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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가 논란입니다. 몇 회에 걸쳐 이 책의 문제점을 짚어봅니다[편집자말]
1919년 3·1운동 이래, 이 땅의 최대 적폐는 친일이다. 그런데 이 적폐는 3·1운동 100주년인 지금까지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 해방 직후에도,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매번 번번이 무산됐을 뿐이다.

친일 적폐가 100년간이나 누적된 데다가 그 위에서 대한민국의 모든 부조리가 기생해왔기 때문에,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근본적으로 탈바꿈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청산을 저지하려는 기득권의 노력도 필사적이다.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끊임없이 시도되는 게 친일청산 반대 논리의 생산 및 유포다.

친일청산이 공산주의다? 중국 국민당 살펴보니...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2009년 11월 8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참석자들이 '친일청산','친일타도'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2009년 11월 8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참석자들이 "친일청산","친일타도"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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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이 계속 주장한 식민지 근대화론이 앞서 설명한 논리 중 하나다. 하지만 '일본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잘살게 됐다'는 이 논리는 널리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논리가 객관적 역사와 상반될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한국인들의 거부감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런 논리를 펴는 것 자체를 죄악시한다. '뭐야? 일본 덕분에 잘살게 됐다고?'라며 그런 논리를 꺼내는 사람의 인격을 의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지간인 안병직·이영훈 두 교수가 의욕적으로 내세우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확장성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꽤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해온 논리가 하나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을 비롯해 뉴라이트(신우익)들이 공통으로 구사하는 '친일청산=공산주의' 논리다.

이 논리가 사용된 지는 꽤 오래됐다. 1948년에 국회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친일청산을 개시하자, 친일 극우세력이 내세운 방어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1948년 8월 27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친일파들은 "반민족자를 처단한다는 자는 공산당 주구다"라는 삐라를 살포하고 다녔다. 이런 일은 당시 수없이 발생했다.

친일청산을 빨갱이와 연결하는 접근법은 냉전시대가 사실상 끝난 2010년대에도 계속 구사되고 있다. 지난 9월 19일 연세대 사회학과 강의 때 위안부 피해자들을 매춘부에 빗댔던 류석춘 교수도 그런 접근법을 쓰고 있다. 그는 친일청산이 모범적으로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는 북한을 겨냥해, '친일청산이 공산혁명의 도구로 쓰였을 뿐'이라고 폄하했다. 2013년 <시대정신> 봄호에 게재된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의 한 대목이다.

"북한이 했다고 선전하는 친일청산이란 친일청산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혁명에 반대하는 반공 혹은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과 청산이었을 뿐이다. 공산혁명에 저항적이었던 유산계급의 재산을 대상으로 한 '재산 빼앗기' 과정이었고, 소련 공산주의 체제를 만드는 데 반대한, 소위 그들이 말하는 반동분자에 대한 숙청 과정이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정권의 친일청산이든 자본주의 정권의 친일청산이든, 나름의 목적에 맞게 이뤄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친일청산이 곧 공산혁명이 되거나 부르주아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친일청산은 공산당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싸웠던 장제스(장개석)의 국민당 정부 역시 소극적이나마 친일청산을 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제 패망 8년 전인 1937년 8월부터 한간(漢奸) 즉 친일파들을 처형했다.

일제 패망 뒤에도 그들의 청산 작업은 계속됐다. 규모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대략적 추정은 가능하다. 2007년에 <중국학보> 제55집에 실린 박상수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중국의 친일한간 청산 일고(一考)'는 이렇게 말한다.

"1948년의 <중화연감>에 의하면, 1945.11-1947.10 기간의 각 성과 시의 법원에서 처리한 한간 처벌 정황은 다음과 같다. 검찰 측에서 45,679건의 한간 안건을 처리했는데, 기소자는 30,185명, 불기소자는 20,055명, 기타 13,323명이었다. 각성(各省) 법원의 심판은 25,155건을 다루었는데, 그중 사형 369명, 무기징역 979명, 유기징역 13,570명, 벌금 14명이었다."

한국에서는 친일파에 대한 사형집행이 1건도 없었다. 징역 등의 신체형 선고는 14건 있었지만, 그나마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민당 정부는 불철저하나마 친일청산을 했다. 국민당도 친일청산을 했다면, 친일청산을 빨갱이와 연결하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친일청산=공산주의' 논리가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미·소 양대 진영의 냉전구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최후의 냉전 지대라고 하는 한반도에까지 평화의 훈풍이 불고 있다. 냉전의 수명이 다하면 이 논리도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을 시도한 게 아니다?
 
