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1980년 5월 19일 오후 3시께, 계엄군들이 광주 금난로와 충장로로 출동, 전 지역을 들쑤셔대는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광주시민들이 경찰과 공수부대의 살인적인 폭력에 저항하며 궐기한 5월 18일이 저물고 둘째날 19일이 밝았다. 밤 사이에도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무자비한 탄압과 검거가 계속되었다.

분노와 공포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시내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초ㆍ중ㆍ고등학교와 관공서, 일반 기업체는 정상근무를 계속했으나 시내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했다. 대동고와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생들이 교내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오후로 접어들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날 오후 시내 중고등학생들을 귀가 조치시켰다.

7공수여단이 11공수여단에 배속되고 31사단 병력을 재배치시키는 등 전열을 정비하고 탱크까지 동원한 공수부대원들의 잔인한 진압에 시위군중은 방화와 투석, 화염병 투척으로 맞섰다. 

녹두서점을 비록한 시내 곳곳에서 화염병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화염병은 투석이나 도로변의 대형 화분을 바리케이드로 이용하는 소극적 방어와는 달리 공격용으로 등장한 새로운 무기였다. 이처럼 심각하게 진행되는 시위상황은 11공수여단장으로 하여금 현장점검에 나서게 했고, 현지 지휘관은 시위진압을 위해 1개 공수특전단을 증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주석 1)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지난 밤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다쳤는지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고, 특전 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한편 신군부에서는 밤중에 정예부대를 속속 광주로 증파시키고 있었다. 19일 00:15분 제11공수여단 1여단장 최웅 준장, 장교 102명, 사병 69명이 제31사단에 도착했다.

새벽 2시 10분에는 제31사단에 도착한 제11공수여단이 조선대학으로 이동했다. 새벽 4시에 35대대는 11특전여단의 작전통제하에 배속되고, 11여단 61대대에게 33대대 및 35대대의 거점을 인계했다.

제31사단 병력도 재편성되었다.

1. 제7공수여단의 임무를 제 11공수여단이 맡는다.
2. 제7공수 제33대대는 사단 예비병력으로 운용한다.
3. 제7공수 제33대대는 제11공수에 배속시켜 진압작전에 출동시킨다.
4. 제11공수여단의 시내 배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가. 제11공수여단 제61연대 : 공용터미널
 나. 제11공수여단 제62연대 : 장동지역
 다. 제11공수여단 제63연대 : 계림동 지역
 라. 제7공수여단 제33연대 : 고속터미널 (주석 2)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모습.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18일 밤 11시경 신군부는 광주시내 36개 주요 지점에 공수부대원들을 집중 배치하고 새벽에 증파된 병력을 추가로 배치하여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췄다. 마치 적군을 상대로 하는 작전과 다르지 않았다.

공수부대의 80년 5월 21일 도청 앞 금남로 집단발포가 있기까지의 명령ㆍ지휘계통을 훑어보면 집단발포 또한 우발적 지위권 발동 차원이 아니라는 점이 유추되어진다.

광주항쟁 당시 보고계통은 7공수 33대대 및 35대대→전남계엄 분소(31사단장)→전남북계엄분소(전투교육사령관)→2군사령부→육군본부→계엄사령부로 올라가며, 지휘계통은 그 반대로 내려간다.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 5.18기념재단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7공수여단은 상급부대인 31사단이나 전교사에 정확한 상황보고를 하지 않았으며, 병력증원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80년 5월 18일 오후 1시께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1공수여단의 증파를 결정한다.

현지 지휘관 요구에 의해 병력증파가 결정되어지는 게 아니라 신군부 핵심들의 정치적 의도와 판단에 따라 일방적으로 지시가 하달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광주 상황이 보고계통은 7공수 33, 35대대→광주 505보안부대→보안사령부→신군부 핵심으로 전달되고, 이 보고를 기초로 결정한 명령이 공식지휘 계통을 타고 내려갔다고 보여진다. 즉, 11공수 3개 대대를 광주에 또 증파한 것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대학살을 획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평가가 일면 타당성을 갖고 있다 하겠다. (주석 3)

신군부 핵심세력은 군의 공식 계통이 아닌 자신들의 의도에 따라 광주에 '살육부대'를 증파하고, '작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주석
1> 『광주5월항쟁전집』, 28쪽.
2> 「전교사 작전일지」, 『광주5월항쟁전집』, 28~29쪽.
3> 『정사 5ㆍ18』, 158~15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