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롤로지> 데이비 은해성

<킬롤로지> 데이비 은해성 ⓒ 연극열전

 
한 소년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상대를 잔인하게 살해할수록 높은 점수를 받는 '킬릴로지'라는 게임처럼. 게임에 등장하는 갖가지 도구를 이용해 소년을 잔인하게 살해한 '살인자'들은, 법정에서 히죽거리고 웃고 있다. 이것이 소년 데이비의 아빠 알란이 복수를 칼을 집어든 된 계기다. 알란은 '킬롤로지' 게임 개발자 폴의 집에 잠입해 그를 덮친다. 그에게 데이비가 살해당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고, 게임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나쁜 영향을 끼쳤는지 설파하며 울부짖는다. 그리고 게임 속 등장한 그 끔찍한 도구를 손에 들기 시작한다.
 
폴은 '킬롤로지' 개발자다. 폴의 아버지는 그에 대해 높은 기대를 했고, 그만큼 실망도 많이 했다. 그는 24살이 되던 해 자신의 힘으로 갖게 된 집에 가족을 초대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칭찬 한 마디 하지 않는다. 폴은 게임 속에서 아버지를 두드려 팼다. 그리고는 말한다. "이게 제 성공의 시작입니다"라고.
 
데이비의 아빠는 데이비가 태어난 지 18개월 될 때 집을 나갔다. 9살 되던 해 아빠에게 받은 강아지 메이시. 댄스파티에 가려고 한 날, 가방을 창밖으로 던지고 댄스파티에 가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메이시에게 따뜻한 무게를 처음 느꼈다. 고약한 동급생 에디 랜달 무리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엄마가 가지 말라고 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엄마는 잘 놀다 오라고 했다. 그날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아빠와 자전거를 타고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자전거를 뺏어 거리로 나섰다. 
 
연극 <킬릴로지>는 세 사람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극이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한 세 사람의 이야기는 묘하게 맞닿는다. 폴과 그의 아버지, 데이비와 알란, 두 부자(父子)의 관계, 또 킬릴로지라는 게임은, 너무나 동떨어지게 느껴지는 세 인물의 독백을 촘촘하게 채운다. 그러면서 외롭고, 상처받은 아이와 그에 대한 책임, 후회에 대한 이야기 안에서, '책임'과 '후회'가 누구의 몫인지, 누구를 향한 것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고 또 한숨짓게 만든다.
 
"저는 아버지가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고, 아버지는 그것이 누구의 잘못인지,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합니다"-작가 게리 우웬
 
"데이비의 엄마는 어디로 갔나요? 폴의 엄마는요? 그녀들은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사라져버린 건가요?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고. 오늘날 이 자유로운 현대사회에서도 마치 원시부족처럼 자녀의 양육은 엄마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있는데, 본인은 이게 아닌 거 같다고. 특히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용서했다. 사라진 어머니들에게는 안부를 전하고 싶다. 마지막 대사에도 작품은 끝나지 않는다" - 연출 박선희 (프로그램북에서 발췌) 
 

누구보다 외로웠던 소년 데이비
 
 <킬롤로지> 은해성 윤석원

<킬롤로지> 은해성 윤석원 ⓒ 연극열전


'만약 알란이 도망가지 않았다면' '만약 데이비가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면'이라고 자꾸만 '만약에...'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킬롤로지>. 아빠에게 버림받고, 늘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바라봐야 했던, 누구보다 외로웠던 소년 데이비로 무대에 서고 있는 배우 은해성을 지난 10월 31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데이비가 엄마에게 터놓고 얘기했다면, 알란이 그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여러분에게 행복하고,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은해성이 반문했다. 인터뷰가 끝나가는 무렵에서 터진 물음이다.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던 데이비라는 인물에 대한 애착이 묻어났다. 동시에 내뱉기 쉽지 않은 단어와 상황을 마주하는 힘든 감정이 느껴졌다. 은해성은 작품이 너무 좋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며 '최고'와 '최악'이라고 표현했다. 감정적으로, 체력적으로, 그리고 대사량으로.
 
