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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이번 주 한두 차례 더 불러 조사하고 구속영장을 청구할지 검토할 전망이다. 웅동학원 채용비리·위장소송 혐의를 받는 조 전 장관의 동생 조모 씨는 18일 재판에 넘겨진다. 지난 8월 말 이번 수사가 시작된 이후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지는 조 전 장관 일가는 5촌 조카 조범동씨와 부인 정경심 동양대 교수에 이어 동생 조씨가 세 번째다. 사진은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의 모습. 2019.11.18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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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윤석열 검찰총장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검찰총장들은 32년째 '법정 임기'를 보장받고 있다. 총장 임기를 법으로 보장하는 제도는 1988년 12월 31일 검찰청법 개정으로 생겨났다. 이 법 제12조 제3항은 "검찰총장의 임기는 2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때까지 역대 총장의 임기는 평균 1년 6개월 정도였다. 평균이 1년 6개월이라 하여, 그들의 임기가 1년이나 2년 사이에서 형성된 것은 아니다. '평균'이란 말이 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총장들의 임기 차이는 매우 컸다.

검찰총장의 임기

그때까지 최장수 총장은 제3공화국 때의 신직수 총장(7년 6개월)이고 최단명 총장은 제5공화국 때의 정치근 총장(5개월)이다. 신직수는 군법무관 출신인 데다가 검찰청 근무 경력도 짧았다. 총장이 되기 2년 5개월 전인 1961년 7월에야 서울지검 검사가 됐을 뿐이다. 그 전까지는 군에서 복무했다.

그런 그가 검찰총장 자리를 7년 이상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육군 5사단 법무참모' 경력이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1955년부터 2년간 그곳 사단장은 박정희였다. 신직수는 그때 그곳에서 법무참모로 근무했다.
 
 1974년 4월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의 중간수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1974년 4월 당시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의 중간수사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신직수는 중앙정보부장을 하기 전 검찰총장(1963.12~1971.6)과 법무부장관(1971.6~1973.12)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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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생인 정치근은 당시로서는 꽤 큰 키인 177센티미터의 소유자였다. 울산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 경남고 재학 당시 축구선수였다. 체구와 체력이 대단해 별명이 황소였다. 1982년 12월 16일자 <경향신문> 기사 '정치근 검찰총장, 공안 분야서 잔뼈 굵은 소신파'는 그를 "과묵하고 치밀한 성격"이라고 보도했다.

정치근은 전두환 정권 때인 1981년 12월 총장이 됐다가 이듬해 5월 물러났다. 5개월 만에 물러나는 불명예(?)를 안은 것이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전두환 처삼촌인 이규광까지 연루된 장영자 어음사기로 세상이 떠들썩하게 되자, 전두환 정권이 국면 쇄신용으로 내각 개편을 단행한 결과였다.

그 '불명예'의 실상은 이랬다. 개각이 발표된 1982년 5월 21일 오전, 그는 자신이 법무부장관으로 영전된다는 뉴스를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과묵하고 차분하다는 평가를 받던 177센티미터의 이 검찰총장은 "21일 오전 10시 반 방송 뉴스를 듣고 자신의 장관 임명 사실을 처음 알았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82년 5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 '관계없는 부처의 경질에 어리둥절한 표정'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가 최단명 총장이 된 것은 뭔가를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희대의 사기사건인 장영자 사건의 국면 전환용으로 내각을 일신하는 기회에 전두환이 그를 법무부장관에 임명했을 뿐이다. 참고로, 1988년 이전을 포함해서 역대 최단명 총장은 김대중 정권 말기인 2002년 11월 임명된 김각영 총장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의 검찰개혁에 반발해 4개월 만인 2003년 3월 물러났다.
 
 국회 법사위에서 정치근 법무부장관이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82.6.1
 국회 법사위에서 정치근 법무부장관이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8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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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직수와 정치근, 이 두 사람뿐 아니라 1988년 이전까지의 역대 총장들은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장수할 수도 있고 단명할 수도 있었다. 검찰총장으로서의 객관적 성과보다는 집권자의 의중이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총장의 임기가 좌우되곤 했다.

1987년판 촛불혁명인 6월 항쟁 이듬해에 총장 임기를 보장하는 법 개정이 이뤄진 것은, 역대 총장들의 초라한 처지에 대한 사회적 비판 의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검찰을 정치로부터 독립시키려면 총장 임기부터 법으로 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였다.

방송 뉴스에 귀를 기울이는 정치근의 1982년 5월 21일 모습은 검찰 업적으로 승부를 보기보다는 대통령 의중에 목숨을 거는 역대 총장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총장 임기제 규정은 이런 일이 더는 재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개혁적 조치였다.

