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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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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같은 시기 국내 중앙지들의 보도 실태를 찾아본다.

5월 21일

광주일원 데모사태 - 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광주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 (『동아일보』).

5월 22일

안보적 중대사태이다 (『서울신문』).
원통한 것은 이 양상이야말로 북의 무리가 노리고 있는 각본에 딱 들어맞는 연출무대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이다 (『서울신문』).
광주일원 심각사태 (『경향신문』).
광주소요 이성과 자제로 빨리 수습되어야 한다 (『경향신문』).

5월23일

 북괴 방송이 광주사태만 집중적 선동 (『서울신문』).
 폐허 같은 광주 - 데모 6일째 (『조선일보』).
 유혈의 비극 - 처절한 광주시 (『한국일보』).

5월24일

 광주시위 선동 남파간첩 검거 (『서울신문』).
 북괴간첩 1명 검거 (『경향신문』).

 5월25일

무정부상태 광주1주 - 바리케이드 넘어 텅 빈 거리엔 불안감만 (『조선일보』 김대중 사회부장 기명기사). (주석 19)

 
5.18 광주민주민주화운동 당시 쓰러진 사람들
 5.18 광주민주민주화운동 당시 쓰러진 사람들
ⓒ 광주민중항쟁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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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보도ㆍ논평에 있어서 지극히 비상식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사태가 한창 진행되는 5월 20일자 사설 「백척 간두에 서서」에서는 광주항쟁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면서 5ㆍ17조치의 '부득이' 함을 피력한다.

이 사설은 "최규하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비상계엄령을 전국화하는 '5ㆍ17 조치'를 취하면서 이 위기를 극복할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1980년 5.18 당시 시민들과 계엄군들이 금남로에서 대치하고 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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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괴의 격증하는 적화책동이 학원소요를 고무 선동하고 있는 가운데 일부 정치인, 학생, 근로자들이 조성하고 있는 혼란과 무질서가 우리 사회를 무법천지로 만들고 있으면 이와 같은 사태가 경제난까지 극도로 악화시켜 바야흐로 국기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다"고 최 대통령은 지적하면서,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5ㆍ17 조치를 취한다고 밝히고 국민의 협조를 호소하고 나섰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이와 같은 상황에 이르지 않고 시국이 수습되기를 누누히 바라왔다. 그와 같은 충정을 우리는 정부를 비롯한 각 분야 영역에 거듭해서 호소해 왔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23일 「새 내각에서 절실한 기대」제하의 사설에서 "이 엄청난 비극이 누구를 위해 전개되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그저 통탄할 따름이다. 외우의 중압도 물리치기 벅차거늘 내환으로 자멸의 길을 불러들여야 할 때인지 관계기관은 물론 국민 모두가 냉철한 이성으로 위기극복을 위해 자제에 자제를 거듭해야 할 것이다"라고, 원인규명이나 살육의 참상 등은 팽개친 채 '자제'만을 축구했다.
 
1980년 5.18 기간 중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한 <전남매일신문>은 6월 2일 발행 재개를 앞두고 있었다. 사진은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대장(최종판 이전 검토·편집을 위해 만든 원장부)이다. 계엄사령부가 검열한 '빨간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왼쪽이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3면 대장, 오른쪽이 최종 인쇄본이다. '죽음의 거리에도 태극기 펄럭', '주인 없는 구멍가게에 돈 놓고 물건 가져가', '헌혈길 비극에 간 어느 여고생' 등의 제목과 기사가 사라졌다. 또 '광주유혈사태'는 '광주시위사태'로, '눈물과 피로 범벅됐던 광주'는 '눈물과 피로 얼룩졌던 광주'로, '응어리 씻게 신뢰회복 절실'은 '정부·국민 간 신뢰회복 절실'로 교묘하게 바뀌었다.
 1980년 5.18 기간 중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한 <전남매일신문>은 6월 2일 발행 재개를 앞두고 있었다. 사진은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대장(최종판 이전 검토·편집을 위해 만든 원장부)이다. 계엄사령부가 검열한 "빨간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왼쪽이 1980년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3면 대장, 오른쪽이 최종 인쇄본이다. "죽음의 거리에도 태극기 펄럭", "주인 없는 구멍가게에 돈 놓고 물건 가져가", "헌혈길 비극에 간 어느 여고생" 등의 제목과 기사가 사라졌다. 또 "광주유혈사태"는 "광주시위사태"로, "눈물과 피로 범벅됐던 광주"는 "눈물과 피로 얼룩졌던 광주"로, "응어리 씻게 신뢰회복 절실"은 "정부·국민 간 신뢰회복 절실"로 교묘하게 바뀌었다.
ⓒ 소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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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5월 19일부터 5일간 사설을 뺀 채 신문을 발행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양식이며 저항의 표시로 볼 수 있다.

『동아일보』는 5월 24일 「유혈의 비극은 끝나야 한다」는 사설을 처음으로 싣고 있다. 고딕체로 쓴 이 사설에서 "정부는 사태를 직시하여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며 미봉책은 금물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광주시민들의 자중자애를 요구코자 한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시민들이 이성을 잃지 않고 무기를 회수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양비양시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주석
19> 한국기자협회-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공편, 『80년 5월의 민주언론』, 80~81쪽, 나눔출판, 199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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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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