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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광주시민들과 계엄군이 대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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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아침부터 금남로 일대에는 시민들이 집결했다.

시민들은 간밤의 정보를 나누면서 분노에 치를 떨었다. 뒷날 드러난 사실이지만 "18일 하룻동안 광주지역에서 연행된 사람은 학생 155명(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과 시민 250명(재수생 66명, 민간인 184명) 등 모두 405명, 이들 중 68명이 두부외상 타박상, 자상 등을 입었고 이들 중 12명은 중태였다." (주석 4)

이날 오전 가톨릭센터에서 호남전기 노동자들과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연대투쟁을 위한 논의가 이루어질 예정이었으나 계엄군이 참가자들을 체포하여 무산되었다. 계엄군은 금남로 주변에 모이는 젊은이는 무조건 구타하고 연행하자, 시민들이 야유하고 더러는 연행을 막아서기도 했다.

오전 10시 40분경 충장로 일대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계엄령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고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다. 비슷한 시각 광주은행 앞에서 200여 명의 학생이 군경과 대치하고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섰다.

군용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4거리에서 장갑차 4대씩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를 포위했다. 시내 곳곳에서 공수부대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폭행하거나 연행했다.

도청 앞 상무관 골목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아가씨를 붙잡아놓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힌 채 손으로 당겨보는 등 온갖 희롱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온 몸의 피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저런 금수만도 못한 놈들을 보고도 항의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구술 : 천순남) (주석 5)

  
진압봉으로 광주 시민 폭행하는 계엄군 1980년 5월 19일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한 시민을 진압봉으로 폭행하고 있다. 사진은 당시 전남매일 나경택 기자가 촬영했다. <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진압봉으로 광주 시민 폭행하는 계엄군 1980년 5월 19일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한 시민을 진압봉으로 폭행하고 있다. 사진은 당시 전남매일 나경택 기자가 촬영했다. <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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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대원들의 만행이 시민들에게 알려지고 고등학생들까지 분개시켜 항쟁의 대열에 나서게 하였다. 대동고등학생들의 경우이다.

1교시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갔더니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선생님, 공수들에게 맞아죽은 형님, 누나들의 원수를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하고 울부짖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맞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울었다.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격분한 학생들이 의자를 부숴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운동장을 돌며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동참하라. 광주시민 학살한 공수들을 때려죽이자'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이 학교 앞에 몰려와 진을 쳤고, 헬기가 계속 학교 상공을 돌며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구술 : 박행삼)

우리들은 등교하자 전날 시내에서 행해졌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목격담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1교시 수업을 전후로 3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일부 학생은 저지하는 선생님을 밀치고 1,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 하고 호소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11시경 교문 진출을 시도하는데 공수들이 몰려와서 학교 주변을 포위하고 정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단체로는 학교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술 : 이덕준) (주석 6)

 
 5·18 당시의 계엄군.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
 5·18 당시의 계엄군. 국립 5·18 묘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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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시위가 고등학생들까지 나서는 시민항쟁으로 격화된 것은 계엄군으로 동원된 공수부대의 비인간적인 만행이 직접 도화선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민주주의에 대한 일체감이었다.

4ㆍ19혁명이 고등학생→대학생→시민으로 확대된 것은 이승만의 학정과 3ㆍ15 부정선거에 대한 분노의 공감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날 오전 11시경부터 시위진압에 탱크가 동원되고, 공수부대는 금남로ㆍ충정로 일대의 다방ㆍ여관ㆍ건물ㆍ민가 등을 샅샅이 뒤져 시민들을 구타하고 반항하면 총검으로 난자질했다.

1980년 5ㆍ18광주항쟁은 신군부의 우두머리들이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해 대량 학살을 유도한 사건이었다. 당시 시민군에게 붙잡힌 공수부대원은 광주에 배치받기 전 3일 동안이나 식량배급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투입되기 직전에는 소주를 공급받았다고 증언했다.

가장 중요한 건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광주에 투입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석 7)


전두환 일당은 공수부대원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3일 동안 식사를 주지 않고 술을 먹여 광주에 투입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저들의 만행은 이제 시작단계에 있었다.


주석
4> 『정사 5ㆍ18』, 182~183쪽.
5> 앞의 책, 31쪽.
6> 앞의 책, 37쪽.
7> 최영진, 『한국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286~287쪽, 오름, 1999. 강준만ㆍ김환표, 「신군부의 5ㆍ18 용공조작 음모」, 『희생양과 죄의식』, 206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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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