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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가 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는 데 더 익숙해집니다. 엄마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걸까요? '나다운' 엄마, 이름을 지키는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편집자말]
[이전 기사] "직장 없으면 남편 도시락 싸야 하나요?" 당당한 주부들

캐나다 밴쿠버의 위성도시 버나비. 오래된 건물의 강의실에 여자들이 동그랗게 모여 앉았다. 이탈리아, 태국, 미국, 칠레, 멕시코, 요르단, 필리핀 그리고 한국에서 온 8명의 여자들은 생김새가 모두 달랐다. 피부색도, 눈동자의 색도, 머리칼의 색도, 영어로 말하는 억양도 제각각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단 하나. '여자'라는 거였다.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하루 3시간씩 6주간 우리는 총 18시간을 만났다. 맨 먼저 여성을 둘러싼 폭력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그다음엔 이런 폭력들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들을 이야기를 했다. 단호함(assertiveness)을 연습해 폭력적인 발언과 행동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법도 배웠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들이 여성인 '나'를 구성하는지 생각하고, 그림이나 문구, 몸짓으로 표현했다. 어떤 날은 밴쿠버 지방법원을 방문해 여성에 대한 폭력을 다루는 BC주의 법체계에 대해 배우기도 했다.

연대감과 다양성

이 모든 것들을 나누면서 내가 느낀 건 건 강렬한 연대감이었다. 서로의 이름조차 제대로 발음하기 어려울 만큼 다른 배경을 가진 우리들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이 털어 놓은 직장에서의 차별 경험, 폭력적인 남편과의 이혼 과정에서 겪었던 억울함, 자신의 외모를 가꾸느라 애썼지만 만족할 수 없었던 경험들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결혼 후 육아와 살림을 도맡으면서 나를 찾기 위해 일과 공부를 병행했지만, 여전히 공허하기만 한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멤버들은 비슷한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며, 나를 꼭 안아주고 응원해줬다.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 때문에 겪는 어려움은 출신국가를 막론하고 유사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공통점으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힘들었던 나의 상태가 '내 잘못'이 아님을 깨닫게 했다. 내가 느끼는 억울함과 분노는 타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함께 이런 어려움을 극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모여있었다. 마음 한 켠이 뭉클했다.

동시에 나는 여성들이 원하는 삶이 무척이나 다양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는 잡지의 사진들을 활용해 각자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해보기도 했고, 다양한 명언 중 내 마음에 꼭 와닿는 것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여성 각자가 가진 꿈과 재능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아갔다. 다만, 이런 것들이 가부장제 안에서 부과된 의무들에 가려있었을 뿐이었다. 조금씩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가며 우리는 함께 기뻐했다.

나 역시 내가 가장 '나답다'고 여기는 가치를 이 워크숍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평등'이었다. 명명되지 않았던 것에 이름이 붙여지고 나면 실체가 명확해진다.

'평등'이 내 삶의 주요 가치임을 깨달은 후 돌아보니 정말 그랬다. 내가 살면서 가장 분노하고 실망했던 순간들은 나 스스로가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거나, 생명체가 존중받지 못하는 모습을 봤을 때였다.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지켜나갈 때 '나답다'는 느낌이 든다. 즉, 자신의 가치를 실천하고 있을 때 '나다워지는' 것이다.

이런 내게 시가 중심의 가부장제로 굴러가는 한국의 결혼제도는 '평등'의 가치를 실천할 수 없게 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부터 느꼈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허감, 엄마가 된 뒤 육아와 살림을 전담하면서 내가 사라진 것 같았던 이유를 이제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평등한 관계 만들기
 
 나를 진정으로 변화시켜줬던 '다문화 여성 워크숍'에서 배우고 나누었던 자료들
 나를 진정으로 변화시켜줬던 "다문화 여성 워크숍"에서 배우고 나누었던 자료들
ⓒ 송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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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삶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평등'의 가치를 실천하고 살 수 있다면, 나는 상담을 하든, 공부를 하든, 집에서 살림을 하든 그러니까 어느 자리에 있든 '나답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 터였다. 알았으니 실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워크숍에서 배운 것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 

다행히 남편은 내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노력했다. 우선 일상에서 나를 옥죄고 있던 '돌봄'의 무게를 덜기로 했다. 식사 준비를 함께했고, 아침에 내가 도시락의 메인 메뉴를 만드는 동안 남편은 과일이나 샐러드 등 후식을 쌌다.

