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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국내 거주 홍콩인 등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홍콩 민주주의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국내 거주 홍콩인 등이 지난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홍콩 민주주의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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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홍콩민주화 역사의 악몽같은 날

11월 4일은 홍콩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날이 됐다. 애석하게도 기념이 아닌 추모의 날이어서 더욱 안타깝다. 이 날은 홍콩 민주화운동 50여 년 역사에서 정부당국의 공권력에 의한 첫 사망자가 발생한 날이 됐다. 이 역사의 증언은 한국을 방문한 홍콩민간인권전선 얀 호 라이 부의장을 통해 이뤄졌다.

홍콩과학기술대학교 2학년생인 차우츠 록(周梓樂)은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던 홍콩 경찰의 최루탄을 피해 쫓기던 중 건물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을 향해 홍콩 경찰은 '바퀴벌레'라는 비난을 하거나, '샾인을 터트려 축하하자'는 조롱을 일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홍콩 전역이 추모와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으나 홍콩 경찰에 대한 흉흉한 소문과 더 잔인해진 시위진압 소식은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타고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11월 10일 홍콩 유력언론인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 <명보>(Ming Pao) 등에 따르면 지난 9월 27일, 췬완 경찰서 소속 4명의 경찰이 16세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로 고발됐으며 현재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11월 11일에는 무장경찰이 홍콩 시내의 비무장 시위대에게 세 발의 실탄을 발사해 2명이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져 충격을 더하고 있다.

6월 19일 중국송환법 반대를 외치며 시작된 홍콩 민주화 시위는 24주째를 맞고 있다.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진압과 연이은 시위 희생자 발생으로 홍콩 민주화의 앞날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러한 때에 홍콩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시민사회단체연합인 홍콩민간인권전선 얀 호 라이 부의장이 한국을 찾았다. 홍콩의 상황을 직접 알리고 한국 시민들에게 지지와 연대를 호소하기 위해서다.

지난 11일 오후 7시, 경복궁역 인근에 있는 한 카페에서 열린 방한간담회에 참석했다. 홍콩 민주화 활동가의 생생한 증언을 직접 듣고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보기 위해서였다. 까페 2층에 마련된 좁은 공간에는 50여 명이 넘는 시민과 기자들로 열기마저 빼곡했다. 참석자들의 다수가 20, 30대의 젊은 층이라는 것이 유독 눈에 띄웠다.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간단한 행사 소개와 함께 추도 묵념을 제안했다. 며칠 전 숨진 차우츠 록을 애도하고 오늘 시위 도중 총상을 입은 시민들의 쾌유를 기원하는 취지였다. 다소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묵념이 이어지고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 민주화 이후 30년이 훌쩍 넘은 한국 땅에서 바다 건너 홍콩의 민주화 희생자를 위해 묵념을 하게 될 줄을 참석자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홍콩 민주화운동의 입문서, 한국영화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에서 주최한 방한간담회에서 홍콩의 상황을 설명하는 얀 호 라이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에서 주최한 방한간담회에서 홍콩의 상황을 설명하는 얀 호 라이 민간인권전선 부의장
ⓒ 김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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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이어 라이 부의장이 이야기가 시작됐다. 첫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라이 부의장은 현재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동시에 홍콩의 가장 규모가 큰 연합조직인 '민간인권전선(CHRF)'의 부의장으로 직접 민주화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인물이었다. 민간인권전선에는 홍콩의 시민사회단체와 정당을 포함해 48개의 그룹이 함께하는, 홍콩 최대 규모의 연합조직이다.

그가 맨 처음 꺼낸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한국의 영화 이야기였다. 그는 1988년생으로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고 했다. 오히려 한국 영화를 통해 홍콩의 시민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역사에 대해서 접하고 배우게 된다고 전했다. 바로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세 영화다. 그는 이들 영화가 홍콩에서 권력을 거스르고 저항한다는 의미를 가진 '역권(逆權)운동'의 상징적인 영화라고 힘주어 말했다.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라이 부의장이 사회운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2002년부터 벌어진 국가안전법(홍콩기본법 23조) 반대운동이었다. 그의 나이 15세였던 중학생 시절의 일이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과 매우 흡사한 성격을 가진 이 법은 홍콩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 표현과 사상, 종교, 언론·출판의 자유를 강력히 제한하고 처벌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사실 이 법안은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될 당시 중국 정부에 의해 홍콩 기본법으로 제정될 예정이었으나 홍콩 시민들의 거센 반발로 유보됐던 법안이다. 

