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01 12:10최종 업데이트 19.11.01 12:10
  • 본문듣기
 이주항은 빗자루로 '쓰윽 쓰윽' 담배꽁초와 먹다버린 음료수 병을 부지런히 쓸어 담았다. 주변이 공장지대여서 늘 쓰레기가 넘쳐나 그가 학교 안팎으로 새벽청소를 한 지도 벌써 20여 년이 넘는다. 매일 하는 청소지만 오늘은 더 세심하게 빗질을 한다. 오후 4시에 개교 30주년 기념행사가 잡혀있기 때문이다. 청소를 마칠 즈음에야 밤새 돌아가던 옆 공장 기계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주항은 스물아홉에 이 학교 부천실업고를 세웠다. 그는 한양대학교 80학번으로 1983년에 학교에서 민주화시위를 주동하고 구속되었다. 출소 후 노동운동에 뜻을 두고 현장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만난 두 사람은 그로 하여금 다른 인생을 살게 만들었다.


당시 스물이 안 되었던 영천이는 어머니와 동생 그렇게 셋이서 단칸방에서 살았다. 그런데 '프레스' 작업 중 손목을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는 사고 후 세상을 원망하면서 "언젠가는 배워서 성공할래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용접 견습공 승수는 월급 타도 외상값 갚고 나면 빈털터리가 돼 "짬뽕 한 그릇 먹고 싶다"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허름한 기숙사에서 언제나 때가 꼬질꼬질한 이불을 덮고 자는 신세였다.

그들을 보며 이주항은 "어린 노동자들을 위한 학교"를 떠올렸다. 근무가 끝난 아이들이 학력을 쌓고 노동자에게 필요한 힘도 기를 수 있는 작은 학교, 깨끗한 기숙사가 있어 피곤한 몸을 씻고 편히 쉴 수 있는 그런 야간 노동자 학교를 꿈꿨다. 
 

교장실에서 이주항 선생 교장실은 아마도 한국에서 제일 조그마한 크기일 것이다. ⓒ 민병래

 
그래서 89년에 뜻 하나만 가지고 부천시 고강동에 공장 건물 220평을 임대했다. 벽돌로 얼기설기 교실을 만들고 운동장은 옥상에 그물을 쳐서 만들었다. 신혼집 보증금을 빼고 생활은 부모님 집에 얹혀살기로 하면서 벌인 일이었다.

아내 박수주와 몇몇 동지들이 함께 뭉쳐 '부천실업고'란 이름도 짓고 '잘난 아이들'이라는 표어도 만들었다. 한 달 월급 20만~30만원을 나눠가지며 열정만으로 시작했다. 그로부터 30년, 총 27회 졸업생 617명을 배출했다. 돌아보면 그저 대견하고, 어떻게 버텨왔는지 모르는 세월이었다.

새벽 청소를 마친 이주항은 열쇠 꾸러미를 들고 지하 식당에서 7층 목공실까지 한층 한층 둘러본다. 밀링과 선반기계가 있는 실습실에서는 쇳내음이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폈다. 도예실 가마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여전하고 탁구장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까르르 떠다녔다. 오늘 개교기념식이 아니어도 7층까지 한 층 한 층 올라가며 이곳저곳을 쓰다듬고 어루만져보는 일은 이주항이 빼놓지 않고 하는 일과다.

열정 하나로 개교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학생 모집이었다. 그래서 현판식을 마치자 마자 강원도와 전라도 일대로 중학교를 찾아다녔다. 구로공단에서부터 안양, 부천까지 수도권 공장 지대를 돌면서 신입생 모집 포스터를 전봇대에 붙이고 다녔다. 찬 겨울 날씨에 풀이 얼고 손이 시려 발을 동동 구르며 한 작업이었다.

