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7 14:39최종 업데이트 20.01.06 18:21
임정 100주년 탐방의 기회! 무조건 잡아봐야 한다. 특히 학생들과 함께 하는 해외, 그것도 임정로드 탐방! 그 어떤 체험보다 설렜고 교직생활을 하면서 참 얻기 어려운 기회라 여겼기에 행운으로 여기며 나의 가을은 시작되었다.

본교에서는 야구를 하는 소규모 시골학교의 남학생들로 나름 치열한 경쟁 끝에 선발된 1학년 9명, 2학년 5명, 교사 2명으로 구성된 임정로드 팀. 하지만 처음의 설렘은 시간이 흐르면서 강한 책임감과 지도의 부담으로 뒤엉켜 긴장감이 슬금슬금 자리 잡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14일 낮 12시01분에 인천공항을 향해 고속버스를 타는 순간 주사위는 돌이킬 수 없이 던져졌고.


아직은 사춘기도 오지 않은 천방지축들이 절반인데 '이 아이들이 행여 학교 망신, 나라 망신은 시키지 않을까? 귀한 예산인데 돈 낭비나 시키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이 시시각각 밀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하듯 순조로이 첫날 일정은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김종훈 기자가 해설사가 된 것도 큰 영광이고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된다. 그는 첫째 날 '우리 독립운동사의 절반밖에 안 되는 여정에 우리 아이들이 발만 담글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해설'이라고 안타까워하셨지만, 아이들의 눈빛을 생각보다 진지했다. 질문도 하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 발만 담그는 것이 얼마나 역사 인식의 큰 시작이었던가? 

해외에 나간 아이의 소식을 매일 궁금해하시는 학부모들에게 시시각각 사진과 이동 사항을 올려야한다는 부담감으로 한 손으론 사진을, 한 손으론 아이들 통제를, 귀로 대충 듣고 순간순간 떠올랐던 감상들을 되뇌어 아이들과 소소한 감상을 몇 자 적어 본다. 사실 여정과 간접적인 견문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미 탐방한 분들이 쓴 보고서 등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을 듯해 일일이 기록을 생략한다. 

상상만 하던 그곳에 직접 가다
 

홍커우 공원, 윤봉길 의사 생애사적 전시관 내부에는 윤 의사의 동상이 마련돼 있다. ⓒ 류승연

 
첫째 날은 상하이 하면 떠오르는 윤봉길 의사를 만나고 임시정부 청사를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감격과 엄숙함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정확한 위치를 '어딘가'로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1919년 4월 임시정부의 시작 - 첫 청사 서금이로 - 에서의 아쉬움, 두 번째 청사로 추정하여 확정된 곳은 회해중로에 있는 기념관 대신 스웨덴 의류브랜드가 있는 H&M 건물이다. 도산이 미국에서 교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하였다는데 지금은 찬란한 불빛만 가득하다.

김종훈 기자는 여기에 올 때마다 꼭 들러 물건을 한 가지는 산다고 한다. 어둑어둑 시내의 불들이 켜질 때 화장실과 간식을 사러간 아이들을 기다리며 살짝 들어가 쇼핑이라도 하고 싶은 맘이 생기는 것은 끌림일까? 허전함과 안타까움일까? 아침에 홍커우 공원을 들렀다 간 마당로 3층 벽돌집의 아담한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가 역사적 순서에 의해 떠오른다.

몇 십 년을 임시정부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나름 머릿속으로 상상한 그 곳, 초라하지만 어느 정도 보존되어 상상한 모습과 거의 흡사하였다. 비록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곳이 되었지만 상하이에서만 열두 번을 옮겨 다니면서 그래도 젤 오래 머무를 수 있었던 곳. 이제는 오랜 세월의 안타까움과 긴장감 대신 따사로운 햇살만이 주인 없는 빈 대문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상하이 만국공묘인 송경령능원은 대부분 외국인이지만 그 중에서도 임시 정부의 대통령인 박은식, 임시정부의 아버지 신규식, 국무총리 노백린, 국무령 이상룡, 홍진,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김인전, 안태국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들을 일일이 찾고 있는 듯, 혹은 발밑에 놓인 그들의 영혼들이 혹시나 다칠세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는 듯, 중얼거리며 바닥의 비석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심오하고 진지한 모습이 대견하여 한없이 카메라를 눌렀다.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시계를 교환했다는 원창리 13호길에서 홍커우 공원까지는 한 시간 거리란다.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서 김구 선생과 시계를 교환했던 20대 초반 젊은 청년, 독립을 위한 망명의 길에 올라 채소와 인삼 장사 등을 하며 김구 선생과 인연을 맺어 한인애국단에 가입했고 결국은 그의 수통형 폭탄으로 우리 독립 운동의 역사에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제일 처음 들린 홍커우 공원이 또 다시 켭처되어 되살아났다.

