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관련기사 : 내 아내와의 과거를 편지에 쓴 절친, 무슨 심리지?]

빈에서 보낸 첫 10년은 베토벤에게 성공적이었다. 빈 살롱과 연주회를 장악했고, 본격적으로 작곡자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베토벤이 일부러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빈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25년 동안 자신의 신분을 숨겼다. 귀족 행세를 한 것이다. 그가 귀족으로 오해받은 가장 큰 이유는 이름 가운데 판(van)이 들어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귀족을 나타내는 호칭인 폰(von)과 헷갈리면서 벌어진 일이다.

1795년 자선 연주회 발표와 논평에는 루트비히 폰 베토벤으로 되어 있고 괴테가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도 '폰 베토벤'에 관한 언급이 있으며, 이후 계속 이렇게 표기된 문건이 다수 발견되었다. 베토벤은 이 의미를 잘 알았고,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굳이 그러지 않았다. 이 문제로 1818년 재판까지 벌어졌다.

결국, 베토벤은 황실과 왕족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과정에 마침내 귀족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인정함으로 이 촌극은 막을 내렸다. 따라서 이 사건은 평민들의 사건을 처리하는 시민 법원으로 이관되었고, 시민 법원은 여관주인이나 신기료장수의 분쟁을 처리하는 법원으로 이곳으로 이관된 상황에 베토벤은 작곡가로서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다.

그가 귀족행세를 한 배경에 관하여 사회를 통솔하는 집단에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마음과 동시에 당대 사상가들의 주장 즉, 귀족은 출생이 아니라 덕성을 기반으로 하여야 하며, 세습이 아닌, 선출되어야 한다는 계몽적인 주장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베토벤의 이미지 세탁을 한 쉰들러의 주장에 따르면 베토벤은 자신의 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면서 "나의 귀족 신분은 이곳과 이곳에 있소"라는 말로 재판 과정에 자신을 변론했다.
  
청력 잃고도 엄청난 창작열 보인 베토벤
 
 산책하는 베토벤
 산책하는 베토벤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1800년 4월 베토벤은 첫 아카데미를 열었다. 아카데미는 수익을 연주자가 가져가는 대중 연주회를 뜻한다. 그리고 그가 음악을 쓴 발레 '프로메테우스의 창조'가 1801~1802년 사이 23번 공연되었고, 외국 출판업자들 사이에서까지 그의 작품을 얻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의 판본이 엄청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국제적인 위상도 올라갔다. 이즈음 그에게 문제가 생겼다. 다음은 그가 1801년 절친 베겔러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중략) 그러나 시기심이 많은 악령인 내 건강이 나의 수레바퀴에 악랄한 바퀴살을 찔러 넣었네. 사실인즉 이런 것이네. 지난 삼 년 동안 내 청력이 점점 약해졌어. (중략) 거의 2년 전부터 나는 사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아.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나는 귀가 먹었어. 내 직업이 다른 것이라면, 이런 질환을 가졌더라도 지장이 없겠지. 그러나 내 직업에서는 끔찍한 장애일세." (중략)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이 시기에 베토벤은 엄청난 창작열을 보여준다. op. 18 현악 사중주 여섯 곡, op. 21 C단조 피아노 협주곡, op. 36 교향곡 2번 D 장조 등등 명곡을 무수히 발표했다. 건강도 살짝 좋아지는 듯했고 친한 친구들도 그에게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1802년 베토벤은 다시금 불안에 사로잡힌다. 청력 문제는 더 심각해졌고 아카데미를 열기 위한 궁정 극장의 대관은 다른 수요에 밀려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황실 궁정에 서곡을 몇 개 헌정했지만, 영구적인 궁정 음악가의 직위를 얻는 데 실패했다. 그것에 대해 그는 작곡가인 프란츠 안톤 호프마이스터에게 보낸 편지에서 "황제의 도시에 불한당이 있는 것처럼 황실 궁정에도 그런 자들이 있네"라며 분노했다.

예민해진 베토벤에게 담당 의사인 슈미트 박사는 시골에서 조용히 지낼 것을 권했고, 베토벤은 다뉴브 강변 하일리겐슈타트의 조용한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해 10월 그는 그곳에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로 알려진 유명한 글을 썼다.

이는 베토벤의 동생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다행히 그가 자살을 실행하지는 않았지만, 이 글에는 청력 손실로 인한 좌절, 그로 인한 음악가로서의 고통, 사회적인 교류에 대해 거의 공포스러울 지경인 그의 속사정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또한, 예술의 힘으로 여기까지 버텨왔으나 이제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과 형으로서 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까지.
 