그런 노력으로 모은 신입생이 80명 정도. 이주항은 관리와 운영을, 다른 교사들은 수업을 맡았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삐긋거렸다. 아이들이 대개 오후 5시에 퇴근해서 5시 반이면 학교에 왔다. 모두 피곤한 몸이기에 첫 수업부터 애들은 책상에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안쓰러워 깨울 수도 없었다. 게다가 1교시가 끝나면 절반 이상이 오락실 등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교사들이 학교 주변으로 아이들을 찾으러 다녔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93년 1회 졸업생, 24명이 배출되었다. 희망을 본 듯했지만 잠시였다. 2, 3회는 졸업생이 모두 아홉 명에 불과했다. 처음 한 두 해는 열정이 있었다. 그래서 월급도 거의 없지만 버텨나갔다. 그렇지만 학생 모집도 안 되고 재정도 나아지지 않으니 학교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나갔다.

학교를 짓자

임대건물인데다가 운동장도, 변변한 교재교구도 없으니 아무래도 학생들이나 상담 왔던 부모들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주항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96년에 학교를 짓기로 결심했다. 큰 모험이었다. 부천시 오정동 공장지대에 있는 삼백 평 땅을 사서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부친에게서 받은 유산으로 종자돈을 삼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건축기금을 모금하면서 이주항과 교사들 그리고 졸업생들이 거의 직접 공사를 했다. 2회 고광배는 거의 살다시피 하며 다른 졸업생들과 함께 공사를 도왔다. 그런 어려움을 딛고 그해 10월 연건평 300평 정도 학교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고 결산해 보니 2억 정도 빚이 생겼다. 공교롭게도 공사 후 IMF가 닥쳐 이자가 치솟았다. 원금은 커녕 이자마저 계속 밀려 학교 건물이 경매에 넘어갈 처지까지 가버렸다. 그때 모든 교사들이 또 다시 허리띠를 졸라맸다. 얼마 안 되는 월급을 절반 정도만 받고 학교부채를 우선 갚기로 했다. 그 헌신 덕에 어려움을 겨우 수습했다. 그 후로 2~3년 마다 한번씩 증축공사를 하며 강당도 만들고 여러 실습실도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이주항 선생 그는 학교에서 작업복을 즐겨입는다. ⓒ 민병래

 
교사를 신축한 덕분에 '학력인정고교'가 되면서 재정이 조금 피었다. 정부에서 수업료와 교사 1인당 80만 원 정도 인건비를, 교육청과 부천시청에서 교재교구 구입비 등을 지원받았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고 학교는 한 걸음 한 걸음 모습을 갖춰갔다.

목공실에서 손바닥만한 교장실로 내려온 이주항은 기념식 인사말을 손보기 시작했다. 제목은 '헌사'였다. 선생님들에게, 후원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였다. 지금은 재학생 100여 명에 교사 15명 수준이 되었지만 교사들 월급은 여전히 여느 학교의 절반 남짓에 불과한 상황이다.

89년 개교 이래 만원씩 꾸준히 후원을 해준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지금도 한 달에 7백만 원 정도 후원금이 들어온다. 이런 헌신과 도움이 없었으면 '부천실업고'가 지금까지 버텨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가 쓴 인사말에는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빼곡했다.

쪽창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볕에 땀을 닦으며 원고를 수정하다 보니, 3시가 훌쩍 넘었다. 이제는 손님들을 맞이할 시간이다. 이주항은 인사말에 밑줄을 한 번 더 긋고 운동장으로 나서며 교문을 향했다.

운동장 마당은 볼수록 흐뭇하고 대견하다. 네 번이나 공사를 해서 땅도 잘 다져지고 평평해 물이 잘 빠진다. 비록 150평 정도 크기지만 아이들이 족구도 하고 농구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운동장과 함께 이주항이 제일 기뻤던 일은 2000년 증축 때부터 기숙사를 만든 것이다. 이혼가정, 조손가정, 오갈 데 없어진 아이들에게는 보금자리가 되었다. 기숙사가 있다 보니 중도 탈락도 많이 줄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이주항과 교사들이 하루 종일 부대끼며 살아야 했다. "천장에 물이 샌다. 화장실이 막혔다. 수돗물이 안 나와요." 등등. 몇 안 되는 교사들이 월급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숙직, 당직을 서야 하고 아이들이 보채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니 어려움이 정말 컸다.

