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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 가을의 노래, 김대규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가을은 어딜 가나 걷고 싶은 길이다. 지난 중순께 서창들녘 억새축제에 갔다. 영산강변 3.5km 서창들녘 길. 맘 놓고 뛰어다니는 아이들, 화안하게 웃음꽃 피운 사람 물결이 은빛 억새밭 사이로 흐른다.

억새밭 사각형 액자 포토 존에 두 아이와 아내를 앉히고 사진을 찍는 남편, 멀리 가설무대에선 '그곳으로 떠나요' 노랫소리 들린다. 억새 들녘 길엔 억새만 있는 게 아니다. 갈대도 있다. 길섶에는 쑥부쟁이, 강아지풀이 무더기무더기 구색을 맞춘다.

안도현 시인의 <무식한 놈> 시가 떠오른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 오래전에는 나도 구절초와 쑥부쟁이,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지 못했다. 은빛으로 반짝이던 억새꽃이 어둠에 묻힐 때까지 두 시간 넘게 걸었다.

그 전 주말에는 장성 노란꽃 잔치에 갔다. 3.2km 황룡강변에 펼쳐진 백일홍, 코스모스, 구절초, 해바라기 꽃길을 인파에 묻혀 세 시간 걸었다. 막말 쏟아내는 TV도 없고 취업난, 무역분쟁도 보이지 않는다. 다들 자유롭고 얼굴이 밝다. 환경운동가이자 비핵주의자인 리베카 솔닛이 <걷기의 인문학>에서 말한 대로 '자유로운 걷기에는 자유로운 장소, 자유로운 시간, 자유로운 육체가 있다.'

자유로운 걷기에는 행복이 따라온다. '행복의 양은 자유의 양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철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2000년에 <걷기 예찬>을 썼다. "걷기는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그는 자기시간의 하나뿐인 주인이다." 2002년 밑줄 치며 읽은 대목이다.

자유로운 걷기 중 최고는 '걷기 명상'이다. 걷기 명상을 전 세계로 전파한 틱낫한 스님은 2003년 3월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나라 여러 곳을 명상하며 걸었다. 방한에 맞춰 "삶을 바꿀 수 있는 힘, 내 안에 있다"는 한국판 <힘>을 발간했다. 2003년, 2008년, 2014년 읽었던 그 책을 찾아 다시 읽어본다. 여러 군데 밑줄이 그어져있다. 밑줄 안친 대목(50쪽)이 갑자기 눈에 들어온다.

"----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잠시 책장을 덮고 가만히 걸어보라. 당신이 걷고 있는 그곳은 차가운 마룻바닥이나 아스팔트가 아닌 아름다운 지구 위라는 사실을 느껴보라, 그리고 마음을 발끝에 모으고 한 걸음 한 걸음 자유인으로 걸어라. 정말 멋진 일 아닌가? --- "

틱낫한 스님이 실천하며 전파하는 걷기 명상은 숲길, 꽃길, 여행길 걷기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지구 위에 발자국을 찍는 걷기였다. 틱낫한 스님은 2017년 발간한 <너는 이미 기적이다>에서 "지금 우리는 아름다운 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다. 우리의 걸음자체가 이미 하나의 기적이다.---- 발바닥으로 땅에 입 맞추듯 어루만지듯 걸어가는 걷기 명상 속에 큰 사랑이 깃들어 있다. (걷기명상 편)"라고 말한다.

책장을 덮고 집 앞 우산공원을 걸어본다. 흙에 입맞춤하는 느낌, 대지의 힘이 발끝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느낌, 아름다운 지구 위를 걷는 기분을 느끼려고 마음을 모아본다. 자유인이 되고 싶은 염원이다.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강하게 때론 약하게 / 함부로 부는 바람인줄 알아도 /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 보이지 않는 길을 / 바람은 용케 찾아 간다 / 바람 길은 사통발달이다 //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 바람은 바람 길을 간다 //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 <바람에게도 길은 있다>, 천상병

걷기예찬 - 다비드 르 브르통 산문집

다비드 르브르통 지음, 김화영 옮김, 현대문학(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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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걷자!

태그:#자유인, #걷기 명상, #아름다운 지구, #걷기 인문학, #너는 이미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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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글로 쓰면 길이 보인다'는 가치를 후학들에게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인재육성아카데미에서 '글쓰기특강'과 맨토링을 하면서 칼럼집 <글이 길인가>를 발간했습니다. 기자생활 30년(광주일보편집국장역임), 광주비엔날레사무총장4년, 광주대학교 겸임교수 16년을 지내고 서당에 다니며 고문진보, 사서삼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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