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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26일, 방송계의 비인간적인 제작 환경에 문제를 제기하며 스스로 생을 달리한 고 이한빛 PD를 향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한빛에 대한 그리움과 한빛이 주고자 했던 메시지를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기자말]
한빛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정신이 들었을 때 처음 든 생각이 '한빛이 외할아버지와 있겠구나'였다. 한빛을 챙겨줄 외할아버지가 있음에 안도했지만 아버지가 한빛을 만나고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얼마나 놀라셨을까? 스물일곱이 된 한빛을 꼭 껴안으셨을까? 두 손을 꽉 잡아주셨을까?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주셨을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한빛이 안쓰럽지 않도록 마음을 감추시고 의연하게 맞아주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첫 말씀은 무엇이셨을까? 아마도 아버지는 한빛에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을 것이다. 애써 태연하셨을 것이다. 한빛을 이렇게 보낸 나에게 오히려 할 말이 있으셨을 거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에게도 아무 말씀도 안 하셨을 거다. 아버지가 야단을 치며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하셔도 할 말이 없다. 아버지에게 정말 죄송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망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나. 무슨 변명이 통하랴? 한빛이가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것이 무척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 돌아가신 아버지한테까지도 이렇게 못 할 짓을 하는가? 아버지를 존경했다면서 결국 이렇게 갚아야 하는가?

왜 나는 한빛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떠오르는 걸까? 아마도 아버지가 한빛을 키우셨기 때문인 것 같다. 한빛이 태어난 1989년, 아버지는 이미 정년퇴임을 한 70세가 넘는 할아버지셨다. 당뇨도 있고 뚱뚱하셔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걸 힘들어했지만, 아버지는 불편한 시골집에서 기꺼이 한빛을 키워주셨다. 하긴 당시 한빛아빠가 해직되었으니 어쩔 수 없으셨을지도 모르겠다.
  
한빛을 향한 사랑, 할아버지기에 가능했던 일들
 
아버지는 매일 한빛을 데리고 초등학교에 가셨다. 덕분에 한빛은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아버지는 매일 한빛을 데리고 초등학교에 가셨다. 덕분에 한빛은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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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기도 하셨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퇴임하시고도 학교 운동장을 좋아하셨고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를 좋아하셨다. 친정집은 포천초등학교 앞이었는데 아버지는 매일 한빛을 데리고 초등학교에 가셨다. 덕분에 한빛은 매일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 퇴근하다가 교문 안을 들여다보면 아버지는 시소에 앉아계시고 한빛은 운동장을 안방인 양 눕고 앉아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한빛아' 하고 부르면 뒤뚱뒤뚱하며 뛰어와 안기는데 온통 흙투성이라 안아주기가 주저될 때도 있었다.

솔직히 나는 아버지가 온종일 학교 운동장에 앉아계신 게 싫었다. 아버지는 분명 아침부터 가셨을 것이고 한빛이 점심 먹고 나면 또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셨을 것이다. 내가 퇴근할 때까지 그 긴 시간. 한빛은 학교 운동장이 모두 자기 놀이터이고 흙장난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명색이 전직 교장인데 남루한 운동복을 입으시고 종일 하염없이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이 포천초등학교 교사들에게 어떻게 비칠까? 그들이 아버지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그릴까? 행여 아버지를 초라하게 보면 어쩌나 괜한 자격지심도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툴툴대며 짜증 내기도 했다. 배은망덕이었다.

나도 아파트 놀이터에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잠깐도 지루했다. 신문이나 책을 가지고 나가 읽으면서도 내가 먼저 집에 들어가자고 졸랐다. 아버지는 온종일 온 신경을 한빛한테 쏟으신 채 앉아 계셨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외할아버지니까 가능했다는 생각과 함께.

이제는 안다. 나 역시 퇴임 후 가장 편한 곳이 학교 운동장일 것이라는 것을. 가장 밝고 활기찬 기운을 받고 싶을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 학교라는 것을. 그래서 한빛이 손자, 손녀를 안겨주면 무조건 학교 운동장으로 데려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었다. 좋은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빛은 그렇게 외할아버지 밑에서 잘 컸는데 나는 한빛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한빛을 놓쳤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안방 윗목에는 넓은 비닐장판 위에 모래가 잔뜩 쌓여 있었다. 비 오는 날 한빛 실내 놀이터였다. 운동장에서 흙 놀이를 못하니까 아버지가 안방으로 운동장을 끌어온 것이다. 어린 한빛이 비닐 장판 위에서만 놀 리가 없다. 퇴근해 오면 안방과 마루에는 모래가 서걱이며 밟혔다. 아버지는 그저 한빛이가 놀이로서 즐거워하면 그것으로 끝이고 만족하셨다. 수시로 청소해야 하는 엄마는 얼마나 화가 나고 힘드셨을까? 그런데도 나는 피곤에 지쳐 엄마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못 했다. 나쁜 딸이었다. 부모님이 이렇게 키워준 한빛인데 나는 한빛을 놓쳤다.

지금까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빛 변기통을 아버지께서 손수 처리하신 것이다. 마치 아버지가 안 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한 번도 엄마한테 미루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집 화장실은 푸세식(재래식)이었다. 아버지는 한빛이 똥을 누면 초록색 기린 모양의 변기통을 들고 뒷마당 화장실에서 처리하고 다시 앞마당 우물가로 와서 변기통을 물로 닦아 마루 끝에 놓으셨다.

아버지가 힘들게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며 변기통을 청소할 때마다 나도 엄마도 그 모습이 싫었다. 그래서 재빨리 변기통을 가지고 나가면 아버지는 오히려 화를 내셨다. 마치 아버지의 고유 업무인 양하셨다. 나는 이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고 가슴이 뭉클했다. 변기통을 들고 뒷마당으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나에게 실천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진하게 가르쳐주셨다.

아버지, 한빛을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빛을 그때처럼 따뜻하게 지켜 주세요. 한빛은 외할아버지와 함께 있어 외롭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태그:#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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