어느덧 해는 지고 아시아 최고의 야경으로만 들었던 '황포탄 의거'지인 와이탄의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의 야경에 푹 빠져 쉼 없는 카메라 세례를 다들 받았다. 문득 김익상을 비롯한 오성륜, 이종암 등의 의열단원들이 일본 육군대장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장소, 잠시 그들의 숨결을 느껴보려 했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 비석하나 없어 그 흔적이라고는 느껴볼 수가 없었다.

낯선 땅 상하이에서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고 외교 정책을 펴서 일본을 압박하려는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 새삼 아름다운 야경을 볼 수 있다는 현실에 감사하며 애써 이 아름다운 불빛들이 그들의 영혼이라도 위로해 주길 바라는 맘으로 무거운 발길을 돌렸다. 

임정 요인들의 피난처
              

둘째 날은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가장 먼저 피난해 3년간 머물렀다는 자싱 임시정부 요원들의 피난처를 들렀다. 자싱을 중심으로 주변의 거미줄같이 발달한 운하망을 이용하여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등 인접 도시와 농촌을 오가면서 외교와 군사 및 정보 수집을 활발하게 하였다는 그곳에서 김구 선생의 피난처인 해염의 재청별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망이 아름다운 남북호 주변의 첫 번째 근대적인 별장! 뺨을 스치는 서늘한 기운에 날씨는 좋은데도 바람에 서걱거리는 댓잎 소리는 왠지 처량하고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듯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주가애 부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름만큼 정말 잠시나마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나 싶은 마음에 짠하지만 발걸음은 모처럼 가벼웠다.
   
김구 선생의 피난처 매만가76호, 강을 끼고 피난생활을 할 수밖에 없던 생활의 연속에서 낯에는 뒷문으로 주애보가 젓는 배를 타고 유람하다 해질 무렵 붉은 고추와 검은 옷을 떠올리며 가슴 졸이며 돌아오던 그곳! 그 나날의 흔적은 이제 중국인들이 좋은날 찾아오는 곳, 옆에는 웨딩 촬영을 하는 선남선녀들의 모습이 보일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싶으니 한편으론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은 항저우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다. 1932년 홍커우공원 윤봉길 의거로 항저우로 이전한 두 번째 청사. 처음에는 김철이 머물던 곳을 청사로 사용하다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이곳으로 옮겼단다. 대표적인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독립당 항저우 본부 사무소 터인 사흠방, 임시정부 요원가족 거주지가 있던 오복리를 거쳐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숙소인 군영반점까지 독립운동가의 길을 아이들은 같이 걸었다. 학교 체험활동으로 미루어 조금은 지칠 듯한 여정이지만 아이들의 진지함과 질문 등은 흥미로움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아~, 어~' 하며 안타까워하는 감탄사와 '짜증나~' 하는 단어들, 문장으로 술술 표현하지는 못하는 그들의 감정이 충분히 공감되었다.
   
일본의 개가 되느니 고난의 길을 택한 그들

셋째 날은 차창 밖 중국의 풍토를 한참 감상하다 '천녕사' 입구에 도착했다. 마치 이름 모를 누군가의 산소라도 찾아가듯 산속으로 난 아픈 오솔길을 따라 걷자니 형형색색의 바람개비, 알록달록 즉석에서 쓴 듯한 안내 종이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김종훈 기자가 많이 거론하던 약산 김원봉 독립투사가 중국 장제스의 지원으로 중국 군사교육기관으로 위장해 독립운동군사간부를 교육한 제3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다. 이육사와 정율성이 훈련받은 1, 2기를 합하면 총 125명의 청년들이 여기까지 와서 훈련을 받았다. 지금은 정문 주춧돌과 오동나무가 미미한 흔적을 간직한 채 현판의 '천녕사'라는 희미한 글씨 또한 오랜 세월의 애환을 말해 주는 듯 했다.

김종훈 기자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을 목표로 천녕사의 독한 모기보다 더 독하게 '일본의 개가 되느니 고난의 길을 택한 그들'에게 김원봉 선생의 모습이 그려진 세상에 하나밖에 없다는 티셔츠를 입고 손수 챙겨간 막걸리 한 잔을 올렸다. 이어 우리 아이들도 하나 둘 얼른 나가 술 한잔 올리는 모습에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격과 이육사, 박열을 비롯한 몇 분외는 한 번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이 훅 밀려왔다. 핸드폰에 교재에 아이들 짐을 들고 얼른 술 한 잔 올리지 못한 용기가 못내 아쉬웠다. 

