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며칠 전, 생일이 지났다. 한 해 한 해 갈수록 생일을 챙긴다는 게 민망해 별일 없이 조용히 넘어가곤 한다. 그래도 용케 기억하고 건네주는 선물이 싫진 않으니, 영락없는 속물이라 해야 할까. 아니, 이런 게 바로 '소확행' 아니겠냐며 괜한 변명을 해 본다. 

한 친구는 스마트폰 메신저 앱을 통해 선물을 보냈다. 세상 어찌나 편리한지, 이제 서로의 주소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선물을 받을 사람이 구매처에 직접 주소를 입력하면 끝. 그렇게 친구의 마음이 담긴 립밤이 이틀만에 내게 도착했다. 마침 필요했던 터라 고마운 마음으로 냉큼 받았다. 

아무리 작은 물건이어도 제품만 덜렁 올 순 없다. 립밤이 담긴 택배상자는 과분하게 컸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립밤은 또 한 번 플라스틱 소재로 개별 포장이 되어 있었다. 질소를 샀더니 과자가 서비스로 온 격이랄까. 내용물보다 포장이 컸고 그 포장재들은 모두 쓰레기일 뿐이었다(물론 분리수거는 했다).

터치 몇 번이면 물건을 구매하고, 또 선물을 주고받는 편리함. 과연 실컷 누리기만 하면 되는 걸까. 수령 즉시 버려지는 포장재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차라리 친구를 직접 만나 밥이나 한 끼 했다면 어땠을까. 그 편이 정을 주고받는 더 살가운 방법은 아니었을까.

'쓰레기 덕후 소셜 클럽'의 이야기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책표지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책표지
ⓒ 슬로비

관련사진보기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의 저자는 십년 간 환경단체에서 일하며 크고 작은 성과들을 이뤄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과 지구를 더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어느 새 너무 지쳐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일을 그만두니 일상과 더 가까워졌고, 이제 플라스틱이 그녀의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고. 

일을 그만뒀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벌이는 활동들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화장품 미세플라스틱 반대 운동, 매장 내 일회용 컵 사용 모니터링, 알맹@망원시장 등등. 소속만 없어졌을 뿐, 열정이 사라진 건 아닌 게 분명하다. 책날개엔 저자가 쓰레기를 덕질하는 '호모 쓰레기쿠스'로 소개되는데, 그 이름 들을 만하다. 

책에 따르면, 2013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만 약 190억 장의 비닐봉지가 쓰였다고 한다. 하루에만 5200만 장이 사용된 것으로 대한민국 인구보다 많고, 돈으로 치면 6천억 원, 온실가스로 치면 260만 톤을 배출한 양이라고. 비닐봉지만 계산한 것이 이 정도니 플라스틱 전체로 확대해서 보면 어마어마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다.

그 방대한 양의 플라스틱을 쓰면서 우리의 삶은 보다 행복해졌을까. 저자는 빨리빨리와 효율성에 잠식된 우리 사회는 급기야 물건과 사람마저 일회용품 취급하기까지에 이르렀다고 꼬집는다. 지금도 고층 빌딩 신축공사 현장에서 추락으로 사망하는 노동자가 1년에 약 300명이라니, 비통하기 이루 말할 데 없다. 

뿐인가. 오늘 주문한 식재료가 다음날 새벽이면 문 앞에 도착하는 시스템은 편리하지만, 저자는 우리가 외면하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야간 노동은 국제암연구소가 지정한 2급 발암 요인이라는 것. 오직 신속함과 효율성만을 좇은 끝에 우리 곁엔 쓰레기와 죽음, 소외가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일회용 플라스틱 반대는 서로의 삶에 말을 걸고 시간을 들이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그저 쓰레기를 줄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삶의 속도를 늦춰 보통의 일상과 다른 사람의 안녕과 지구의 건강을 챙기는 여정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는 빨리빨리와 효율성에 잠식된 우리 사회의 시간을 늦추고, 다른 삶의 방식이 가능한 사회를 요구하며 따르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삶의 방식과 속도를 원한다. 그리고 그 길은 세상의 어떤 물건도, 어느 누구도 쓰레기로 취급하지 않는 삶에 있다."(46-47쪽)

저자는 종류에 따라 유해성이 다르긴 하지만, 백퍼센트 안전한 플라스틱은 없다고 말한다. 플라스틱을 만들 때 사용되는 수백 종의 첨가제 중엔 유해물질이 있고, 결국 플라스틱은 생산부터 폐기까지 모든 과정에서 유해물질이 나온다는 것. 플라스틱은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우리 몸에 들어오기도 한다. 

