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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근대' 개념으로 유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것이 빠른 속도로 소비되고 폐기되는 현대 사회를 '유행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뉴스도 예외가 아니다. 어제 날짜 신문이 오늘은 쓰레기가 되고 마니까. 특히 종이신문에 담긴 정보가 '낡은' 것이 되는 데는 채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이런 속도의 시대에 며칠 전 서점에서 30년 전 월간지 기사 34개를 모아서 엮은 <오래된 비판-그 후 30년>이라는 책을 보게 됐다. 전통이 귀한 시대에 전통이 주는 참신함이랄까, 그런 역설적인 느낌에 책을 구해서 읽고 서평을 쓰게 됐다.

30년 전 기사 모음집 서평을 쓰는 이유
 
30년전의 월간<말>에 실린 기사를 모아서 만든 책 <오래된 비판-그 후 30년>. 강준만, 김민웅, 백기완, 오연호 등 34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30년전의 월간<말>에 실린 기사를 모아서 만든 책 <오래된 비판-그 후 30년>. 강준만, 김민웅, 백기완, 오연호 등 34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 최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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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직 기자들이 모여서 만든 진보적시사지 월간 <말>에 실린 기사를 묶은 책 <오래된 비판-그 후 30년>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칼럼을 쓰는 강준만, 김민웅, 서재정을 비롯하여 백기완, 김중배, 오연호 등의 유명인사가 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하루만 지나도 '낡은'(혹은 쓸모없는) 것이 되기 쉬운 게 기사인데, 나는 지금 왜 30년 전 기사를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려 할까?
 
30년 전에도 존재하고 지금도 존재하는 문제. 그러니까 오래된 사회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본질과 비본질을 나누는 건 권위적인 태도로, 필연적으로 또 다른 배제 즉 누구가의 고통이 구조적으로 외면되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여러 사회 문제의 원인이 되는 보다 근본적인 모순이 존재할 수 있으나, 그것의 경중을 매기는 것은 잘못이라는 거다.
 
또한 사회 문제가 시대의 물질 조건에 의해 규정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상기한다면, 지난 30년간 일어난 (생산)자동화와 (시장)세계화는 표면적으론 유사해 보일지 몰라도 정치, 사회, 경제, 심지어 민족 문제의 구체적 양상까지 바꿔 놓았을 거라고 보는 게 옳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완벽한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방법론보단 그들의 '꿈'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꿈'이란 30년 전 진보언론인들이 머지 않아 만나고 싶었고 결국 만날 거라고 믿었던 변화한 세상이다. 
 
그 세상은 2019년을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값진 것이다. 당시 그들은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자주, 경제 민주화, 친일 잔재 청산, 언론자유, 성평등,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를 꿈꿨는데 이 중 무엇은 우리 젊은 세대의 '꿈'이기도 하지 않을까.
 
과거 세대의 꿈, 그리고 우리의 꿈
 
그러나 비슷한 꿈을 꾸면서도 언론인으로서 현재를 조망하고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려는 열망은 30년 전 기자들에게 훨씬 더 두드러져 보인다. 그들은 수많은 사회문제에도 불구하고 조직화된 '시민 사회의 힘'을 토대로 진보한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정부보다 사회를 향해 호소했으며, 정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을 변화의 주체로 봤다.
 
반면 요즘 기사들은 "슬프지만 냉소할 수밖에"라는 말로 요약된다. 매일 매일 한국사회 모순의 단면들을 보도하고, 이것이 얼마나 비극적인지에 대해 말하나 그뿐이다.

요즘 언론은 정치 권력을 지탄할지언정 시민 사회에 호소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 이유는 추측하건대 사회가 그럴 만한 능력 혹은 의지가 없다고 보기 때문 같다. 사회의 힘을 낮게 평가할수록 사회 변화를 비관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런 탓에 당신들 중 누가 변화의 '타당성' 말고 '가능성'을 믿는지 모르겠다.
 
이런 시대에 <오래된 비판>이 갖는 가치는 책의 행간에서 "한국 사회는 그간 얼마나 진보했나?" 하고, 독자에게 질문한다는 점이다. 이건 비단 노동, 경제, 민족 문제에만 국한되는 질문이 아니다.
 
30년 전 김민웅 교수는 <말> 지에 베트남 파월부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한 글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그 역사적 진실'을 기고했다. 그런데 얼마 전 <한겨레21>도 특집으로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중 자행한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사과할 것을 촉구하는 기사를 실었다. 이는 한국이 '마땅히' 해야 할 사과조차 30년 동안 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한국사회가 얼마나 진보했는가 묻는 일은, 상황이 이런데도 사회의 진보를 '시간'에 맡겨두고 있진 않은지, 그리고 우리는 변화에 대해 열정을 잃어도 괜찮을 만큼 진보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는 점에 의미 있다. 즉 한국사회는 별로 변하지 못했고 여전히 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이 말은 식상한 면이 있지만 그럼에도 중요하다.
 
199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는 누군가 "운동(movement)을 한다"고 말하면, "무슨 운동(exercise)?" 하고 묻는 시대에 살고 있다. 대학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극소수에 불과해 '운동권'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하다.

그래서 운동권 전성기를 주도했던 30년 전 진보청년들은 이제 기성세대가 되어, 젊은이들이 계급문제와 민족문제를 외면한 채 정체성정치에만 매달린다고 지적한다.(젊은 세대가 반대의 비판을 할 수 있음에도 말이다!) 더 나아가 개인의 이익 말고는 별관심이 없는 이기적 세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람들이 지금은 운동하기에 좋은 시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변화를 위한 제 몫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답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던 내 또래 90년대 생의 목소리를 기억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세대의 가능성을 폄하하지 말고, 우리를 향해 변화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90년대 생인 내가 배워야 할 것  
나는 이 책에서 느껴지는 30년 전의 열기가 부러웠다. 당시 6월항쟁을 통해 민주화라는 성취를 이룬 시민사회는 '진보의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았고, 그래서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열정적으로 사회변화를 꿈꾸며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사람이고자 하는 헌신적인 사람들은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기에 요즘은(대학가에서는) '올바름'에 대한 논의만 활발할 뿐, 실천을 고민하는 이들은 적다. 또한 진보언론 역시 관조적 태도로 부조리한 세상을 비판할 뿐이라는 인상을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몸담은 사회를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변화의 가능성을 냉소하는 소극적인 사람들의 사회만큼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곳도 없다. 바우만이 말하듯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어렵다고 해서 포기한 채 사는 것만큼, 기득권을 즐겁게 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30년간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고 해도, 앞으로의 30년은 다를 거라고 믿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시민사회를 응원해 그 믿음이 가능하게 하는 게, 언론이 외면해 온 그들의 몫이다. 30년 전 <말> 지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냉소가 만연한 이 시대에 부족한 건 분석이 아니며, 우리가 배워야 하는 건 진보를 향한 열정임을 기억하자. 동시대의 사람들과 나의 변화를 응원하며, 마지막으로 30년 전의 지식과 열정 그리고 꿈이 담긴 <오래된 비판>의 서문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아직 젊은 시절의 유토피아를 찾지 못해 답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386세대에겐 과거의 초심을 떠올리게 하는 책,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젊은 세대에겐 세대소통의 징검다리가 되는 책이 되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1986년에 창간된 <말>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해직기자가 모여서 만든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기관지로 시작했고, ‘민족 민주 민중언론을 향한 디딤돌’을 표방한 그 시절 대표적 진보시사지이다.


오래된 비판 - 그 후 30년

강준만, 김민웅 (지은이), 말+(말플러스)(2019)


태그:#오래된 비판, #월간 말, #90년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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