음식이라는 것을 무기삼아 심사 자료를 준비했다.
 
기사에 기재된 내용과 관계된 공모전 수상사진
▲ 요리공모전 수상사진 기사에 기재된 내용과 관계된 공모전 수상사진
ⓒ 황석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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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설명을 곁들여 제출했다. 그다지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새로운 도전을 해본 것에 만족했다. 공모전 도전을 잊고 지내던 어느 날 한 통의 메일이 왔다. 바로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었다.

시상식장에서 만난 수상자들은 학생부터 중년의 성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다들 어떠한 계기로 지원했고 어떤 직종에서 종사하는지 궁금했다. 마침 행사 시작 전에 사회자가 수상자들을 향해 요식 업계에 관련되신 분이 있는지 질문을 건넸다.

요리공모전이다보니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를 제외한 전원이 그렇다고 대답할지는 몰랐다. 질문 이후 비전문가인 내가 여기 앉을 자격이 되는지 괜스레 불편해졌다.

시상식에 앞서 수상자들이 응모했던 요리의 사진들이 공개 됐다. 역시나 프로의 세계는 다르긴 했다. 집에 있는 식기 중에서 괜찮은 걸 쓴다고 썼지만 전문가들이 플레이팅에 쓴 식기에 비하면 후줄근했다.

레스토랑에 나올 법한 접시에 플레이팅 된 음식과 반찬종지에 덩그러니 담긴 내 음식은 외관부터 확연이 달랐다. 한껏 멋부린 음식들 사이로 내 요리가 소개됐을 때 참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특정계층을 공략한 탓에 선정이 되었지 실력으로는 시상의 근처에도 못 갔을 것이다.

시상식에서는 상장과 함께 수상내역이 적힌 보드판이 수여됐다. 단순한 보드판일 뿐인데 주변 맛집으로 등극시켜 줄 것 같은 힘을 지닌 것 같았다. 만약에 내가 요식업 종사자였다면 가게에 멋들어지게 디자인이 된 보드판을 내걸었을 것이다.

요리대회 수상 게시물의 힘을 체험했던 적이 있다. 한때 자주 갔던 김치찌개 맛집이 있다. 변덕스런 입맛 때문에 여러 음식점을 전전긍긍하다보니 최근엔 발길을 향하지 않았었다. 옛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 했던가? 기억 속의 그 맛이 그리워져 다시금 김치찌개 집을 찾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김치찌개 집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무슨 경사가 있었던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지역에서 개최된 향토음식대회에서 우승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멀리서도 보일정도로 커다란 현수막은 주인아주머니의 자긍심처럼 보였다. 가게 실내에 들어서니 역시나 음식대회 수상을 축하하는 게시물들이 여럿 붙어 있었다. 요리대회에 우승했다는 소식을 보고 먹어서 그런 건지 음식 솜씨를 갈고 닦은 것인지 김치찌개가 유달리 맛있게 느껴졌다.

요리대회 수상은 요리사 자신만의 명예뿐만 아니라 가게의 명예도 가져온다. 내로라하는 강자들과 경쟁하여 우승했다는 것은 가게의 맛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수식어가 하나 생김으로써 요식업 매장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이번 수상을 통해 '호텔주방장 출신이 만드는 맛집', '3대째 이어가는 맛집',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맛집' 등 음식점을 수식하는 여러 단어 중 하나를 쓸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주어졌다. 하지만 요식업과 관계없는 분야의 사무직 직원인 나에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돼지 목의 진주' 격이었다. 어렵사리 받은 수식어를 굳이 활용하자면 '대회에서 상을 탄 요리 잘하는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요리 공모전에 응모했을 당시에는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모전에 당선이 되면 되는 것이고 떨어지면 그만이었다. 비전문가들도 요리공모전에 많이 응모를 했을 것이며 일반인도 여럿 수상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요식업이라는 치열한 무대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만 느꼈다.

세상 살기 참 녹록지 않다고 느낀다. 어떤 분야이든 그들만의 리그에서 일반인이 살아남으려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품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실력의 차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라 생각한다. 요리대회는 요리사만의 전유물이 아니지만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

태그:#요리공모전, #일반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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