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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량 시위
 차량 시위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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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ㆍ18 광주항쟁의 변곡점은 20일 밤에 있었던 차량시위를 들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 때에도 서울 도심에서 수많은 택시 기사들이 동시에 경적을 울리면서 시위에 동조했지만, 광주에서는 훨씬 적극적으로 계엄군에 맞섰다.

이날 저녁, 광주 시내에서는 차량시위가 전개됐다. 이미 광주 시내에서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고, 때로는 손님이나 환자들을 옮기던 기사들이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5월 20일 오후 4시경부터 무등경기장에 모인 기사들은 택시와 버스, 트럭을 몰고 금남로를 거쳐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금남로는 사람들과 차량으로 뒤섞였다. 5월 20일 저녁 차량시위는 공수부대의 저지로 끝이 났으나 시민들의 시위는 계속됐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통행금지가 있었음에도 시민들은 밤늦도록 공수부대에 대항했다. (주석 18)

  
 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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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이 시위현장은 물론 공수부대가 포진한 곳으로 돌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아간에 사상자가 생겼다. 차량에 의해 공수부대가 무너지자 시민들은 환호하면서 돌진했다.

7시경 갑자기 유동 쪽으로부터 수많은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일제히 경적을 울리면서 나타났다. 맨 앞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 11대가 섰고, 영업용 택시 200여 대가 뒤를 이었다.

트럭 위엔 20여 명의 청년이 태극기를 흔들었고, 저마다 각목과 태극기를 든 청년과 아가씨들이 타고 있었다. 차량의 행렬은 거대한 파도로 밀려와 시위 군중을 해일로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민중항쟁의 양적ㆍ질적 비약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차량시위를 하는 광주의 시위대 용기있는 광주시민들의 행동은 실로 대단했다.
▲ 차량시위를 하는 광주의 시위대 용기있는 광주시민들의 행동은 실로 대단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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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앞서 오후 2시 좀 넘어서 광주역 부근에는 10대 가량의 택시가 모여들어 있었다.

"손님을 태워준 게 무슨 죄냐", "우리를 이렇게 진압봉과 대검으로 죽여대면 우리도 영업을 집어치우고 싸울 수밖에 없다"며 울분을 털어놓는 동안 택시는 20여 대로 불어났다. 택시 기사들은 조직적 대응을 위해 광주 시내 택시들을 모두 무등경기장으로 모으기로 결의하고 흩어졌다.

오후 6시경 무등경기장 앞에는 200여 대의 택시가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행된 공수부대의 잔학상과 택시기사들의 피해를 알리고 성토한 후 "군 저지선 돌파에 앞장서자"고 뜻을 모았다. (주석 19)


시위군중은 지금까지 수세에만 몰리다가 차량시위로 군 저지선이 뚫리면서 용기백배하게 되었다.

이후부터 시위의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5월 19일 금남로 가톨릭 센터 앞에서 군인에게 맞고 있는 박남규씨
 5월 19일 금남로 가톨릭 센터 앞에서 군인에게 맞고 있는 박남규씨
ⓒ 5.18 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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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과 도청 앞에서 시민들은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곡괭이, 식칼 등으로 '무장'하고 차량을 뒤따라 진군했다. 시위군중의 위세는 공수대원들을 위압하고도 남았다.

공수부대는 거침없이 M16의 자동소총으로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최초의 집단발포였다.
앞장섰던 수명의 청년들이 픽픽 쓰러졌다.

도청 앞 광장에 시신이 널브러지고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새벽 하늘에 메아리쳤다. 시민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산 자들이 소리쳤다.

"우리도 무장을 하자" "총이 있어야 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총으로 국민을 향해 쏜 자들을 찾아내자"는 등 무장론이 제기되었다.

 
 헌혈을 위해 병원에 몰려든 시민들과 의료진
 헌혈을 위해 병원에 몰려든 시민들과 의료진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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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밤 11시 30분 경 광주역 부근에서 집단 발포한 부대는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병력이다.

3공수여단장은 최세창 준장이다. 3여단은 80년 5월 19일 밤 용산역을 출발, 광주로 향한다. 5월 20일 새벽, 광주역에 도착한 이들은 군용트럭으로 전남대로 이동, 가면을 취한 뒤 밤 9시 출동명령을 받는다.

군수과 요원에게서 실탄 120발씩을 지급받는다. 전남대에서 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아스팔트와 건물을 향해 사격을 실시한다. 트럭 위에서는 M60이 엄호사격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신역을 향해 다가간다. 사병들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한다.

"후퇴는 없다. 후퇴하면 모두 쏴죽인다." (주석 20)


주석
18> 노영기, 「5ㆍ18 항쟁기 민간인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 『역사비평』2001년 봄호, 217쪽.
19> 김진경, 앞의 책, 63~64쪽.
20> 『정사 5ㆍ18』, 274~27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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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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