동지같은 제자들

교문 앞에는 벌써 졸업생들 수다와 웃음이 한 가득이었다. 교문이라고 해봐야 달리 문을 만들어둔 게 아니다. 들어오는 길목을 다만 정문이라고 부를 뿐이다.

22회 강기형이 꾸벅 인사를 한다. 녀석은 야간 배달 일을 하다가 학교에 들러서 그냥 머무르고 간다. 6회 최원준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미용재료 유통업을 하는 그는 밤중에 차를 몰고 아무도 없는 학교에 다녀가곤 한다. 잠시 학교를 보고 가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단다.

4회 졸업생 전인섭도 달려와 손을 잡는다. 그는 노동만으로 성장한 '노가다'다. 학교 상수도가 고장 나자 얼어붙은 운동장을 파서 20분 만에 수리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학교를 지을 때는 고광배와 함께 보수 없이 현장을 끝까지 지켰다.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후배들을 돌봐줄 학교이니 내가 땀을 흘려야 한다"며... 모두 동지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제자들이다.
 

실습실에서 이주항 선생 밀링과 선반작업을 하는 곳, 그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공간이다. ⓒ 민병래

 
돌아보면 '어린 노동자 학교'를 내세우며 아이들을 키울 때 마음 아픈 순간이 많았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은 "회사에서 쌍욕해요, 청소시키고 빨래도 시켜요. 불꽃이 튀는데 안전모도 없어요" 라고들 말했다. 그렇지만 쫓아가서 항의하고 해결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주간학교로 전환하면서 기숙사를 없앴지만, 야간학교시절에는 한 달 12만원 하는 기숙사비가 몇 달씩 밀린 애들이 많았다. 부모에게 지원을 기대할 수도 없고, 연락조차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아이들을 그냥 거둬 먹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직장을 알아보고. 일을 하게끔 해야 했다. 그러면서 노동의 소중함,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고자 했다.

그런데 어린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지 않았고 조건이 안 좋았다. 그래서 아이들이 자주 상처를 받았다. 아이들이 그 아픔을 털어놓을 때는 그냥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학교에서나마 응어리를 털어놓을 수 있어 좋아들 했다.

"지금부터 이주항 선생님 인사 말씀이 있겠습니다". 오후 4시가 되어 기념식이 시작되었다. 소개를 받고 이주항은 천천히 일어났다. 운동장은 재학생과 졸업생, 후원자들로 가득했다. 고맙게도 89년 학교를 막 세우며 고생했던 분들도 자리를 해줬다. 얼마 전 대형마트 정육부 정규직이 되었다는 23회 이민지는 손을 마구 흔들었다.

공장지대에서 날아오르는 나비

8월 오후 햇살은 이주항의 얼굴을 붉게 비췄다. 토요일 오후지만 옆 공장들의 기계 소리는 계속 쿵쾅댔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섰다. 목이 메어서 인사말을 꺼내지 못하고 잠시 꾸물댔다. 그러자 졸업생 한 명이 "교장샘, 힘내요. 사랑해요"라고 외쳤다. 동시에 힘찬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이주항은 마음을 가다듬어 겨우 첫마디를 꺼냈다.

