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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말]
 지난 17일 김정호 청주동물원 수의사(진료사육팀장)가 새끼 표범 시절부터 돌봤던 '직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지난 17일 김정호 청주동물원 수의사(진료사육팀장)가 새끼 표범 시절부터 돌봤던 "직지"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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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동물들도 사람들한테 보여지기 싫은 시간이 있을 거잖아요. 숨을 공간이 필요하죠. 그래서 내실(방사장과 구분된 동물 생활공간) 문을 열어둬요. 내실을 드나들면 관람객이 동물을 잘 못 볼 수도 있죠. '호랑이 꼬리만 보고 갔어', 그럴 수 있지만 꼭 봐야 하나요? 꼬리만 봐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김정호 수의사(47)가 말했다. 김 수의사와 대화하기 전까지는, 동물원 동물에게 '전시되지 않을 권리'가 주어질 수 있다는 상상은 해보지 못했다. 아이 손을 잡고 동물원에 갈 때면 갇혀 있는 동물들이 불쌍해 마음 한 켠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이 무력한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지는 곳, 김 수의사가 일하는 청주동물원이 그러했다.

우리 밖에서 사람이 뛰면 우리 안에서 사자가 그 방향으로 함께 뛸 공간이 있는 곳. 웅담 채취용으로 길러지다 구출된 반달곰이 해먹에서 오르락내리락 놀다 통나무를 마음대로 파헤치는 곳. 정형행동(같은 장소를 왕복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표범을 위해 우리 사이에 긴 철제 터널을 놓은 곳. 멸종위기종 야생동물 스라소니 새끼 세 마리를 복원해 잘 키우고, 종국엔 야생에 돌려보낼 준비를 하는 곳.

청주동물원 진료사육팀장인 김 수의사는 숲속에 폭 쌓여 있는 그 안에서 "(자연과 동물 그 사이에서 공존을 지향하는) 방향성 있는 동물원"을 꿈꾸고 있다. 지난 17일 김 수의사를 청주동물원에서 만났다.

"야생에서 동물을 잡아다가 죽을 때까지 전시...비윤리적이죠"
 
 김정호 청주동물원 수의사(진료사육팀장).
 김정호 청주동물원 수의사(진료사육팀장).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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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의사에게 인터뷰를 청한 건 그의 말에 '염치'가 엿보여서다.

그의 별칭은 '동물원을 싫어하는 동물원 수의사'다. 청주동물원 동물과 이들을 돌보는 수의사·사육사를 3년 동안 촬영한 다큐 영화 <동물,원>(왕민철 감독, 2019)에 출연한 김 수의사는 영화 홍보차 나선 언론 인터뷰에서 "동물 입장에선 (동물원은) 필요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자신이 일하는 곳에 대한 냉철한 문제 인식이 담겨 있는 말이었다.

영화에는 동물구조센터에서 구조한 부리가 비뚤어진 독수리를 동물원에서 보호하고, 원래 동물원에 있던 독수리(이름은 하나)를 방사하기 위해 맞바꾸는 모습이 담겼다. 그래서 이런 질문부터 던져봤다. 과연 '하나'는 야생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자연 속에서 하나는 행복할 수 있을까? 이 같은 '맞바꿈'은 지극히 '인간스러운' 결정은 아닐까?

"새는 날기 위해 몸 구조들이 구성돼 있어요. 유전자에도 녹아 있고요. 동물원은 날 수 없는 공간이죠. 나가고 싶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날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까요. 사실 모르겠어요. 새니까."

머리를 긁적이던 김 수의사는 말을 이었다.

"동물원의 방향성을 만드는데 상징적인 일이 되길 바랐어요. 동물원 동물들을 설명하려면 야생에서의 습성밖에 할 얘기가 없는데, 날아야 하는데 가둬놨다? 모순되잖아요. 야생에서 동물을 잡아다가 죽을 때까지 전시하는 건 윤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보호 받아야 할 동물은 여생을 동물원에서 보내고, 나갈 수 있는 동물은 내보내는 게 동물원의 역할이지 않을까요. '하나'는 동물원에서 20년 쯤 살았고, 여생 10년은 자유롭게 날면서 살아봐도 좋지 않을까요."

김 수의사가 알기로는 이렇게 맞바꾼 사례는 '하나'가 처음이라고 했다. 

제대로 된 먹이 활동이 불가능해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도, 구조센터에서 사육할 수도 없어 안락사 위기에 처해 있던 부리 비뚤어진 독수리는 청주 동물원 식구가 됐다. 식탐이 많고 삶의 의욕도 넘쳐 동물원 독수리 사이에서 높은 서열에 올랐다고 했다.