그 당시 봤던 수십만 명의 시위 인파는 어린 그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당시 50만 명에 달하는 홍콩 시민들이 참여한 이 시위는 홍콩 민주화운동 역사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작이 됐다. 그는 "작은 시민의 힘일지라도 함께 모이면 거대한 권력의 횡포를 막을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성취였다"라고 회고했다. 홍콩 민간인권전선은 이 반대운동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2002년 9월에 결성됐으며, 라이 부의장 자신도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됐다.

홍콩 민주화세대, 삼보일배를 배우다

라이 부의장은 홍콩의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크게 세 번의 중요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첫 번째 시기는 1984년 홍콩의 중국 반환 협정 체결 이후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운동까지다. 이 시기에는 시민들이 대거 참여하는 대중적인 민주화운동의 경험이 축적됐다. 민간인권전선이 결성되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 시기는 2003년 국가안전법 반대운동 이후 2012년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까지의 기간이다. 여기서 매우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시민운동이 홍콩 민주화운동에 실질적이고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라이 부의장의 분석이었다. 

그것은 2005년 일어났던 한국 농민들의 세계무역기구(WTO) 홍콩회의 반대시위였다. 당시 한국 농민조직은 홍콩 현지에서 매우 적극적인 저항 캠페인을 보였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삼보일배 행진을 꼽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경찰 당국의 물대포·최루탄 진압에도 불구하고 대항했던 방식, 그리고 WTO 국제회의장을 둘러싸고 시위하는 한국 농민의 모습은 당시 홍콩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에겐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홍콩 민주화운동가들은 한국 농민들의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깊은 영감을 받았다. 홍콩에서는 이런 운동방식을 '용무운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중 한국의 삼보일배 운동은 '구보일배'와 같은 형식의 시위 방법으로 진화됐다. 2010년 중국-홍콩간 고속철 도입 반대운동이 벌어질 때 홍콩의 젊은 시위대들은 구보일배를 통해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라이 부의장은 "한국의 농민시위는 홍콩입법회(의회)를 포위하고 점거하는 시위방식에 영향을 끼쳤다"라며 "중학생이었던 내게 당시 한국 농민시위는 큰 감명과 영감을 줬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2012년 중국의 교과서 개편에 반대하는 학생운동부터 2014년 우산혁명을 거쳐 최근의 중국송환법 반대시위로 촉발된 2019년의 민주화 시위까지의 과정이다. 라의 부의장은 "세 번째 시기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 바로 죠수아 웡과 같은 홍콩의 젊은 정치인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홍콩인 정체성을 강조하는 학생과 청년세대 운동이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세 번째 시기의 역사적 계기가 된 사건은 바로 2004년 79일간 진행됐던 '우산혁명'이었다. 중국 중앙정부가 홍콩 행정장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촉발된 이 시위는 학민사조, 홍콩학생연맹 등과 같은 조직처럼 학생과 청년들을 홍콩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등장시키게 했다. 이 과정에서 홍콩의 야당인 공민당, 사회민주연선, 데모시스토와 같은 민주파 의원들도 참여하게 됨으로써 행정장관 직선제라는 뚜렷한 목표를 갖는 정치운동이 시작됐다.

홍콩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특징을 홍콩반환 협정체결 이후 30여 년간 세 차례에 걸친 역사적 계기을 매개로 설명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더군다나 이 시기와 전개 과정이 한국의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연결돼 발전하는 맥락과 궤를 같이하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 역사의 보편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해소되지 않은 질문 하나가 있었다. 당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한국의 민주화세대, 특히 제도정치권에 진입한 엘리트 정치인들은 지금의 홍콩민주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응대하고 있을까? 

