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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78〉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뒷면. 지름 21.2cm.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진179〉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는 이런 동심원 무늬가 모두 여덟 개 있다.
 〈사진178〉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뒷면. 지름 21.2cm.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 〈사진179〉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는 이런 동심원 무늬가 모두 여덟 개 있다.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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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세문경은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을까

〈사진178〉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는 〈사진179〉 같은 동심원 무늬가 동서남북에 두 개씩 모두 여덟 개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 동심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밝혀내지 못한 상태이다. 그저 동심원 내지는 원권문이라 할 뿐이다. 이 동심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밝히기에 앞서 우리는 이 동심원 무늬를 통해 이 거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거울을 만든 방법으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무른 돌 활석에 무늬를 새기고 그 위에 밀랍을 녹여 덮은 다음 밀랍이 식은 뒤 무늬가 복사된 밀랍 모형을 떠낸다. 그런 다음 거기에 진흙을 씌우고 불에 올려 밀립을 녹여내 진흙 거푸집을 얻는다. 이 진흙 거푸집에 청동을 녹여 부어 거울을 만든다. 이런 방법으로 거울을 만드는 방법을 밀랍주조법이라 한다.

둘째, 고운 모래와 진흙을 이겨 살짝 굳힌 다음 거기에 무늬를 새겨 거푸집을 만들고, 이 거푸집에 청동을 녹여 부어 거울을 만든다. 이것을 사형(砂型 모래사·거푸집형)주조법이라 한다. 셋째, 무른 돌 활석에 바로 문양을 새기고 이것을 거푸집 삼아 여기에 청동 물을 부어 거울을 만든다. 이것을 석제주조법이라 한다. 2007년 이완규 주성장이 바로 이 석제주조법으로 다뉴세문경을 재현했다.

이 세 방법 중에 어떤 방법으로 만들었을까. 그 실마리는 〈사진179〉 동심원에서 한가운데 두 원에 있다. 이 동심원에는 원이 모두 23개 있는데, 가운데 두 원을 보면 뭔가 엉성하다. 이 동심원을 그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톱니가 21개 달린 컴퍼스를 가운데에 찔러 넣고 빙 돌렸다. 그러면 원 21개가 그려지는데, 컴퍼스를 빼고 나면 컴퍼스 고정쇠를 찔렀던 자리가 움푹 들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때 청동기 장인은 그곳을 뭉툭한 나무로 잘 메우고 가는 무늬새기개로 직접 두 원을 그렸다. 그래서 이렇게 엉성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청동기 장인은 무늬를 활석(무른 돌)에 새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무른 돌이라 하더라도 무늬새기개로 돌에 저렇게 작은 원 두 개를 새기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첫 번째 밀랍주조법과 셋째 석제주조법은 아니다.
 
〈사진180〉 2007년 이완규 주성장이 석제주조법으로 다뉴세문경을 재현했다. 석제로는 활석을 썼다. 가장 왼쪽 사진을 보면 원 한가운데 중심점을 잡았다. 여기에 21개 톱니가 있는 컴퍼스를 고정하고 빙 돌리면 동심원이 새겨진다. 하얀 가루는 활석가루다. 활석은 이렇게 무른 돌이고 그 입자가 아주 곱다. 가장 오른쪽 사진을 보면 컴퍼스 고정 쇠를 찔러 넣었던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완규 주성장이 재현한 다뉴세문경에는 원 중심에 콩알만 한 점이 볼록 튀어나와 있다. 이것은 청동기인이 활석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이완규 주성장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활석 거푸집을 쓴 까닭은 무늬가 세밀하게 나올 수 있는 거푸집은 활석 말고는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180〉 2007년 이완규 주성장이 석제주조법으로 다뉴세문경을 재현했다. 석제로는 활석을 썼다. 가장 왼쪽 사진을 보면 원 한가운데 중심점을 잡았다. 여기에 21개 톱니가 있는 컴퍼스를 고정하고 빙 돌리면 동심원이 새겨진다. 하얀 가루는 활석가루다. 활석은 이렇게 무른 돌이고 그 입자가 아주 곱다. 가장 오른쪽 사진을 보면 컴퍼스 고정 쇠를 찔러 넣었던 자리가 우묵하게 들어가 있다. 그래서 이완규 주성장이 재현한 다뉴세문경에는 원 중심에 콩알만 한 점이 볼록 튀어나와 있다. 이것은 청동기인이 활석을 쓰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한다. 이완규 주성장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활석 거푸집을 쓴 까닭은 무늬가 세밀하게 나올 수 있는 거푸집은 활석 말고는 불가능했기 때문일 것이다.
ⓒ 이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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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둘째 방법 사형주조법으로 보는데, 학자들이 지금까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법을 한번 가정해 본다. 먼저 아무리 고운 모래와 진흙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세밀한 무늬를 새기기 힘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모래와 진흙이 아니라 활석을 문질러 가루를 내고(파우더의 원재료가 바로 이 활석이다), 이 가루를 기름(식물성 내지는 동물성 기름)에 이겨 무늬판을 만들었을 것으로 본다. (〈사진180〉 참조. 활석 가루는 물을 흡수하지 못한다) 여기에 도토리 가루를 좀 넣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야 굳었을 때 갈라지지 않는다. 이 무늬판이 살짝 굳었을 때 그 위에 자와 컴퍼스를 써서 무늬를 새기기 않았을까, 이렇게 짐작해 본다.
 
〈사진181〉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동심원
 〈사진181〉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동심원
ⓒ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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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원 여덟 개는 도대체 무엇일까?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서 동심원은 한 쌍씩 네 군데에 모두 여덟 개 있다. 우리 학계에서는 이 동심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단지 '동심원' 내지는 '원권문'이라 할 뿐이다. 그런데 딱 한 군데에 이에 대한 의견이 있어 아래에 옮겨본다.
 
거울에 보이는 여덟 개의 동심원문은 여덟이라는 숫자가 고대에서 많음, 풍부함 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풍요, 다산(多産)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이건무·조현종 《선사유물과 유적》(솔, 2003), 176쪽.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런 해석은 근거가 없고 무늬를 보는 방법도 옳지 않다. 고대 무늬를 볼 때는 총체로 봤을 때 서로 맞물려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이런 해석은 그야말로 생뚱맞기 그지없다. 보통 한 해 열두 달 가운데 팔월은 곡식과 열매를 거둬들이는 달이다. 그래서 흔히 팔월을 풍요와 다산의 달로 보고, 한 해 삼백육십일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덟 개 동심원을 이렇게 해석을 한 것 같은데, 이런 관념은 청동기 이후 논밭 농사를 본격으로 짓기 시작한 철기시대부터 생겨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뒤에 자세히 논하겠지만 빗금을 보면 크게 삼각형 밑변에 평행으로 그은 선과 사선으로 그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밑변에 평행으로 그은 삼각형은 구름(云)이고 나머지 빗금은 비(雨)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여덟 개 동심원은 이 구름이 나오는 기원이다. 나는 이것을 천문(天門)으로 보고, 신석기시대부터 쭉 이어져 온 세계관이라고 말해 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주드림에도 보냅니다.


태그:#국보제141호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 #다뉴세문경 동심원, #김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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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말에는 저마다 결이 있다. 그 결을 붙잡아 쓰려 한다. 이와 더불어 말의 계급성, 말과 기억, 기억과 반기억, 우리말과 서양말, 말(또는 글)과 세상, 한국미술사, 기원과 전도 같은 것도 다룰 생각이다. 호서대학교에서 글쓰기와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childk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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