플라스틱은 쉬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플라스틱 없는 삶>을 재인용하자면, 바닷새 중 90퍼센트 이상의 소화기관에서 플라스틱이 발견된다고 한다. 인간 또한 이에 자유롭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흔히 환경호르몬이라고 불리는 '내분비계 장애물질'은 대부분 합성화학 제품에서 나온다고 한다.

저자는 플라스틱을 아예 없앨 수는 없다고 인정한다. 플라스틱 덩어리인 노트북도, 안경테도 필요하니까. 하지만 일회용 플라스틱 없이는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2002년에서 2014년 사이 전세계 플라스틱의 45퍼센트가 포장용으로 사용됐다고 하니, 이것만큼은 줄일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물론, 개인적인 노력이나 착한 소비만으로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80퍼센트 이상의 쓰레기는 가정이 아니라 건설 현장과 공장에서 나온다고 하니 말 다했다. 당연히 플라스틱을 취급하는 정부와 관련 업계의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니 더욱 개인이 모여 큰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 지당하다.

그녀는 이 책이 '쓰레기 덕후 소셜 클럽'의 이야기라고 말한다. 특정한 단체나 네크워크가 있어 모인 것도 아니고, 그냥 좋아서 모인 '덕후'들의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일이 어찌나 근사하고 알찬지, 이런 덕후라면 한 번 되고 볼 일이지 싶다. 

플라스틱프리, 모두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으면

나도 지구에 해만 끼치고 가는 건 아닐까 싶어 나름의 노력을 한다. 대형마트의 배송 서비스는 편리하지만, 괜한 탄소발자국을 늘리지 않기 위해 삼가는 편이다. 대신 전통 시장을 자주 이용하고, 그때마다 장바구니는 잊지 않는다. 비닐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지만 혹시 쓰게 되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재사용한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것 투성이다. 더군다나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하는 이 '덕후'들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기만 할 뿐. 하지만 무언가 하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둔다. 주제넘게 바라건대, 모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노력했으면 한다. 한 번 사용하고 버리는 것을 '쿨함'으로 여기는 일만은 없었으면.

저자는 책에 TMI가 넘쳐난다 했지만, 쓸데없는 정보는 없었다. 덕분에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또 안일했는지 깨닫기도 했다. 책 후반부에 부록처럼 실린 '플라스틱 프리 매뉴얼'엔 각자가 일상에서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알짜배기 정보들이 그득 담겼으니, 더욱 반갑다. 덕분에 천연세제 '세스퀴소다'라는 걸 처음 알았다.

책은 '플라스틱 프리'를 실천하기 위한 과정과 방법들을 담았지만, 뜻을 가진 개인이 새로운 조직을 꾸리고 활동할 수 있는 팁도 얻을 수 있다. 일회용의 허망함을 벗어나 나와 내 이웃과 지구를 더 사랑하고 싶은 사람은 물론, 세상에 좋은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방법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적극 권하고 싶은 책이다.
 
"플라스틱 프리 생활은 플라스틱의 특징과 정반대 스타일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자신과 주변을 천천히 음미할 시간, 아날로그와 핸드메이드를 몸으로 배우고 익히는 문화, 소유한 물건이 아니라 관계와 내재적 가치를 중시하는 자세, 성별에 상관없이 맞살림으로 서로서로 돌보는 소문자의 일상. 바로 한 번 쓰고 버리는 삶의 대척점에 있는 모습이다."(20쪽, 들어가며)

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 쓰레기 사회에서 살아남는 플라스틱 프리 실천법

고금숙 (지은이), 슬로비(2019)


태그:#우린 일회용이 아니니까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