난징의 대도살기념관이라 부르는 난징대학살기념관!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능가하는 비극의 역사라 칭하는 소름끼치는 곳. 삼광 작전이라는 무차별한 학살로 희생된 이들의 벽에 걸린 얼굴들이 불빛을 받아 마치 무수한 별들의 천국처럼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것이 일본의 만행이다. 모두가 힘이 없어 당한 일이라는 사실 앞에서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실이 국가를 막론한 침략과 전쟁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나아가 중국어, 영어, 일본어로 명시되어 있는 것이 이 현장을 일본은 꼭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임정 로드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아이들에게도 그들에 대해 원망과 증오가 본질이 아니라고 우리는 강조하지만 새삼 분노가 치밀어 오름은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김구 선생이 뱃사공 주애보와 잠시 살았다는 회청교, 고물쟁이로 신분을 위장한 채 주애보와 5년 가까이 실질적인 부부로 지냈다는 다리 밑 생활은 김구 선생도 난징으로 떠나면서 자싱으로 주애보를 돌려보내면서 막을 내렸나보다. 어디 '여자의 일생만 일생이던가?' 갑자기 한 평생을 오로지 '광복'을 위해 '조국'을 위해 젊은 영혼의 청년이 이국 땅에 숨어살면서 청춘을 다 한 것. 물론 청춘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간 영혼들이 어디 한 둘이겠냐마는 '대한민국'의 국호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신 분.

하얀 국화 한 송이 던지면서도 수많은 인생과 영혼 뒤에 그들을 일일이 기억해 주지 못하는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로 더 많이 부르지 못했던 우리들이 한없이 미안하고 아니 무엇보다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 날은 하루 종일 가슴 한 켠에 담았던 여운이 숙소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김구 선생이 장제스와 만남을 준비했던 그 장소 중앙반점. 선생이 장제스와의 회담을 치밀하게 준비한 덕에 독립에 대한 유의미한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곳. 장제스 총통은 김구선생과 회담 후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면서 우리한국 청년들이 정식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곳에서 하룻밤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었다. 회담장은 중앙반점 뒤쪽에 위치한 총통부이지만 이곳에서 머물렀다는 기운 탓인지 이틀째 뜬 눈으로 지샜건만 중앙반점에서의 달콤한 잠자리는 잊을 수 없다. 유독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남학생들에게 '평생에 한번 오기 힘든 곳'이라고 큰소리치며 저녁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틈나는 대로 강제로 인증사진을 남겼다.
         
아이들의 순수한 다짐
 

중국 난징(남경)에 있는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벽면에 있는 70명의 위안부 할머니 사진. 사진 밑에는 항상 마르지 않는 흙이 있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눈물을 상징하고 있다. ⓒ 조정훈

 
아! 마지막 날인가! 따지고 보면 거제도에서 출발한 긴 여정일 수도 있건만 아침을 중앙반점 조식으로 여유있게 시작하고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이번 여정에 대한 우리 아이들의 반응에 출발 전 우려했던 스트레스가 오히려 스트레스가 된 듯해 서서히 맘의 긴장을 늦출 찰라 시간은 반나절 밖에 안 남았다.

리지샹위안소 유적 진열관에 우리 1학년이 입장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르면서 두고두고 아쉽다.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 역사교과서 등 '위안부' 하면 대표적으로 나오는 사진, 지나온 3년이라는 치욕적인 시간도 평생에 굴레가 되어 미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게 이상할만도 하다. 그 긴 세월을 지나면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악령같은 기억들에 얼마나 몸서리치며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했겠는가?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어 결국 입 다물고 죽어간 영혼들. 벽면을 타고 흐르는 그녀들을 눈물을 보았는가?

"내가 있던 곳이 여기라고, 내가 이 사람이다"라고 현장 증언을 한 19번방의 박영심 할머니의 가슴은 또 다시 천 번 만 번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같은 여자로서 살점이 아리고 온 몸이 떨려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목 놓아 통곡할 수도 없고 뜨거운 눈물을 들키기 싫어 살짝살짝 비칠라치면 눈치 빠른 태준이는 "샘, 야구로서 일본을 이겨 줄게요. 꼭 이길거예요. 할 수 있어요"라고 몇 번이나 따라다니면서 중얼거린다. 마냥 철부지 같은 우리 아이들도 할머니들의 사진과 유적진열관을 보면서 속으로 아파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리라.

