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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치.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나 얼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이 단어는 주로 '없다'와 만나 분노로 이어지곤 한다. '염치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염치'란 단어가 원래 갖고 있는 사회적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말]
이래도 되나 싶었다.

껌을 입에 넣다가 멈칫했다. 법정이었다. 방청석 규모는 100여 석. 반짝거리는 대리석 벽에 붙어 있는 법원 마크가 도드라졌다. 그 벽을 배경으로 판사들의 자리, 법대가 있었다. 그로부터 열 걸음 정도나 될까. 맨 앞 방청석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법대의 길이는 족히 10미터는 넘어 보였다.

간간이 들리는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렸다. 법정의 정적은 넓고도 깊었다. 방청석에 있던 어린 아이의 칭얼대는 소리가 반갑게 들릴 정도였다. 울산지방법원 301호, 지난 9월 20일이었다. 오전 10시 10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11형사부 박주영 부장판사(51세)가 다른 판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 날은 선고일이었다.

그 막장 같은 1시간 43분... 궁금했다
 
 지난 9월 20일 울산지방법원 301호 모습.
 지난 9월 20일 울산지방법원 301호 모습.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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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 상해 혐의로 기소된 세 번째 피고인은 덩치가 좋았다. 불구속 상태였던 그의 상·하의는 모두 검은색. 그는 열중 쉬어 자세였다. "징역 4년" 선고가 끝나기도 전에 돌아섰다. 박 판사가 경고하듯 말했다. "잠깐 계세요." 박 판사의 목소리가 앞서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차가웠다. 건조하게 던지는 한 마디마다 법정의 정적이 툭툭 끊어졌다.

그 틈 사이로 다음 피고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혐의는 미성년자 강제추행, 그 다음은 강간, 다음은 음란물 제작 배포, 그리고 또 강간, 사기, 강간... 채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앉아있기 힘들었다. 박 판사는 자신의 책 <어떤 양형 이유>에서 "법정은 모든 아름다운 구축물을 해체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 이유가 조금 실감이 났다.

열두 번째 피고인은 양복 차림이었다. 그의 두 손은 무척이나 공손했다. 앞에 가지런하게 모은 그 손으로 그는 나이 어린 피해자들을 '헤드락'했고 성추행했다. 박 판사는 책에서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법정으로 오면 된다"고 했다. '막장'이라고도 표현했다. 그 안에서 오랫동안 탐욕의 끝을 목격한 노동자로서 그는 정의를 이렇게 규정했다.

"대체로 정의는 열려 있고 부끄러움을 안다. 닫힌 입장은 불의의 영토거나 중간지대쯤이다. 독선과 아집은 설령 그것이 정의라 하더라도 사방이 천길 낭떠러지다... (중략) 정의는 염치를 안다. 나를 생각하듯 타인의 입장도 생각해야 한다. '내로남불'의 행동은 정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날 오전 공판에 나타난 피고인은 모두 열세 명이었다. 박 판사가 책에 썼듯 "황홀한 불빛을 향해 온몸을 내던진 부나방들의 잔해"가 1시간 43분만에 모두 사라졌다. 그는 이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보냈다. 이 팍팍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그는 왜, 자신의 '양형 이유'를 쓰는데 그렇게 공을 들이는 걸까.

책에 소개한 한 가정 폭력 사건의 양형 이유 마지막 문장은 "폭력이 난무하는 곳보다 더한 공적 영역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교수의 성추행 사건 판결에서는 "타인의 몸을 자유롭게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 타인 뿐"이라는 명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막장 바깥 세상에 대한, 그래도 어떤 기대가 없다면 하기 어려운 행위들로 읽혔다.

그래서 다시 몇 가지 질문을 담아 이메일을 보냈다. 돌아온 답장을 프린터로 인쇄하니 A4 용지 11매였다. 사실, 모두, 그대로 싣고 싶었다. 분량상의 문제로 상당 부분 들어냈지만, 표현은 원문 그대로를 살렸다.