낮에 집에 있는 내가 청소를 담당했지만, 발코니와 화장실 청소는 아이와 남편이 맡았다. 빨래도 각자 자신의 옷을 개어서 옷장을 정리했다. 불필요한 돌봄을 하지 않게 되면서 내가 가족의 뒷바라지 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언어습관도 의식적으로 바꿨다. 그때까지 나는 약속을 잡을 때 남편에게 "나 오늘 OO랑 저녁 먹어도 돼?"라고 허락을 구하는 투로 묻고 했었다. 나는 이를 "나 오늘 OO랑 저녁 먹고 싶어"라고 바꿔 말하며 욕구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썼다. 작은 변화였지만, 수동적인 입장에서 말하던 언어습관을 바꾸니 내가 보다 주체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부부가 공동으로 가사를 담당하는 이웃들의 모습, 야근과 회식이 없는 밴쿠버의 직장문화, 한국보다 훨씬 젠더중립적인 밴쿠버의 분위기는 이런 외적인 변화들을 촉진했다. 사실, 우리 가족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내 안에 스며들어 있는 가부장적 사고의 잔재였다.

내 안의 가부장 몰아내기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을 글로 쓰고 소통하면서 나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평등"이라는 가치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을 글로 쓰고 소통하면서 나는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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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이 침대에 앉아 자신의 빨래를 개고, 저녁 식사 후 설거지를 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늘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옳은 방향이고 내가 그토록 원했던 변화인데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암 투병을 하면서도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고 살림을 도맡았던 나의 어머니가 자꾸만 떠오르면서 내가 '나쁜 아내'가 된 것만 같았다.

이는 '내 안의 가부장'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내 안의 가부장>(2019, 사우)의 저자 시드라 레비 스톤에 따르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가부장적 사고방식은 여성들에게 내면화된다. 이렇게 내면에 자리 잡은 가부장은 부적절한 죄책감을 유발해 여성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당시 '평등'을 실천하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바로 이 부적절한 죄책감이었다.

나는 이를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난 당신이 설거지할 때 소파에 앉아 있으면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당신도 그런 생각 한 적 있어?"

남편은 답했다.

"아니. 그게 왜 미안해? 난 네가 설거지할 때 앉아서 핸드폰 해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들던데. 그런 생각하지 말고 그냥 편히 쉬어."

남편은 느끼지 않는 이 이상한 죄책감은 오직 여성인 나만 느끼는 감정, 즉 가부장문화의 소산이었다. 남편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나의 부적절한 죄책감을 인식하고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또 하나 내게 힘이 됐던 건 '글쓰기'였다. 나는 워크숍에서 느꼈던 강렬한 연대감을 한국의 여성들과도 공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2018년 봄 <오마이뉴스>에 '나의 독박 돌봄노동탈출기'를 연재했다. 내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나는 내면과 더 명확하게 접촉할 수 있었다. 또한, 독자들과 소통하면서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변화를 원하는 것이 나만이 아님을 확인하면서 좀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워크숍 이후, 나는 밴쿠버에서의 시간을 나의 가치인 '평등'을 실천하면서 보냈다. 가정에서 평등한 관계를 만들기 위해 애썼고, 다문화지원센터에서에서 자원활동을 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었다. 전업주부로 있었지만, 우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답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답다'는 느낌을 갖게 되자, 멀어졌던 남편과의 거리도 점점 좁혀졌다.

상처받고 지쳐있었던 나의 마음은 캐나다에서 지내는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서서히 치유됐다. 일과 공부에서만 활기를 얻을 수 있었던 내게 이는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문제는 귀국 후에 이를 어떻게 이어 가느냐였다. 이런 숙제를 안고 우리 가족은 2019년 1월 귀국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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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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