임기제 총장 첫 수혜자는 '김똘똘'

이 조치에 따라 최초의 임기제 총장이 된 인물이 김기춘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 및 블랙리스트 사건 등으로 세상의 질타를 받고 추락해 있는 김기춘이 1988년 그해에 49세 나이로 최초의 임기제 총장이 됐다.

그가 총장이 된 날은 그해 12월 6일이다. 총장 임기를 보장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통과된 날은 그달 31일이다. "이 법 시행 당시의 검찰총장의 임기는 그 임명된 날로부터 기산한다"는 개정안 부칙에 의해 그는 2년 임기를 보장받게 됐다.

최초의 임기제 총장이 됐다는 사실은 김기춘 개인에게 상당한 영광이었다. 1987년판 촛불혁명의 혜택을 그가 그런 식으로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헌법인 1972년 유신헌법을 기초할 당시, 그는 신직수와 함께 이 작업에 참여했다. 박정희 정권은 6월 항쟁을 당한 전두환 정권보다도 훨씬 더 반역사적인 정권이었다. 그런 정권을 위해 복무했을 뿐 아니라 박정희로부터 '김똘똘'로 불리며 총애까지 받았던 김기춘이다.

그런 김기춘이 6월 항쟁의 수혜자가 된다는 것은 부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만 쟁취했을 뿐 정권을 바꾼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시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김똘똘'의 승승장구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은 검찰에게 정권 눈치도 보지 말고 권력과 유착도 하지 말라고 총장 임기제를 만들어줬다. 이 제도는 그 같은 국민적 열망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김똘똘'은 그런 열망을 외면했다. 오히려 이를 이용해 검찰권을 강화하는 데만 치중했을 뿐이다.

김기춘은 총장 임기제를 검찰과 권력의 유착을 끊는 기회로 활용하지 않았다. 이 점은 그가 '5공 비리 수사'로 불리는 전두환 부정부패 수사를 용두사미로 종결해버림으로써 전두환의 동지인 노태우 정권을 보호한 사실, 6월 항쟁 이후의 보수 세력 약화에 제동을 걸고자 1989년에 그 유명한 공안정국을 조성한 사실 등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노태우 정권과 제휴하고 국민의 민주·통일 열기를 견제하는 쪽으로 자신의 권한을 사용했다.
 
 지난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지난 1989년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이 검찰청에서 현안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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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최초의 수혜자가 된 총장 임기제는, 그런 그를 정치적으로 보호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국민과 재야와 야당의 힘이 거세지던 그 시기에, 그는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잘못하면 이로 인해 총장직에서 밀려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법에 정해진 임기제가 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총장 임기제가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김기춘을 보면서 누구보다도 치를 떤 인물이 김대중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였다. 그는 검찰총장 임기를 보장해줬더니 도리어 민주탄압으로 되돌아왔다며 분노를 표시했다. 1989년 9월 30일자 <동아일보> 기사 '김 평민 총재, 검찰 중립성 믿고 임기 보장해주니 탄압에 앞장'은 이렇게 보도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30일 기자들과 만나 '4·19 때는 경찰이, 그다음에는 안기부가, 그리고 지금은 검찰이 권력의 도구로 민주 인사를 탄압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며 검찰을 맹비난.

김 총재는 특히 김기춘 검찰총장을 겨냥, '검찰의 중립성을 믿고 우리가 임기도  2년으로 보장해 주었는데, 이제는 반민주적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며 '국민과 검찰 자체를 위해서도 그냥 놔둬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강경 방침을 표명."

하지만 김대중의 강경 방침은 별 효과가 없었다. 평민당은 그의 파면을 추진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임기 2년을 정확히 채워 1990년 12월 5일 총장실을 비웠다. 5개월 뒤부터 그는 법무부장관실로 출근했다.

권력의 시녀였던 검찰에 독립성을 부여하면 검찰이 올바로 설 줄 알았다. 그래서 6월 항쟁 직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검찰총장 임기를 보장해주는 등의 방법으로 검찰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그 결과는 국민들이 예측한 것과 정반대였다. 검찰은 그 힘으로 도리어 국민들을 억압했다. 그리고 임기제는 검찰의 보호막이 되었다.

임기를 보장받은 총장이 도리어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국민의 열망을 짓밟는 일은 김기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다. 그는 그냥 처음이었다.

국민들이 선사해준 임기제라는 방패 뒤에 숨은 검찰이 도리어 국민들을 억압해온 것은 우리 시대의 부조리한 모순이다. 국민들이 선물해준 권력을 행사하면서도 조금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을 보여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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