"(중략) 내가 죽으면 그 즉시, 만약 슈미트 박사가 아직 생존해 있다면 나를 대신하여 그에게 내 병에 관해 물어보고 이 글에 내 질병의 진단을 붙이도록 하라. 그래서 적어도 내가 죽은 뒤라도 세계와 내가 화해하는 것이 가능해지도록. 동시에 나는 너희 둘을 나의 적은 재산의 상속자로 선언한다. (중략) 안녕, 내가 죽더라도 나를 아주 잊어버리지는 말아라. 그럴 만큼의 자격은 있으니까. (중략) 행복해라……."
 
하지만 베토벤은 유서를 작성하면서 부활했다. 그런 자신의 운명에 굴복하는 대신 맞서 싸우리라 마음먹은 것이다. 베토벤의 부활은 베토벤을 진정으로 위대한 음악가로 만들었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 역경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죽을 때까지 매번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고, 이후 폭포수처럼 오페라, 현악 사중주, 피아노 소나타, 교향곡들을 줄줄이 탄생시켰다.

베토벤이 보청기를 사용한 것은 1816년부터이고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진 것은 1817년 즈음이다. 대화 수첩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1818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약 10년이다. 오른쪽 귀는 완전히 청력을 잃었지만, 왼쪽 귀를 의지해 1820년대에도 간신히 소리를 듣기는 했다. 그러니 베토벤의 청력이 1800년부터 급격히 쇠퇴했다는 이야기는 다소 부풀려진 면이 있다.

베토벤은 유서에 "내가 사람들 가까이 다가가면, 불같은 공포감이 엄습하고 내 상태가 알려지는 위험에 노출될까 봐 두려워진다"고 썼다. 그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오로지 음악으로 채워 넣었다. 1816년 그의 일기에는 "오로지 너의 음악 속에서 살아라. 너의 감각은 너무나 제약되었으니까"라고 써 있다.

'영웅 교향곡'에 담긴 속사정

한때 베토벤은 빈을 떠나 파리로 갈 계획을 세웠다. 빈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출판사와의 소송, 빈 극장 운영진과의 갈등으로 인한 계약 무효 등으로 불만이 쌓였다. 그 무렵 사랑했던 여인 줄리에타 귀차르디가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한다는 사실도 그의 등을 떠밀었다.
   
베토벤은 황제가 다스리는 세상이 가고, 민중이 중심이 된 국가를 꿈꾸며 나폴레옹이 그 꿈을 이뤄주리라 생각했었다. 이때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을 만들고 있었는데 이는 나폴레옹을 모델로 삼았다.
 
 알프스를 넘고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자크 루이 다비드.1800, 루브르박물관)
 알프스를 넘고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자크 루이 다비드.1800, 루브르박물관)
ⓒ 루브르 박물관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를 천명한 사실에 격분해 "그렇다면, 그도 역시 그저 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군. 이제 그도 모든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오로지 자기 야망에만 탐닉할 것인가? 그는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가 되겠지"라고 소리치며 이 곡에 써 놓은 '보나파르트'(나폴레옹 보나파르트)란 글자를 찢어버린다. 그리고 파리로 가는 것을 단념한다. 그 교향곡은 훗날 '영웅 교향곡'이 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을 후원해 주던 리히노프스키와도 갈등을 빚었다. 리히노프스키는 후원을 함과 동시에 베토벤의 작품이나 생활에 관여하려 했고 구속받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베토벤은 벗어나고 싶었다.

1806년, 그는 시골 마을에서 프랑스 장교들을 위한 연주를 베토벤에게 주문했는데, 베토벤은 이를 거절했다. 방문을 잠근 베토벤의 방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자 화가 난 베토벤은 그를 의자로 내려치려 했다. 사람들이 간신히 막았고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와 리히노프스키의 흉상을 마루에 내던져 버린다.

빈 극장과의 관계도 깨지고 후원자도 잃은 베토벤은 궁핍해졌다. 1807년 베토벤은 황실 궁정 극장에 청원서를 넣는다. 매년 오페라 한 곡과 다른 작품들을 작곡할 테니 2400플로린의 연금을 지급해달라는 청원이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경제적 궁핍은 다음 해 12월 12일 빈 극장에서 열린 대규모 아카데미로 해결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가 그리 박수를 받지는 못했다. 문제는 이 연주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는 것이다. 최고 수준으로 음악에 이해가 있는 음악애호가 라이하르트 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어 이렇게 논평했다.

"우리는 지독한 추위에 떨면서 6시 30분에서 10시 30분까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 많으면 지나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참고서적
베토벤(얀 카이에르스, 홍은정, 도서출판 길)
루트비히 판 베토벤( 메이너드 솔로몬, 김병화, 한길아트)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인천 투데이와 개인 브런치에 실립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