나와 사회를 향한 '옐로 카드'... 양형 이유
 
 박주영 판사의 사무실 모습. 옷걸이에 '대충' 걸려 있는 수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책을 통해 "격무를 하소연하는 게 아니다, 재판의 부실화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라며 판사의 노동 여건에 대해서도 전한 바 있다.
 박주영 판사의 사무실 모습. 옷걸이에 "대충" 걸려 있는 수건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책을 통해 "격무를 하소연하는 게 아니다, 재판의 부실화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라며 판사의 노동 여건에 대해서도 전한 바 있다.
ⓒ 이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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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사님의 '염치'와 관련한 말씀들을 '거리'라는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가고자 하는 그 어떤 곳과 지금 실제 서 있는 곳과의 거리를 계속 의식하는 것이라고요. 그 거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역시 어떤 노력이 필요한 행위가 아닐까 합니다. '판사님만의 양형 이유'는 일종의 장치 아닐까요.
"사건에 치이다 보면 양형 이유를 간략히 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형사판결은 법률을 적용하고 형벌만 정확하게 판단하면 충분합니다. 그 정도만 되면 상급심에서 깨지지 않거든요. 판결의 적법성이나 정합성이라는 면에서 볼 때 양형 이유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영역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양형 이유를 쓴다고 온갖 자료를 뒤지고 이삼일을 끙끙대고 있으면 가끔 '참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지금 제 판결에도 간단한 양형 이유가 훨씬 많고요.

예전에 공들여 썼던 판결들을 보다보면 두 가지 생각이 드는데요.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리 길게 썼지? 체력도 좋았네'라는 생각과 '아, 정신차려야겠다'는 반성입니다. 흔히 초심을 잊지 말자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일관된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유지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그게 기계지 인간입니까. 그런데, 제가 정성 들여 썼던 양형 이유가 시퍼렇게 남아 있으면, 그 초심의 현존이 계속 제 발목을 잡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제 양형 이유는 목표에서 자꾸 멀어지는 저를 계속 돌아보게 하고, 태만함을 경고하는 옐로카드 같습니다."

- 앞서 대면 인터뷰에서 광우병 사태 당시 폭력적인 진압 상황을 접하고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역사의 진보를 믿는 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장면을 영상으로 보고 전 정말 충격을 받았습니다. 순간 착각했습니다. '80∼90년대 다큐 영상인가' 하고요. 악몽 자체보다 악몽의 데자뷰가 훨씬 무섭거든요.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진압봉에 맞던 20대 여성의 눈빛이었습니다. 그건 두려움의 눈빛이 아니었습니다. 놀라움과 당혹감이었습니다. 분노와 부끄러움이 동시에 밀려오더군요.

진보는 염치와 반성과는 한 몸처럼 뗄 수 없는 것이겠죠. 잘못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조리한 시대에 대한 분노 없이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욕망도 생겨날 수 없을 테니까요. 역사의 진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대체로 나선형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위에서 보면, 제자리를 빙빙 도는 것 같지만, 옆에서 보면 천천히 올라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구조가 아니라는 거죠. 정말 어떨 땐 흡사, 놀이기구 중 '디스코 팡팡'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원판이 계속 회전하면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사람들을 정신 없게 만들죠. 아무리 돌아도 제자리고요. 더디더라도 나선형 계단을 걷고 올라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니라, 디스코 팡팡을 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 어지러움과 혼돈에 더해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이 몰려옵니다. 요즘처럼 말이죠."

우문에 현답... "염치의 감도는 거꾸로 난 가시 비율 같다"
 
 박주영 판사는 과거 사진 제공 요청에 고종주 전 울산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사진들도 함께 보냈다. 박 판사가 <어떤 양형 이유>에서 밝힌 대로 "문장과 일상의 거리가 멀어지려 할 때면 떠올리는 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판사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라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전했다. 고종주 전 판사는 현재 법무법인 정인 소속 변호사다. 박 판사는 그의 정년을 앞두고 찍은 사진이라고 소개했다.
 박주영 판사는 과거 사진 제공 요청에 고종주 전 울산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사진들도 함께 보냈다. 박 판사가 <어떤 양형 이유>에서 밝힌 대로 "문장과 일상의 거리가 멀어지려 할 때면 떠올리는 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인터뷰에서도 "판사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라면서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고 전했다. 고종주 전 판사는 현재 법무법인 정인 소속 변호사다. 박 판사는 그의 정년을 앞두고 찍은 사진이라고 소개했다.
ⓒ 박주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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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 염치에 대한 감도는 타고나는 거라고 보시는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거기에 환경까지 뒷받침되면 그 유전적 기질이 더욱 강화되겠죠. 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만큼 상처를 잘 받는 체질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비판적으로 보고 상처를 잘 받는 게 어지간하면 장점이 될 순 없는데, 판사라는 직업은 좀 다릅니다. 비판적인 시각이야 말할 것이 없고, 자신이 상처를 잘 받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도 비교적 잘 느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타인에게 주는 상처는 정말 끔찍하게 견디기 어렵고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불화할 때면 저는 정말 제 몸에 가시가 있어 누군가 다가오려 할 때마다 상처를 주는 건 아닌가 자책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몸에 난 가시는 거꾸로 자란 가시가 더 많더군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제가 상처받는 경우가 훨씬 많았고, 상처의 정도도 훨씬 더 심각했으니까요. 염치의 감도는 거꾸로 난 가시의 비율인 것 같습니다. 제 몸을 파고드는 가시가 많은 사람들은, 사람과 세상과의 접촉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부끄러움, 죄의식, 타인의 고통을 더 잘 느끼는 것 같습니다. 더 상처받고요.