"<킬롤로지>는 정말, 최고와 최악이 공존하는 작품이에요. 아마 제가 앞으로 어떤 작품을 만나더라도, <킬롤로지>처럼 이 감정의 정점을 찍지는 못할 거 같아요. 좋으면서도, 그만큼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드니까요."
 
독백으로 진행되는 무대를 채우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터. <형제의 방>에 이어 두 번째로 연극무대에 서는 '신인'이 그 많은 대사를 쏟아내고, 감정까지 털어내야 하니 말이다.

"부담이 많이 돼요. 공연 막바지가 다가와도 변함이 없어요. 공연하는 날은 여전히 떨리고 긴장돼요. 관객들이 잘 봤다고 하면 오히려 마음이 힘들어요. '난 못한 거 같은데...'라는 마음이 들어서 그래요. 정말 어려운 작품이에요."
 
게다가 <킬롤로지>는 무대 등장, 퇴장도 없다. 세 배우가 무대에서 각각의 독백을 쏟아낼 때 기둥 뒤에 있어나, 어둠 속에서 자리를 지킬 뿐이다.
 
"기둥 뒤에서도 늘, 연기한다고 생각해요. 감정을 빼지 않고 알란과 폴의 이야기를 들어요. 데이비의 감정으로 듣다보면 알란의 행동이나 말이 어이가 없을 때도 있죠. 그러게 몰입해야 '아빠가 토꼈어'라는 대사에 힘이 실리거든요."
 

데이비는 힘이 센 형이 있는 동급생 에디를 도발한다. 며칠 뒤 에디 무리는 데이비를 조용히 부른다. 집으로 찾아온 그들을 따라나서는 데이비는 두렵지만, 엄마에게 이를 알리지 않는다. 은해성은 "저도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굳이 얘기하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극 중 데이비도 '내가 엄마한테 말하면 뭐가 달라질까'라고 하잖아요. 많은 분이 그렇지 않을까요"라고 자신 역시 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은해성

은해성 ⓒ 판타지오

 
에디 무리는 데이비에게 특별한 존재인 강아지 메이시를 해한다. 메이시는 데이비에게 '따뜻함'을 안겨준 존재다. 외로운 그에게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메이시를 잔인하게 죽인 것도 모자라, 데이비에게 지우지 못하는 죄책감을 안겼다. 모든 장면이 배우의 독백으로 흘러나오지만, 상상하기도 힘든 장면이다. 은해성 역시 쉽지 않은 장면이라고 털어놓았다.
 
"대본을 보고 '메이시를 데리고 도망가지'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근데 사람이 죽을 위협을 당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거 같더라고요. 데이비도 '그렇게 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겠죠. '결국 메이시는 반격을 멈췄죠. 메이시는 울음을 멈췄어요'라는 대사는 정말 입으로 내뱉기도 힘들 정도로 힘들어요."
 

극 중 데이비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다. 비뚤어진 마음을 드러내 보이기도 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해서 사건을 더 크게 키우기도 한다.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부분이기도 하다.
 
"데이비가 의자로 선생님을 내리치는 부분이요. '왜 그랬을까' 이해가 안 돼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한 데에 화풀이 한 것 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러다가 든 생각이, 자신에게 엄청 잘 대해준 친절한 선생님에게, 감정이 엇나간 게 아닌가 싶었어요. 마음을 풀 곳이 없었던 데이비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거죠. 메이시를 지켜주지 못한 마음이 큰 영향을 끼친 거고요. 마음이 변질된 거라 생각해요. 꼬마 여자아이 자전거 뺏어서 달리는 것도 그래요. 아빠와 함께 있는 아이에게 질투를 느끼고, 에디가 된 것마냥 뺐었을 거예요. 그러다, 뒤에서 오는 폭력배들의 존재도 모르고요. 데이비는 관객들에게 이해받기 쉽지 않은 인물이에요. '왜 저랬을까'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분명, 어느 부분에서는 공감하고 이해할 수도 있어요. 누구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저지르잖아요. 그런 시각으로 데이비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가 상황도 함께요."
 
은해성은 데이비의 감정을 찬찬히 따라갔다. '왜 그랬을까...' 끊임없이 던진 그의 질문이 막 풀리기 시작한 실타래처럼 풀려나왔다.
 