동물원이 생긴 90년대 후반부터 있던 독수리 '하나'는 현재 훈련센터에서 비행훈련 중이다. 1년 훈련 하면 방사가 가능할 줄 알았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일단은 내년 겨울 방사가 목표다. 방사 후에도 '하나' 발목에 GPS를 달아 추적 관찰할 예정이다. '하나'가 자연생태계에서 살아낸다면 그 자체로 동물원의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가 녹아 있다.

"제가 돌보는 대상을 존중해야 스스로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최근 개봉했던 다큐 영화 <동물, 원>을 통해 소개됐던 부리가 비뚤어진 독수리. 생존 가능성이 낮아 한때 안락사 위기에 처했던 이 독수리는 김정호 수의사(진료사육팀장)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현재 청주 동물원에서 지내고 있다.
 최근 개봉했던 다큐 영화 <동물, 원>을 통해 소개됐던 부리가 비뚤어진 독수리. 생존 가능성이 낮아 한때 안락사 위기에 처했던 이 독수리는 김정호 수의사(진료사육팀장)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현재 청주 동물원에서 지내고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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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의사는 처음부터 공공동물원의 '방향성'을 그리며 수의사 일을 시작한 건 아니라고 했다. 모든 메일 주소에 'africa(아프리카)'를 넣을 만큼 야생동물을 돌보는 일을 하고 싶었던 28살의 그는 차선으로 '야생동물 수의사'라는 이름에 청주동물원을 택했다. 김 수의사는 꼬박 18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조금의 결정권을 가진 '팀장' 직을 단 2014년까지, 그는 '싸우는 사람'이었다.

"동물을 그냥 '전시하는 동물'로 보는 분들도 있었죠. 저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힘들었어요. '동물 뭐~편하게 가지 좀' 그런 거죠. 그러다 보니 많이 싸웠죠."

저절로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 그럼 '동물'은 뭔가요?
"최소한 공존, 같이 가야 할 대상이죠.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제가 돌보는 대상이 존중 받아야 결국 스스로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어떻게 보면 저를 위한 것일 수도 있어요."
 
곰 우리에 폐 소방호스로 엮은 해먹을 달아주는 것.
시멘트 바닥이던 우리 바닥을 흙으로 바꿔주는 것.
좁고 튼튼하기만 한 호랑이 우리를 개조해 '그나마' 생활하기 좋게 만들어주는 것.
시민이 함께하는 '동물 행동 풍부화 동아리'를 꾸려 우리 안에 다양한 장난감·도구를 만들어주는 것.

김 수의사와 동물원 사육사들이 공존과 존중을 위해 노력한 지점들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애써가며 때로는 싸워가며 18년이 흘렀지만 김 수의사는 때때로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했다. 

"저랑 또 한 분의 수의사가 80 몇 종의 동물을 다 진료·치료해야 하는데 다 알지를 못하니까요. 치료를 제대로 하고 있나,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2013년까지 12년 동안 수의사가 저 한 명이었어요. 모두 제 책임이었죠. 일반 수의사는 과를 나눠서 일하는데, 제가 이 많은 종을 다 돌본다는 게...부끄럽죠."

80종의 동물을 돌보는 게 버거운 일일수는 있지만 부끄럽다, 왜일까? 그의 부끄러움은 '일관성'에서 비롯됐다.
 
"사실 위선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동물한테 뭘 해주려다 보면 끝이 없어요. 좀 더 공부해야 하고, 좀 더 좋은 치료를 해야 하고. 그러려면 집에 가서도 계속 공부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는 안 하니까요. 남들이 위선 떤다고 할까봐 일부러 위악을 떨기도 해요. '나 실은 나쁜 사람이야' 이러면서요. 영화에서도 그렇고 인터뷰에서도 거창하게 말은 해놨는데 실상의 삶은 그렇지 않을 수 있으니, 부끄러워요."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동물들에게 뭘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을 뱉고는 '위선'을 경계했다. "동물을 잘 돌보려면 집에 가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데, 친구와 약속도 있을 수 있고 그런 게 찔린다"고 했다.

영화에서는 번드르하게 말해놓고 실상의 '김정호'는 다른 사람일까봐 부끄럽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요즘 <동물,원> 영화 볼 때마다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모순될까봐, 일관성을 잃었을까봐 되짚어본다고 했다.