"부천실업고는 빛나는 출세나 자랑이 있는 명문학교가 아닙니다. 찌질한 눈물과 애틋함, 유쾌한 웃음이 있는 그저 그런 학교입니다. 개교 30년,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도 명문학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공교육이 자기들만 잘났다고 허세와 허풍으로 우리를 밀어낼 때 우리식 열정과 존중으로 우뚝 서겠습니다.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학교 복도에서 이주항 선생 하루 일과는 청소와 둘러보기로 시작한다 ⓒ 민병래

 
이주항이 거듭 감사 인사를 하자 모두 박수를 보냈다. 이주항의 눈시울이 조금 흐려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80년 겨레터야학에서 만나 동지처럼 함께 해온 아내 박수주, 20년 넘게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았던 김진호 선생, 1회 졸업생으로 기계과 교사를 맡고 있는 임인묵, 4회 졸업생으로 행정실을 책임지고 있는 김영순 등 모든 교사들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1회 졸업식 날은 눈물바다였다. 모두 교실 문을 붙잡고 "떠나지 않겠다"고 매달렸다. 어머니 같은 학교를 떠나지 않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마치 그날처럼 모두 눈물을 흘렸다. 지금 흘리는 눈물은 그동안 견뎌왔던 30년 세월에 대한 위로의 눈물이고 감격의 눈물이리라

기념식 마지막 순서, 재학생들의 노래차례다.

"날개를 활짝 펴고 세상을 자유롭게 날거야 노래하며 춤추는 나는 아름다운 나비 ..."

첫 소절이 운동장 위로 가파르게 퍼졌다. 그러자 모두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며 합창을 시작했다. 졸업생과 선생님, 이주항도 같이 노래를 불렀다. 부천시 오정동 공업단지, 토요일 오후지만 기계소리는 더 크게 쾅쾅 댄다. 그 소리를 벗 삼아 합창은 힘차게 뻗어나갔다.

기다렸다는 듯 8월 햇살은 그 합창을 잡아채듯 하늘 높이 끌어올린다. 세상을 향해 날아보고 팠던 어린 노동자, 학교에서 내몰린 아이들, 좋은 대학 들어간 아이들에게 주눅 들었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가졌던 한숨, 서러움, 배고픔이 어우러져 합창은 더욱 커져나갔다.

그 노래 사이에서 피어나는 서른 마리 나비, 하늘을 향해 활짝 날개를 편다. 학벌과 영어, 강남아파트와 '돈맥'으로 연결된 저 두터운 성벽을 서른 마리 나비는 가볍게 훌쩍 넘는다. 세상을 향해 자유로운 날개를 활짝 펴며 멋진 비상을 한다. 멋진 비상을!!!

<이주항이 기억하는 시간들> 
 

부천실업고 현판식 사진 1989년 부천실업고는 공장건물을 임대해서 시작했다. ⓒ 이주항제공

  

96년 학교를 신축할 때 이주항 선생 졸업생들과 교사들이 힘을 모아 거의 직접 공사를 했다. ⓒ 이주항제공

   

실습을 지도하는 이주항 선생 그는 특히 용접 지도에 능하다. ⓒ 이주항제공

   

손주를 안고 있는 이주항 선생 이주항의 딸은 학교에서 크다시피 했다. 지금, 딸은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고 엄마, 아빠를 존경한다. ⓒ 이주항제공

 
<못 다한 이야기>

1. 이 글은 개교 30주년 장면을 바탕으로 창작요소를 가미했습니다. 마지막에 '나는 나비' 합창은 EBS다큐 '학교의 고백 -부천실업고편'에서 참고를 하였습니다.

2. 89년에 개교한 부천실업고는 '야간노동자학교'로 운영하다가 2014년 주간으로 전환했습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농촌에서 올라 온 '어린 노동자'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교육에서 내몰린 아이들, 입시경쟁에서 밀려난 아이들을 품어주는 '작은 학교, 대안학교'로 '직업교육, 대안교육'중심으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http://www.jalani.or.kr)