"데이비가 그럴 수 없었던 건, 사랑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아빠는 아기였을 때 도망갔잖아요. 엄마 혼자서 데이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고요. 아기를 키우면서 먹여 살려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알란과 캐롤, 둘 다 너무 어렸을 거고요. 아마 계획 없이 아기가 생겼을 거고, 그래서 서로가 힘들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알란에 대한 마음은 이해가 잘 안 돼요. 제가 아직 아빠의 감정을 잘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자식을 잃었으니 당연히 아플 거예요. 하지만, 아기가 태어난 지 18개월 됐을 때 떠나놓고 이제 와서 그런 소동을 벌이는 게, 솔직히 이해되지는 않아요. 책임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폴 역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이에요. 부자고, 성공했죠. 데이비와 상반 되는 부분은 있지만, 결국엔 데이비와 같을 결로 흘러갔다고 생각해요. 폴이 게임 속에서 아빠를 두드려 패고는 '성공의 시작'이라고 하잖아요. 이후에 아이를 입양하고, 결국엔 '저리 치워버려'라고 하고요. 무대에서 데이비와 폴이 겹쳐지는 부분은 없지만, 폴을 바라보는데, '너도 별거 없구나'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알란은, 세상을 떠난 데이비를 생각하며 상상의 세계로 빠진다. 혹, 데이비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오해할 법도 하다. 알란은 병원을 다니며, 환자 재활을 돕는 데이비를 관객들 눈앞에 펼쳐냈다. 이 장면에 대한 은해성의 생각은 어떨까.
 
"데이비를 그리워서 그런 거겠죠? 그래서 데이비와 함께 하는 상상도 하고요. 그런데 그 그리움은 자기의 만족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기 버리고 떠난 사람이 게임 제작한 사람을 벌한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아요. 알란 마음에도 나름의 무언가 있겠죠? 관객들의 몫이겠지만요."
 

"<킬롤로지>를 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 생겼어요"
 
 배우 은해성

배우 은해성 ⓒ 판타지오

 대사와 그 속에 숨은 단어들까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작품 <킬롤로지>. 행동 하나하나와 눈빛까지도 절대로 허투루 다가갈 수 없었다고.
 
"<킬롤로지>는 어디에서부터가 환상이고 또 현실인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요. 처음부터, 마지막 대사전까지 알란의 상상과 데이비가 실제 겪은 일들이 함께 뒤섞인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큰 줄기를 잡기 쉽지 않았어요. 만약, 데이비가 죽지 않았다면요? 알란의 상상대로 됐을 거 같아요. 병원에서 질 아줌마를 만나고, 여태까지 받지 못한 사랑을 받은 것에 감동했을 거고, 의사를 꿈꿨을 거예요.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을 테니까요."
 

'데이비가 만약에 살았더라면?'이라는 상상에 은해성 역시 병원에서 근무하는 미래를 꿈꿨다. 알란과 같은 그림이다. 그럼, '잔인한 폭력이 게임의 영향이다'라는 알란의 생각에도 동감할까.

"분명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람은 영과 혼, 육체가 있잖아요.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그 영향이 내재될 거예요. 작품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갖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스만 봐도 너무 무서운 내용이 많잖아요. <킬롤로지>를 하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더 생겼어요. 학교 폭력 등에 대해서도 더 안타깝게 느끼고요. 새롭게 시작하는 신혼 부부 등 많은 '어른'이 함께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킬롤로지>의 큰 주제는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공감하고, 느끼는 부분이 많을 거예요."
 

은해성은 <킬롤로지>가 끝나면 재밌는 작품에 임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재밌는 걸 좋아해요. 어렵지만 코미디도 도전해보고 싶어요"라고 포부를 나타냈다. 공연이 없는 쉬는 날, 무얼 하냐는 물음에도 <킬롤로지>에 대한 열정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길거리를 걸으면서 대사를 외워요. 줄줄 쏟아내면 딱 45분 걸려요. 스톱워치 맞추고 발걸음을 시작하죠. 공연 끝나면요? 글쎄요~(웃음)"

<킬롤로지>는 오는 17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공연된다.
연극 킬롤로지 은해성 데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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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문 프리랜서 기자입니다. 연극, 뮤지컬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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