이승만TV에 출연한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
 이승만TV에 출연한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
ⓒ 이승만 TV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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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 방식에서 탈피해, 그러니까 냉전구도와 무관하게 대응 논리를 개발하는 학자도 있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 저자인 주익종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가 바로 그 '개발자'다. 이 책 제18장 '친일청산이란 사기극'에서 그의 '제품'을 확인할 수 있다.

<반일 종족주의> 제18장에서 주익종은 반민특위와 친일청산을 분리시킨다. 둘을 떼어놓음으로써 친일청산의 당위성과 역사적 근거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우리는 건국 직후 친일청산을 못 한 게 아니라 반민족행위자 처벌을 못 한 겁니다"라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가 말하는 '건국'은 헌법 전문(서문)에 근거한 1919년 '임시정부 건국'이 아니라, 헌법적 근거가 없는 이영훈식의 '1948년 건국'이다. 그가 말하는 건국은 '정부수립'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

주익종은 정부수립 직후에 국회 반민특위가 시도한 것은 친일파 청산이 아니라 반민족행위자 처벌이었다고 주장한다. "1948년 건국 후 제헌국회가 추진한 건 반민족행위자 처벌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당시 친일청산이 추진된 적이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국민들의 요구로 설치됐다. 그렇기 때문에 반민특위가 친일청산을 시도한 적이 없다는 말은, 당시 국민들이 친일파 청산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해방 당시의 민족적 과제에 친일청산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익종은 "반민족행위자 처벌과 친일파 처벌이 같은 거 아닌가? 하고 묻는 이도 있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양자는 엄연히 다릅니다"라면서 이렇게 부연한다.

"반민족행위자가 무언가 악랄하게 민족에 해를 끼친 자라고 한다면, 친일 인물은 단지 일제에 협력한 자, 일제와 친하게 지낸 자 아니겠습니까. 비유를 들자면, 조직폭력배·조폭의 일원인 것과 조폭의 친구인 건 전혀 다르죠. 조폭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는 것은 범죄의 일종이지만, 조폭과 친한 건 범죄까지는 아니죠."

조폭과 친한 것이 범죄가 아니듯이, 일본과 친한 것이 반민족행위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는 '반민특위가 처벌하려 한 것은 반민족행위였지, 일본과 친구가 되는 친일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반민족행위라는 커다란 범주에 친일행위가 포함됐을 뿐, 양자가 그 자체로 서로 같았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반민족행위와 친일행위는 글자 뜻만 보면 서로 같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1948년 당시에는 둘이 동의어로 쓰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은 1948년 9월 22일 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에서 명확히 확인된다.

반민법 제1조는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논의한 자"를 처벌한다고 했고, 제2조는 "일본 정부로부터 작(爵, 작위)을 수(受, 받다)한 자 또는 일본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를 처벌한다고 했고, 제3조는 "일본 치하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또는 이를 지휘한 자"를 처벌한다고 했다.

이처럼, 반민법은 반민족행위를 친일행위로 국한했다. 반민법상의 반민족행위는 곧 친일행위였던 것이다. 이는 반민특위가 처벌하려 했던 대상이 친일행위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데도 주익종은 '반민족'과 '친일'의 글자 뜻을 근거로 양자를 갈라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반민족행위를 친일행위로 인식하게 된 때가 1965년 한일협정 전후라며, 1965년 한일회담 반대세력이 '사기극'을 연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64~65년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 반민족행위자 처벌론이 친일 청산론으로 탈바꿈해서 등장합니다"라고 말한다.

민족문제연구소 겨냥한 뉴라이트
 
한일회담 반대운동.
 한일회담 반대운동.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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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익종의 말은, 운동권과 야당이 한일회담을 반대할 목적으로 정부수립 직후의 반민족행위자 처벌 문제를 친일청산 문제로 왜곡시켜 선전했다는 것이다. 이때 처음 주장된 친일청산론이 1948년 반민특위에 의해서도 주창됐던 것처럼 왜곡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 주범이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의 정신적 지주인 "재야의 임종국이란 인물"이라고 그는 말한다.

한일 청구권협정과 더불어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반대했던 운동권과 야당이 한일 국교수립을 저지할 목적으로 '반민특위=친일청산 기구' 혹은 '반민족행위=친일행위'라는 허구의 논리를 만들어냈다는 게 주익종의 주장이다. 친일청산론이 1948년이 아니라 1965년에 처음 나왔다는 해괴한 논리인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 제18장은 반민특위와 친일청산의 고리를 끊고, 100년 적폐인 친일적폐의 청산을 저지하려는 극우 뉴라이트들의 고심이 묻어나는 흔적이다. 앞으로 친일청산에 좀 더 속도가 붙게 되면, 동종의 대응 논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태그:#반일 종족주의, #친일청산, #반민족행위, #반민특위, #반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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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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