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12 19:51최종 업데이트 20.01.2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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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미국 뉴욕 시장 드 블라지오는 뉴욕시의 경찰들에게 시 전역의 보안 강화를 지시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된 타임스퀘어 볼 드롭 행사가 무사히 끝난 지금은 좀 느슨해도 되는 시기다. 하지만 뉴욕은 더 심한 검문과 검색으로 새해를 시작하고 있다.

이런 뉴욕시의 이례적인 보안 강화 조치는 바다 건너 이라크 땅에서 벌어진 이란 군사 리더의 사망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의 승인하에 드론으로 이란의 지도자가 암살된 이 사건은 미국, 그중에서도 상징적인 도시 뉴욕시 전역에 전쟁과 테러의 우려를 높였다. 
 

맨해튼 중심가에 설치된 뉴욕 경찰의 바리케이드 ⓒ 최현정

 
지난 9일 목요일, 해가 지자 바람은 더 거세졌고 기온은 뚝 떨어졌다. 뉴욕 시청과 법원, 연방정부 빌딩으로 둘러싸인 맨해튼 남부 포리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주섬주섬 자신들이 만들어 온 피켓들을 꺼내 놓았다. 

"우리는 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무모한 트럼프, 위험해진 미국."
"트럼프/펜스 아웃 나우."



새해 1월 1일,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이란의 군사 리더 카심 슐레이만의 암살을 명령했다. 이라크 땅에서 미국이 벌인 이 작전에 전 세계는 경악했고, 여기저기서 '제3차 세계대전'이란 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타국 군사 리더를 암살한 대통령을 둔 미국 땅에 사는 사람들도 그 무모함에 할 말을 잃은 분위기다. 희망을 말해야 하는 새해가 전쟁과 테러의 공포로 시작된 것이다. 뉴스를 보며 조심스레 비슷한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 많은 데 가지 말고 유명한 장소도 한동안 피해 다니자고. 3000여 명이 숨진 9.11 테러를 겪었고, 또 테러를 당할 만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그런 정부의 무모함을 가만히 두고 봐서는 안 되겠다는 사람들이 이날 이 자리에 모였다. 트럼프 타워를 마주보고 있는 콜럼버스 서클에서, 또 뉴욕 시청사와 연방건물이 있는 포리 광장에서 퇴근 시간인 오후 6시를 기점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피켓을 들었다. 이 집회는 이 날 미 전역 360여 곳에서 동시에 펼쳐진 반전 집회 중 하나였다.

포리 광장에 모인 약 300여 명의 사람들은 앞에 나선 연사만큼이나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반전 집회중인 뉴욕커들이 내게 한 말들
 

브루클린에서 온 레이나 ⓒ 최현정

 
"미국의 적은 이란이 아니에요. 전쟁을 부추기고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몰아넣는 이들이 진짜 미국의 적이죠."

뒷줄에 서 연단의 연설을 지켜보던 레이나.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혼자 브루클린에서 왔단다. 새해 뉴스를 보면 곧 전쟁이 날 것 같아 답답한 마음에 이 곳에 나왔다. 자신에게도 이란인 친구들이 있는데 가족을 만나러 이란에 머물고 있는 그들이 너무 걱정된다고 했다.

그녀의 말처럼 집회장엔 이란 국기가 드문드문 보였고 "평화"라고 쓴 아랍 글자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녀가 들고 있는 푯말처럼, 뉴요커는 이란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외치고 싶다 했다. 다른 360여 곳 미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같은 피켓이 들려 있을 것이다. LA는, 시카고는, 덴버는, 시애틀은 이란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그녀의 말처럼 이번 주 나온 여론조사에서 62%의 미국인은 '이번 사건으로 전쟁이 쉬워졌다'고 대답했다. 52%의 미국인은 '미국이 안전하지 않아졌다'고 답했다. (USA Today 공동 여론조사)
 

"난 이라크전을 찬성한 사람이었어." 퀸즈에 사는 제임스 ⓒ 최현정

 
"2003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나는 전쟁을 지지한 사람이었어요." 

꽤 먼 퀸즈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는 질문에 제임스는 대뜸 과거 고백으로 얘기를 시작한다. 당시 자신은 어리석었고 지금은 누구보다 전쟁을 반대해 이 곳에 나왔다고.