염치 감도를 높이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염치와 공감 능력을 갖추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 계속해서 우리 사회의 치부에 대해 발언하고, 문제제기하고, 도발하고, 고발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상처 입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염치와 고통감수성 높은 사람들이 모두 목청 높여 절규하고 포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식인, 전문가 그룹, 저희처럼 쇠망치를 든 사람들일수록 더욱 더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 사회의 염치에 대한 감도를 10점 만점에 몇 점 정도 주실 수 있는지.
"어려운 질문이네요. 법대 나와 고시공부로 20대 대부분을 보내고, 변호사하다 법원에만 있는 저 같은 사람은 생각보다 식견이 풍부한 편이 못 됩니다. 세상을 보는 시야도 좁습니다. 거시적으로 우리 사회를 통찰하는 능력은 거의 빵점입니다. 법정이라는 이 일그러진 소우주에서 느끼는 점만을 말씀드리면 2점도 채 안 될 것 같습니다. 이곳은 염치없는 사람들의 집합소니까요.

다만, 그래도 법정 바깥으로 눈을 돌려보자면, 여전히 저는 우리 사회의 염치 감도가 최소한 50퍼센트 이상 희망적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렇게 느껴집니다. 아, 최근 들어 저 같은 비관론자가 우리 사회를 희망적으로 보게 된 한 가지 결정적 이유가 있긴 하네요. 어둡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어떤 양형 이유>가 두 달만에 3쇄를 찍었습니다(^^)."

"염치는 힘있는 곳에 누진 적용돼야"
 
 지난 9월 20일 박주영 울산지방법원 제11형사부 부장판사 모습.
 지난 9월 20일 박주영 울산지방법원 제11형사부 부장판사 모습.
ⓒ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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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치에 대한 감도가 높은 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더 바람직한 사회라고 보시는지요.
"이 질문은 정말 염치없으십니다(^^). 지금까지 계속 이 얘기만 했는데요. 이제 와서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미친 놈 아닌가요(^^)?

그런데, 정말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부끄러움은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는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가 타인의 시선, 사회적 평가, 체면 같은 것에 너무 짓눌렸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태생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유분방함, 발랄함 같은 게 참 부럽습니다. 개인적 성향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우리 사회가 너무 염치에 억눌리지 말고 좀 더 키치(Kitsch)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병맛도 훨씬 더 많아지고요.

우린 때로 너무 '엄근진하게'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죠. 형사사건에서는 정말 웃자고 한 얘기에 사람이 죽습니다. 염치가 중요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충분히 염치에 짓눌려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도 타자의 시선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전제로 한 가지는 우리 모두 꼭 다짐했으면 좋겠습니다. 염치를 느껴야 할 자리에서는 염치를 느끼기로요. 특히 약자를 향해서는 반드시 염치를 느끼기로요. 저는 염치의 가중치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염치는 한 사회나 개인이라는 배가 더 나은 목적지로 운항할 수 있도록 하는 조류나 편서풍 같은 것으로서,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나름의 위치에서 꼭 갖춰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바람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똑같은 양으로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 빈자리로 쏜살같이 돌진하는 것을 두고 염치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건장한 청년이라면 염치없는 짓입니다. 유리지갑 회사원이 한 푼이라도 절세해 볼 요량으로 세법을 요리조리 피하며 아등바등하는 것을 염치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재벌이라면 염치없는 짓입니다. 퀵배달 아저씨가 배달료 2천원을 더 받으려고 신호 위반하는 것을 염치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국회의원이라면 염치없는 짓입니다.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좀 덜 느끼고, 좀 더 뻔뻔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요? 저는 염치는 권력과 자본, 부와 사회적 책임, 지식과 정보가 집중된 곳에 누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희 같은 사람들이 욕을 더 먹는 것이겠죠. 판사가 아니라 아저씨 입장에서 말씀드리면, 그래서 저 역시 요즘 누진적으로 더 화가 나나 봅니다."

* 박주영 판사와의 인터뷰는 10월 30일자 서면 문답을 포함해 모두 세 차례 이뤄졌습니다. 이 기사는 <동사무소에서 판사는 부끄러웠다 "법에 무지하여...">에 이은 두 번째 인터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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