그에게 '공공동물원 수의사로서 염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걸로 보인다'고 묻자 "저야 뭐...다들 하실 거예요.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뭐"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원래 이 쪽 일 하시다가 그만두고 농장에서 사육되는 곰 찾아다니며 해먹 달아주는 분이 계세요. 그런 곰들은 하루 종일 할 일이 없어 밥 먹는 시간만 기다려요. 그런데 해먹 하나 달아주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일이 생겨요. 걔들한테는 그게 가장 큰 복지죠. 그런 분도 계신데요. 근무시간 내에 이 정도 하는 건 직업 윤리이기도 해요, 동물 윤리뿐 아니라."

"한국 토종 동물 생츄어리가 꿈...복원한 스라소니 자연으로 돌려보내야죠"
 
 김정호 청주동물원 수의사(진료사육팀장)는 토종 동물을 보살피고 복원하는 '생추어리(Sanctuary, 안식처)' 동물원을 꿈꾼다. 그는 지난 1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토종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 스라소니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왼쪽 어깨 유니폼에 붙어 있는 마크 역시 스라소니 그림이다.
 김정호 청주동물원 수의사(진료사육팀장)는 토종 동물을 보살피고 복원하는 "생추어리(Sanctuary, 안식처)" 동물원을 꿈꾼다. 그는 지난 17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토종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 스라소니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의 왼쪽 어깨 유니폼에 붙어 있는 마크 역시 스라소니 그림이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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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수의사는 자연과 동물원 그 사이 '타협'의 공간으로 공공동물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보낼 수 있는 동물은 내보내고 보호받을 동물은 보호 받고. 그 중간에 있는 동물은 이 안에서 공존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중간에 있는 동물' 중에는 반달곰 3마리도 있다. '반이·달이·곰이'다. 웅담 채취용으로 길러져 웅담을 제거하는 순간 생을 마감했을 세 마리의 곰은 지난 해 12월, 올 9월 시민 후원(녹색연합 주관)으로 구출돼 터를 잡았다. 이 곰들은 지리산 곰과 유전적으로 달라 국내 방사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동물원이 비난 받는 거 잘 알고 있어요. 왜 야생동물 가두고 괴롭히냐, 소비하냐 그거죠. 그런데 결국은 방사 못하는 동물도 있어요. 여기서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동물들이죠. 그 동물들을 위해 다들 애쓰고 있어요." 

김 수의사는 '공공동물원'의 역할을 생츄어리(Sanctuary, 안식처)에서 찾았다. 자연과 동물원 사이의 징검다리다. 생츄어리를 청주동물원에서 구현하기 위해 김 수의사는 스라소니 복원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고, 올 4월 말 새끼 3마리가 연달아 태어났다. '전시'용 복원이 아니다. 스라소니를 잘 키워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게 목표다. 

"스라소니는 멸종위기종 1급 동물인데 스라소니가 자연으로 돌아가면 자연 생태계의 균형도 이룰 수 있죠. 스라소니 정도면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지 못하는 선에서 최근 문제되는 멧돼지 등의 수 조절을 자연스럽게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멸종위기종을 보존하고 보호한다고 말은 하는데, 그 뒤로 보이는 철창과는 안 맞죠. 일관성이 있어야 해요. 멸종 위기 동물이지만 방사까지 돼야 의미가 있죠. 한국 토종 동물 생츄어리를 하고 싶어요."

멸종위기종을 복원해 동물원에 가둬두는 것은 그가 지켜가려는 '일관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했다. "내보낼 수 있는 동물은 내보내는 것"이 그가 세운 방향성이다. 그래서 그는 국내 토종 동물들을 복원하고 사육한 후 방사하는 '토종 동물 생츄어리'를 꿈꾼다. 그 꿈에는 외국 동물이 없다. 이를테면 '북극곰 없는 동물원'이다.

"우리나라 IT 산업이 강하잖아요. 외국 동물들은 증강현실로 만나봐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BBC 잘 나오는데 굳이 뭐. 따뜻한 지방이나 추운 지방 동물 데려다가 고생시키는 건, 잘 키울 자신도 없고요. 관람객한테 멸종위기·환경 얘기하면서 따뜻한 데 사는 애들 위해 에너지 때려 넣고 불 때고, 이건 안 맞잖아요. 그건 거짓말하는 거잖아요."

김 수의사와의 인터뷰는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해 오후 3시에 끝이 났다. '염치'를 주제로 한 4시간 30분 동안의 인터뷰에서 '일관성'이라는 단어가 오롯이 남았다. 
 
 김정호 수의사(진료사육팀장)는 2002년부터 18년 가까이 청주동물원에서 일해왔다.
 김정호 수의사(진료사육팀장)는 2002년부터 18년 가까이 청주동물원에서 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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