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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역 태극기 집회에서 찍은 사진.
 서울역 태극기 집회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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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에서 국부로 추앙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극우파의 상징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보수파가 아니라 실상은 극우파였다는 사실이 우리 눈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의석은 단 2석 밖에 없지만, 우리공화당은 대표적인 극우집단이다. 이 극우 정당이 토요일마다 서울역에서 개최하는 태극기집회에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기도하듯 극우 삼위에게 경례하는 식순이 있다. 그 삼위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다.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더불어 이승만이 토요일마다 서울역 극우 집회에서 경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일이 전광훈 목사에 의해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극우 집회에서는 광화문광장이 이승만광장으로 불린다. 또 이승만이 기독교 관점에서 이상국가를 세우려 했다면서, 이승만의 기독교 입국론을 예찬하는 발언들이 쏟아진다. 민주공화국 체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우파 수령' 이승만의 이미지가 우리공화당과 전광훈 목사에 의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는 셈이다.

민주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그러나...

이승만은 외형상으로는 보수파였다. 형식상으로는 민주공화국 대통령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제국의 황제나 다를 바 없었다. 경찰력으로 백성들을 무력 탄압했고,1954년에는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길에 들어섰다.

정치체제를 과거로 되돌리는 그 같은 일은 당시에 보수의 개념에 포함되기 힘들었다. 거족적인 3·1운동에 힘입어 1919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사실에서 드러나듯, 1948년 정부수립 훨씬 전부터 한국인들은 민주공화국을 바람직한 정치체제로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나 지도층이었다가 해방 뒤 보수파가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그 계승자인 민주당이 이승만에 맞서 민주공화국 수호를 위한 투쟁을 벌인 사실이 그 점을 보여준다. 그 시대 보수파의 눈에도 이승만은 '옛날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대한민국은 헌법상으로는 민주공화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국이었다. 민주공화국으로도 보기 힘들었고, 대한'民'국으로도 보기 힘들었다. 차라리 대한왕국 혹은 대한제국에 가까웠다. 

이승만의 의식 또한 민주공화국과 거리가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 구 대한제국 황실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족 의식 혹은 왕족 의식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이성계의 후예인 전주 이씨였다. 동생인 충녕대군(세종)한테 세자 자리가 넘어가고 자신은 아버지한테 쫓겨난 양녕대군 이제가 16대조였다. 그는 양녕대군의 서얼 후손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그는 황실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서재필의 정치개혁 운동에 동참한 것이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1899년부터 5년간 투옥된 것이 그 예다. 한편, 그는 정반대의 정서도 드러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강한 반발 의식과 적개심을 가졌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족 의식을 강력하게 표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식은 유년기부터 지속된 부친으로 인한 보학(족보학)의 영향, 몰락한 방계로 처졌지만 왕손이라는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그는 구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해 과도한 경계심을 표출했다. 대통령이 된 뒤, 구 황족들의 귀국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1910년 대한제국 황실이 제후급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면서, 황제가 없어지고 이왕(李王)이 자리를 대체했다. 1926년에 초대 이왕인 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복동생 이은(과거의 영친왕)이 이왕 지위를 승계했다. 이은이 지위를 상실한 것은 해방 2년 뒤인 1947년 5월 3일이다. 이날 일본국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가는 법적 근거를 상실하고 소멸했다.
 
 덕수궁에서 찍은 영친왕 이은(왼쪽)과 황실 가족.
 덕수궁에서 찍은 영친왕 이은(왼쪽)과 황실 가족.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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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은 이왕 지위를 상실한 뒤에도 귀국하지 못했다. 이승만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은뿐 아니었다. 13세 때 일본에 끌려가 정략결혼을 했다가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 가둬진 덕혜옹주도 이승만 때문에 제때 귀국하지 못햇다. 결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망명한 뒤에야 그들의 귀국 길이 열렸다. 덕혜옹주는 1962년 1월 26일, 이은은 1963년 11월 22일 귀국했다.

황제나 다를 바 없이 국정을 운영한 사실, 황족 혹은 왕족의 자부심을 표출한 사실, 1947년까지 왕족 지위를 유지한 구 황실을 지나치게 견제한 사실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승만의 정치의식에서는 전제군주제와 무관치 않은 면모들이 드러났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당시 관점으로 봐도 보수가 아니라 극우였다. 보수파인 듯 행동했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1948년에 그는 '취임'한 게 아니라 실상은 '즉위'한 거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이승만의 재임 중은 물론이고 퇴임 후에도 그를 극우파로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보수파로 위장한 그의 허물을 벗기고 극우파의 진면모를 폭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쫓겨난 이듬해에 그 못지않은 극우파가 또 출현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역시 민주공화국 대통령이 됐지만, 실질적으로 전제군주나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겉으로는 보수파로 가장했지만, 실상은 극우파였다.

박정희는 본질적으로 이승만과 똑같으면서도, 오히려 그를 능가했다. 1972년 이후의 유신헌법 체제 하에서는 자기 수중에 있는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국회의원 3분의 1을 뽑도록 했다. 군주가 자문위원을 임명하듯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자기 마음대로 뽑은 것이다. 이승만도 하지 못한, 국회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일까지 과감히 저질렀다.

거기다가 박정희는 이승만보다 6년간 더 재임했다.  이승만보다 한술 더 뜨는 극우파가 청와대를 점거했으니, 이 시대에도 이승만의 극우파 본질을 폭로하기는 여의치 않았다. 간접적으로 박 정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잘 표출되지 않았던 이승만의 극우 본질이 최근 들어 엉뚱한 사람들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이승만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들인 우리공화당과 전광훈 목사에 의해 그의 극우 본질이 명확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승만이 던진 질문 
 
 이승만 저택이었던 이화장에서 찍은 이승만 동상.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재.
 이승만 저택이었던 이화장에서 찍은 이승만 동상. 서울시 종로구 이화동 소재.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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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립 이후 12년간을 이끌었던 대통령이 보수파도 아니고 극우파였다는 사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이는 대한민국 체제를 형성하는 수많은 '부품' 속에 전근대적 극우 이념이 스며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민주공화국보다는 전제군주제에나 부합할 만한 것들이 대한민국의 부품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지금 대한민국을 좀더 철저히 뜯어고쳐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이승만부터 군사정권들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동안 극우파 대통령들이 망쳐놓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독감 걸릴 만한 추운 날씨에 개혁을 저지하겠다며 서글픈 단식을 시작한 황교안 한국당 대표보다 더한 각오와 노력을 보여야만, 대한◌국을 대한民국으로 만드는 개혁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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