그는 트럼프가 전쟁을 일으키려는 이유가 하원을 통과한 탄핵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여론조사에서도 47%의 미국인들은 '탄핵이 이번 암살의 원인'이라고 답했다. 현재의 전쟁 고조 분위기는 탄핵 위기에 놓인 트럼프 대통령의 묘책이라는 것이다. 

트럼프의 재선을 원치 않는 제임스가 지지하는 대선 후보는 민주당의 엘레자베스 워렌과 버니 샌더스다. 아직 민주당의 후보 윤곽이 나오지 않은 상태지만 시간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트럼프를 이길 상대로 두 사람의 진보 후보 중 최종 지명된 이를 무조건 지지할 생각이다.
 

아빠와 지하철을 타고 참가한 10살 셀샤. ⓒ 최현정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나쁜 일이에요. 그래서 나는 반대하러 나왔어요."

초등학생인 셀샤는 대열 맨 앞에서 2시간 동안 모든 연사들의 연설을 자세히 들었다. 아빠와 함께 브루클린에서 지하철을 타고 온 10살 소녀는 어른들만큼이나 지금의 상황을 걱정하고 있었다.

춥지 않았냐고 하니 고개를 저으며 "지금 대통령이 하는 일이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나오게 됐다"고 똑똑히 대답한다. 그러면서 "미국을 정말로 위대하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 달라"고 대통령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는다. 셀샤는 "내일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오늘 집회 얘기를 해줄 거"라면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이밖에도 한국을 잘 안다는 존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줬다. Remove Trump(트럼프를 해임하라)라고 적혀있는 종이 뒷면에는 트럼프 탄핵에 중립적인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의원 사무실에 전화 압력을 넣어 트럼프 탄핵에 동참시키자는 내용이다. 존은 한국 대통령이 탄핵 당했다는 사실과 국민들이 촛불로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 한국처럼 잘되길 바란다는 인사를 해줄 수 있어서 나도 기뻤다. 

시티 칼리지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는 레베카는 교육자로서 이 사태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의 나라를 공격하고 군수물자를 구입하는 데 미국의 재정이 낭비되는 것에 반대한다. 그 돈은 국민들의 열악한 건강보험과 더 열악한 교육을 위해 투자되어야 한다고 했다. 다양한 인종의 그녀 학생들처럼 이란, 레바논 등과도 적이 아닌 친구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무대 앞에 선 연사들은 40년여간 계속된 미국의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조치를 성토했다. 이미 전쟁보다 더한 빈곤의 삶을 살고 있는 이란 국민들에게 뉴욕에 살고 있는 미국인으로 미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를 함께 하고 있었다.

"주권자가 정부 심판 하자"
 

시위 참가자가 반전 라이트를 만들어와 밝히고 있다. ⓒ 최현정

  

트럼프 대통령을 비난하는 피켓들 ⓒ 최현정

  

광장에 모인 이들이 연설을 경청하고 있다. ⓒ 최현정

 
광장에 모인 뉴요커들은 테러도 전쟁도 더 이상 없기를 바랐다. 적 대신 친구를 만들고, 전쟁 대신 평화가 깃들길 바랐다. 전쟁은 부자들을 더욱 부자로 만들어 주는 일이고 가난한 이들에겐 절체절명의 문제라는 데 동의했다. 전쟁 같은 일은 다시는 우리 세대에 없기를 바라고 기원했다. 그러기에 트럼프 정부가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다들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트럼프 정부가 한국 같은 우방국들에게도 파병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냐고 물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해 트럼프 정부와 잘 지내야 하는 한국 정부의 고민이 깊다고. 전쟁의 상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제임스는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 대답한다. 

"평화를 위해 남의 전쟁을 치러주는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아야 해. 트럼프 정부의 폭주를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같은 뉴요커들을 실망시키는 결정은 하지 않기를 바래. 한국이 현명한 결정을 할 거라 믿어."

언 손을 호호 불며 전쟁 얘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한 연사가 소리 높여 외친다.

"우리는 또 다른 어리석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야 합니다. 국민의 뜻을 왜곡하는 정부는 주권자인 우리가 심판해야 합니다."

무모한 정권의 무모한 전쟁이라는 비극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모든 세계 시민들의 새해 소망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 오는 11월 미국인들이 어떻게 그 주권을 사용할지 세계 시민들은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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