3. 1989년 학교 설립시 초기 선생님들은 전사와 같은 선구자와 같은 열정으로 뛰었습니다. 그때 기여했던 선생님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 학교 이름 : 양국선
- 한무릅터·교훈 : 정용선
- 교가 : 안진선
- 잘난아이들 : 강홍구
- 방학캠프 등 : 황덕명, 조형수, 황철우
- 초대 ~3대 교감 : 안진선, 이수완, 김광화, 박말희, 이규
- 30년 근속 : 이주항 박수주
- 20년 이상 근속 : 최선희, 이종원, 박창일, 이원혁, 이효식, 김영순, 김진호
- 15년 이상 근속 : 조두만, 김성조, 장은주
- 5년 이상 근속 : 박정하, 박성숙, 이전주, 이현록, 한도훈, 민태순, 임인묵, 이승호, 양건호, 공영규, 송화원, 배하나, 송다정
- 식당 여러 여사님 : 신현순, 이계연
- 행정실 : 김상곤, 김영순, 이효식
- 현직교사 : 이주항, 박수주, 이종원, 이원혁, 김진호, 임인묵, 김민숙, 배하나, 유형곤, 송다정, 김일숙, 신경호, 최종웅, 김동영, 양윤지, 양국선, 박성숙, 김영순, 이효식, 정태연

4. 이주항 교장의 아내 박수주 선생은 서울대 사범대 수학과 출신으로 신림동의 한 중학교로 발령받았지만 6개월 만에 그만두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구로동에서 가리봉전자등을 다녔습니다. 80년 겨레터 야학에서 만난 이주항과 뜻을 같이해 학교를 세우고 30년간 부천실업고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5. 졸업생중에서 1회 임인묵은 특별합니다. 그는 밀링노동자로서 20년을 살았습니다. 공주 서북면이 고향인데 중3때 전교조 선생님 안내로 부천실업고에 왔습니다. 기계공장에서만 20년을 보냈고 교사를 증축할 때는 일요일에도 나와 청소하고 용접하며 기술을 발휘했습니다. 23년 동안 학교부근을 떠나지 않았고 인하공전 자동차학과에 다니면서 야간에는 후배들에게 선반,밀링을 가르치다가 2011년부터 정교사가 되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6. 4회 졸업생 김영순 그는 벌써 23년째 학교 행정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작지 않은 살림을 혼자서 야무지게 틀어쥐고 있습니다. 이주항 선생님에겐 더 없이 든든한 존재입니다. 김영순은 이주항 교장선생님에 대해 "가족처럼 따뜻하게 배려해주고 힘들 때는 많이 아팠니 하면서 위로해주고 아이의 기준으로 아이를 보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7. 야간 노동자 학교 시절. 아이들이 글짓기 수업에서 쓴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월급날, 벌써부터 기분이 째진다.
삼일 뒤는 월급날 기분이 더 째진다.
내일 모레는 월급날 기분이 완전 업 됐다.
내일은 월급날 정신 줄을 놓기 시작했다.
오늘은 월급날
받은 돈은 구만 육천 백 팔 십 원 기분이 잡친다.

8. 아이들이 학교에 대한 기억과 평을 육성으로 몇 개 소개합니다
-- 26회 졸업생 김민규 : 작지만 커다란 사랑이 존재하는 부천실업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훌륭한 선생님들의 배려와 가르침으로 생각이 깊고 넓은 사람으로 성장한 것 같다.
-- 29회 임유진 : 제가 여기와서 놀란 점은 학교를 학생들만 청소를 하고 꾸려가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도 학교를 청소하시고 학생을 편하게 대해주시는 점이었습니다.
-- 3회 졸업생이며 동문회장인 강충훈 :학교가 마음의 고향이며 어머니 같다.

<이주항의 프로필>

1961년 서울출생
1985년 한양대 공과대학 졸업
1989년 부천실업고등학교 설립
2019년 현재 부천실업고등학교 설립자 및 교장

 <이주항의 B컷> 
 

교장실에서 이주항 선생 그의 집무실은 세상에서 제일 작은 교장실이다. ⓒ 민병래

   

실습실에서 이주항 선생 밀링과 선반이 있는 실습실, 그가 애착을 갖는 공간이다. ⓒ 민병래

   

용접실 앞에서 이주항 선생 그는 용접지도에 능하다. ⓒ 민병래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