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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
 불의한 국가폭력에 저항하는 시민군을 형상화한 ‘무장항쟁군상’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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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1980년 5월 22일 계엄군을 시외곽으로 몰아낸 날로부터 탱크로 몰고 다시 쳐들어온 계엄군에 진압될 때까지 5일 동안 해방구였다.

우리 역사상 해방구는 흔치 않았다. 1894년 2월 전봉준ㆍ김개남 등 지도자들에 의해 호남 일대가 해방되고 각 고을의 관아 안에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다.

고을에서 인덕과 명망이 있는 1인의 집강을 세우고 그 아래 서기ㆍ성찰ㆍ집사ㆍ동몽 등의 임원을 두어 각 지방의 대민 행정업무를 처리케 했다. 군수나 현령ㆍ현감이 그대로 있었으나 형식적인 지위에 불과하고 동학군에서 임명한 집강소가 사실상 지방행정을 주도했다.
 
 전봉준의 잡혀가는 모습.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것을 재촬영하였다.
 전봉준의 잡혀가는 모습.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전시된 것을 재촬영하였다.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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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이 패퇴하면서 집강소도 막을 내렸다. 짧은 기간이어서 집강소가 근대적 정부수립이나 자치의 기능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역사적 의미는 적지않다.

세계사적으로 가장 돋보이는 자치는 프랑스혁명 후에 나타난 파리꼬뮨이 꼽힌다.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는 할아버지의 후광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되고 할아버지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제2제정의 황제가 되었다. 얼마 뒤 프로이센과 전쟁을 일으켜 패배하기에 이르렀다. 파리 시민들은 루이황제를 폐위시키고 제3공화국을 선포하면서 국민방위군을 결성, 프로이센군대와 맞섰으나 막강한 정규군을 당해내기 어려웠다.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국민의회를 구성했는데 60% 의석을 차지한 왕당파 의원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굴욕적인 조약체결에 앞장서고 왕정복고를 획책했다. 공화파는 20%의 소수 의석이지만 파리선거구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왕당파의 음모에 맞섰다.

1789년 프랑스혁명을 주도했던 파리시민들이 다시 궐기하고 다수의 노동자들이 합세하여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로 파리꼬뮨(Paris Commune)이 구성되었다.

파리꼬뮨은 자치관제와 자체방위군을 유지하면서 자치활동을 진행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군이 파리시내로 진입하자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싸웠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일주일 동안 잔인한 학살극이 자행되어 2만여 명이 사망했다. 파리꼬뮨이 구성되는 날  『인민의 외침)』은 <축제(La féte)>라는 표제의 논설을 실었다.

꼬뮨이 선언되는 날, 그것은 혁명적이고 애국적인 축제의 날, 평화롭고 상쾌한 축제의 날, 도취와 장엄함 그리고 위대함과 환희에 넘치는 축제의 날이다. 그것은 1792년의 사람들을 우러러본 나날에 필적하는 축제의 하루이며, 제정 20년과 패전과 배반의 여섯 달을 위로해 준다.……

꼬뮨이 선언된다.

오늘이야말로 사상과 혁명이 결혼하는 축전이다.
내일은, 시민병 제군, 어제밤 환호로 맞아들여 결혼한 꼼뮨이 아기를 낳도록, 항상 자랑스럽게 자유를 지키면서 공장과 가게의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승리의 시(詩)가 끝나고 노동의 산문이 시작되다. (주석 21)

 
 헌혈을 위해 병원에 몰려든 시민들과 의료진
 헌혈을 위해 병원에 몰려든 시민들과 의료진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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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꼬뮨을 소개한 것은 해방광주의 자치활동과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광주의 해방기간은 짧아서 선거를 하거나 행정기관을 접수하는 일은 없었지만, 시민들의 자치활동은 놀라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상당수의 시민이 무장한 상태에서도 단 한 건도 은행이나 금은방, 백화점이 털리는 일이 없었다. 시민들끼리의 사적 감정이나 보복 같은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눔과 협동의 공동체가 형성되고 시민군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었다. 총상이나 대검에 찔린 환자들은 옆의 중상자를 먼저 치료하라고 양보하고 헌혈자가 넘쳐 혈액이 남아돌았다.

항쟁지도부가 '민투'를 조직하면서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갖추었다. 각 부서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기동타격대로 재조직된 무장병력(시민군)은 시내순찰과 계엄군의 동태파악ㆍ치안유지 등의 임무를 맡고, 위원장은 총괄적인 업무관할, 내무담당은 도청내부 문제와 고인 장례문제 관활, 외무담당은 일반 수습위와 함께 계엄사 협상 담당, 대변인은 기자회견 및 집행부의 대외 공식적인 발표, 기획실은 지도부의 제반업무 및 기획, 조사부는 치안질서 위배자 조사, 보급부는 식량조달 및 식사공급 등을 맡아 직무를 수행했다.
  
 광주 양동 시장 상인들이 시민군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다.양동시장은 5·18 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 양동 시장 상인들이 시민군들을 위한 밥을 짓고 있다.양동시장은 5·18 민중항쟁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 5.18 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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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조직체계의 활동도 있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원과 헌신이 자치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한 사례를 소개한다.

양동시장에서 명태장사를 하던 김양애는 주변에서 쌀을 거둬 김밥을 만든 다음 리어카에 싣고 도청에 가져왔다. 부녀회장을 맡고 있던 그녀는 아들을 찾으러 도청에 갔다 학생들이 배를 곯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거둬 밥을 지었다. 쌀이 순식간에 한 가마니나 걷혔다. 양이 많아 식당에서 밥을 쪄내고 양동시장 아낙네들을 모아 김밥을 쌌다. 필요한 재료는 양동시장에서 즉시 구할 수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물건을 스스로 내주었을 뿐 아니라 일을 도와주었다. 양동시장 다른 한쪽에서는 태극기를 만들고, 계란과 물을 준비하여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시민군들에게 나눠주었다.

도청의 시민군들은 몹시 배가 고파 쌀 한가마니 분량의 김밥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녀는 '학생수습위원'이라는 어깨띠를 매고 시신을 관리하는 아들 박병규(19세, 동국대 1학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여기 있다 어떤 변을 당할지 모르니 집으로 가자"며 아들의 손을 끌었다. 아들은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그곳에 남았다. 그는 27일 새벽 계엄군의 M16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주석 22)


주석
21> 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꼼뮨까지』, 284쪽, 까치, 1980.
22> 황석영 외, 앞의 책, 383~38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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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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