할머니들이 쓰던 유품 하나하나는 더 가슴을 저리게 했다. 치욕적인 생활을 하던 이팔청춘의 어린 꽃다운 영혼들은 고국에 엄마 품에 돌아가리라는 마지막 소망을 거울 속의 자기 머리에 핀을 꽂으며, 어설픈 분을 뽀얀 볼에 바르며 다짐하고 다짐하지 않았을까?

시간은 흘러 마지막 일정의 끝은 공항으로 이어졌다. '정들자 이별이라더니' 역시 서울 천왕중학교 누리단 14명과 살짝 정 들라하니 헤어짐이라 아이들은 못내 아쉬워했다. 아니, 상하이-자싱-항저우-난징. 전체 경로의 절반에 불과한 여기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것이 아쉬웠을까? 3박 4일간의 일정이 우려와는 반대로 후다닥 지나 이제야 아이들을 내려놓을 쯤에 발길을 돌려야 된다. 전날 강연에서 <임정로드 4000㎞>, <약산로드 7000㎞>라는 김종훈 기자의 책을 받기 위해 기를 쓰던 태준이 상준이, 결국 아이들은 책 한 권을 선물 받아 가슴에 안고 거제로 발길을 돌렸다.

선물로 받은 의열단 약산 김원봉 추적기 <약산로드 7000㎞>는 독서를 딱히 생활화하지 않는 운동부 우리 아이들이 교실에 돌리면서 읽기 시작했고 내 손까지 오기는 한참을 기다려야할 듯하다. 

이번 탐방을 통해 우리 아이들은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김구, 윤봉길, 안창호라는 고유명사 외에도 많이 거론된 고유명사 약산 김원봉을 비롯한 상남자 김익상, 임시정부의 아버지라 칭하는 예관 신규식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름 등을 기억하고, 비록 반 토막 난 독립운동의 길이지만 그 길에서 울고 웃던 기억이 언젠가 온전하게 하나의 길로 연결되어 그 길로 이어 걸어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한다.

또한 1학년은 내친 김에 <말모이>라는 교과 관련 영화를 3시간에 걸쳐 감상했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액션물도 코믹물도 아닌 아이들 흥미가 없어 집중도가 떨어질 것 같아 미뤄 두었던 것인데 감상후의 자유 토론은 깜짝 놀랄 만큼 예상을 뒤엎었다. 임정의 길에서 틔운 싹이 교실에서 자라나는 듯 문장 하나의 표현이 겨우 주어, 서술어, 목적어로 밖에 잘 안 되고 표현하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이 서너 문장으로 서로 손을 들며 발표를 하지 않는가? 

'말과 글을 지키고 살리는 것도 독립의 바탕이라고, 사전의 원고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희생된 조선어학회 회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도 진정한 독립투사라고, 심지어 까막눈 김판수 같은 분이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흥분으로 이어지는 아이들은 제각각 자신이라면 나라 잃은 설움과 분노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아, 이것이 역사의 산교육인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발견하나 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우리 아이들의 진지한 토론에 숨죽이며 돌아서 '임정로드'에서 '약산로드'까지 현장체험의 기회를 널리 실현하는 것이 고난의 길을 희망의 길로 만드는 우리 교사들의 작은 보탬이 아닐까하는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문득 "내년 수학여행은 임정로드로 다 같이 갑시다"라는 먼저 다녀온 역사 샘의 말에 엄지 척~ 하면서 한편으로 '가까운 서울 곳곳에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관련된 유적들도 많은데 아니 현충원부터 가서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한 번 불러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어본다. 

'독립운동사' 교과 관련 수업을 하면서 앵무새처럼 지껄인 지난날의 모습에 갑자기 뒤통수가 뜨거워지고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떨쳐 버릴 수 없는 먹먹함과 아련함, 이 모든 순간을 공유할 수 있게 기회를 주신 '한국교직원공제회'와 <오마이뉴스>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나아가 임정 100주년 역사 탐방은 앞으로도 계속되어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공유하여 살아있는 산 역사 교육의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불어 이번 탐방에 동행해 주신 모든 분들! 임정로드, 약산로드에서 또 다시 만나길 소망합니다.

오늘은 수업을 마치고 오다 문득 '11월의 독립투사, 임시정부의 아버지 박은식'이라는 게시판의 게시물이 반짝 눈에 들어온다. 정말 반갑다. '국어와 국사가 살아있으면 나라가 상하지 않는다'라고.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쓴 신부선 시민기자는 외포중학교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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