홍콩 경찰이 자행하는 네 가지 폭력과 불법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국내 거주 홍콩인 등이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홍콩 민주주의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국내 거주 홍콩인 등이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홍콩 민주주의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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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담회 후반부 들어서 라이 부의장의 발언은 '행정당국과 경찰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의 문제점'을 성토하는 데 집중됐다. 그는 현재 경찰 진압의 문제점을 네 가지 항목으로 나눠 조목조목 비판했다.

우선, 경찰이 시위대를 무조건 '적'으로 규정하고 무력으로 대응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홍콩 경찰은 대화와 협의보다는 시위대에 대한 물리적인 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라고 부연했다. 시위대를 향한 고무탄 사격, 물대포 난사, 스프레이와 최루탄 남용, 규정을 어기는 진압봉 사용 그리고 비무장 시위대를 향한 실탄 사격도 자행되고 있었다.

단적으로 홍콩 경찰의 진압봉의 경우 인명손상을 우려해 '머리를 직접 때리면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실제 경찰은 시위자의 머리를 겨냥하며 진압한다고 한다. 이것은 자기방어나 시위대의 해산이 목표가 아니라 "진압과 복수의 의도를 담고 있기에 매우 위험한 행위"라는 비판이다.

둘째는 인간존엄성을 훼손하는 '비인간적 혐오와 모멸 행위'다. 홍콩 경찰은 곧잘 시위대를 향해 '바퀴벌레'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것은 완전한 혐오 표현이며 인격 살해다. 또한 그는 "위험성이 전혀 없는 시위대를 향해서도 무조건 최루액이 섞인 스프레이를 발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라며 "이것은 시위대를 하나의 인격체가 아닌 박멸해야 할 '벌레'로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찰의 과잉진압이 스스럼없이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셋째는 경찰에 의한 성폭력의 실상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이런 불법행위가 남녀를 불문하고 이뤄지고 있다"라고 전했다. 라이 부의장은 "홍콩 북쪽에 위치한 한 구치소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은데, 경찰과 교도관에 의한 성폭력이 빈번히 발생한다"라고 전했다. "심지어 경찰들은 시위에 참여한 남성들에게도 성적 모욕감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여성 시위대를 향해 '창녀'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도 있다"라고 한다. 주로 학생과 청년들이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매일 같이 걱정과 두려움을 느끼는 실정이라고 호소했다.

넷째는 홍콩 행정당국에 의해 강요되는 불합리한 경찰규정과 제도화된 폭력성에 관한 비판이었다. 현재 홍콩의 공안 조례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조례로부터 시작됐는데, 이 조례에 따르면 3명 이상의 홍콩 시민이 모여 공공질서를 해치게 되면 강제 해산 혹은 진압할 수 있도록 돼 있다고 한다. 하지만 처벌의 기준과 판단 권한은 오직 경찰에게만 주어진 상황.

또한 최근 제정된 '복면금지법'만 하더라도 시위대에게만 적용될 뿐, 초법적인 폭력을 일삼는 경찰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경찰 개개인의 명찰과 소속직급 등을 고의적으로 누락해 신분을 숨기더라도 어떠한 제재도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민간인권전선의 5대 요구사항 중 '경찰에 관한 독립조사위원회' 설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은 홍콩 경찰의 자체 조사를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라이 부의장은 경찰에 의한 폭력진압에 대해서 한국의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자신이 미국과 유럽 등에서 경찰의 물리력 행사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면, '경찰의 정당한 방어권이 왜 문제인가?'라는 식의 반론을 들을 때가 있다고 했다. 즉 서구에서는 경찰권을 '민주주의의 위협'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도 있다는 것. 하지만 한국의 경우, 과거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경찰·군인·공무원 등의 불법·초법적인 폭력을 많은 시민들이 경험했기에 홍콩의 현재에 대해 이해와 공감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홍콩시민들이 한국시민에게 요청하는 세 가지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국내 거주 홍콩인 등이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홍콩 민주주의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홍콩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민모임 회원들과 국내 거주 홍콩인 등이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열린 "홍콩 민주주의 지지 집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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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부의장은 열띤 설명 마지막에 세 가지를 한국 시민과 청년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라이 부의장은 "무엇보다 홍콩 민주화운동 그룹은 한국 정부에 대한 기대보다 한국의 민간그룹과 시민사회 차원의 연대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에서 홍콩 민주화운동에 대해 조용한 것을 다소 의아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한국은 민주주의와 자유인권에 대한 사회운동의 경험과 자원이 굉장히 풍부한데, 의외로 홍콩민주화에 대한 지지가 적다"라는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이유 중 중요한 것은 바로 소통의 도구인 '언어'였다. 따라서 그는 "홍콩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관한 정보, 자료, 소식을 통역과 번역을 통해 교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둘째는 "시민사회와 전문가의 연결과 연대"였다. 홍콩의 민주화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의사나 변호사, 기자, 사회복지사, 예술인 등 전문직종의 참여가 매우 늘었지만, 여전히 경험과 연대가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 활동하는 시민사회 영역의 전문가들이 각 영역과 직군에서 정보를 활발하게 교류하고, 연대활동과 지원을 모색해 가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홍콩 방문"을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는 "현재 홍콩은 사회정보 통제가 매우 강화됐으나 계엄령이 선포되거나 중앙정부로부터의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것은 아니기에 입출국과 여행에는 제한이 없고 안전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콩 현지 집회에 참석하지 않더라도, 홍콩을 방문할 때에는 중국 본토 대기업이 운영하는 업체보다 홍콩 시민들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식당 등)를 이용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다.

라이 부의장은 "현재 홍콩 시민들이 한국 시민들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은 결코 금전이나 물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며 "오히려 홍콩의 작은 소식이라도 소셜미디어에 올려 알리고, 영문과 중국어로 번역된 정보와 자료를 확산시켜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재한 홍콩인 집회나 한국시민들에 의한 연대집회 등의 소식도 홍콩 시민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큰 힘과 용기가 된다"라고 수 차례 강조했다.

이날 간담회는 기자와 시민 10여 명의 질의응답이 진행된 뒤 마무리됐다. 라이 부의장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명확하게 홍콩의 상황과 자신의 견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특히 그의 말 곳곳에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애정이 배어 있어 놀랍고 미안하기조차 했다. 그가 '한국시민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을 그대로 옮겨본다.
 
  홍콩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뿌려진 전단지에는 "홍콩의 민주와 자유를 지지해주셔서 한국국민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홍콩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뿌려진 전단지에는 "홍콩의 민주와 자유를 지지해주셔서 한국국민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썬니 현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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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일 돌아갑니다.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한국에 오는 날 청년 한 명이 목숨을 잃었고, 오늘은 경찰의 실탄에 또 한 명의 청년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저는 귀국하자마자 활동을 시작할 것입니다. 하지만 홍콩 시위는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경찰의 폭력 진압은 계속될 것이고, 저희는 저항할 것입니다.

한국 시민들의 지지가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주 차우츠 록(周梓樂)의 죽음을 겪으면서 우리는 한국의 청년 '이한열'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홍콩과 한국의 역사는 닮았고 발전하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여러분들의 지지를 호소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이는 하늘 아래 같은 역사는 없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역사는 반복된다고도 한다. 모순되는 명제일 수도 있겠으나 역사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지닌 채 뒤엉켜 진화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국과 홍콩의 역사가, 오늘이, 그리고 민주주의가 결코 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홍콩의 시민들이 한국의 시민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말한다. '홍콩'이 '광주'라고. '차우츠 록'이 '이한열'이라고.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이라고 말이다.

우리에게도 빚이 있다. 미국 헤이마켓의 순교자 어거스트 스파이스(August Spies)로부터 청년 전태일의 역사가 있었다.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의 숨겨진 필름을 통해 광주의 진실이 세상에 빛을 봤다. 홍콩 대학생 소니아 응이 폭로한 경찰 성폭력에는 1986년 권인숙의 아픔이 중첩돼 있다. 명동성당에서 밤을 지새웠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홍콩의 센트럴 성당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가 어찌 민주주의 역사에서 빚진 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필자는 미래당(우리미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홍콩민주화, #프리홍콩, #홍콩시위, #민간인권전선, #미래정치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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