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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이 미군정청 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에서 하지의 소개를 받은 뒤 축사하고 있다(1945. 10. 20.).
 이승만이 미군정청 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에서 하지의 소개를 받은 뒤 축사하고 있다(1945. 10. 20.).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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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인 일본은 단시일 내 제국주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뒤 가장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는 이웃 조선이었다. 그들은 당시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나라와 청일전쟁을 일으켜 먼저 청의 세력을 조선에서 몰아냈다. 그러자 러시아가 이를 견제했다. 일본은 그들과도 한판 붙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미국과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맺고 한국을 꿀꺽 삼켰다.

일본의 야욕은 그칠 줄 몰랐다.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을 강점해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중국대륙을 누에가 뽕잎을 먹듯 야금야금 잠식해 갔다. 이에 미국·영국 등이 중국을 지원하자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미국 태평양함대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전쟁 초기 일본은 파죽지세로 싱가포르, 필리핀, 인도네시아, 버마에 이르기까지 점령하는 등, 그들의 판도를 대폭 넓혀갔다. 하지만 반격에 나선 미국은 1944년 7월 7일 사이판을 점령했다. 이후부터 전세가 크게 반전되기 시작했고, 전대미문의 가공할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미국은 이 원자폭탄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떨어뜨렸다. 두 도시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게다가 일본은 1945년 8월 8일 소련의 참전으로 만주의 관동군조차 맥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최후의 1인까지 결사항전을 표방하던 일본은 마침내 연합국의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할 뜻을 밝혔다.
  
 이승만과 맥아더(1950. 9.).
 이승만과 맥아더(1950. 9.).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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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급해진 미국

미국은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에 매우 다급해졌다. 그 무렵 미군은 한반도에서 1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고, 지리적으로 국경을 인접한 소련군이 곧 한반도를 점령할 상황이었다. 소련 제25군은 곧 동해 청진, 원산, 옹기, 나진 등의 항구에 상륙할 태세였다.

미국은 자칫하다가는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미소 양국이 분할하는 '일반명령 제1호' 초안을 만들어 8월 14일 소련 측에 전달했다.

미국은 이미 한반도에 상륙한 소련이 그들이 초안한 38도선 분할 점령안을 수락할 것인가에 대해 우려했지만, 소련은 이외로 그 다음날 미국의 제안을 수락한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이로써 한반도는 우리 겨레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일제 패망 직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할됐다. 미소 두 나라는 전리품으로 한반도를 두 쪽으로 쪼개 서로 사이좋게 나눠가진 것이다.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이승만, 김구(1946. 2.)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한 김규식, 이승만, 김구(1946. 2.)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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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승만을 남한의 지도자로 간택하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은 38도선 이남인 서울에 진주해 그날부터 미군정을 실시했다. 그들은 한반도 남쪽에 친미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춘추전국시대처럼 군웅할거 하는 많은 인사를 하나하나 저울질했다.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 쟁쟁한 인사들이 물망에 올랐다. 결국 이승만이 낙점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미국 군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 이유는 그가 친미정권을 세우는 데 가장 적절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이승만의 행적을 살펴보자. 그는 1945년 10월 16일 귀국했다. 이승만은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과 하지 미군정 사령관을 만났다. 이들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 직을 모두 거절했다.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그 회장에 추대됐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초기에 조선공산당과 한국민주당 등 좌우익의 거의 모든 조직들이 참여한 단체였지만,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이견과 이승만의 강한 반공주의로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계 인사들은 모두 이 조직에서 탈퇴했다.

1946년 2월 14일 미소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이승만은 미군정이 조직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에 참여해 의장에 선출됐다. 그러나 미군정이 소련군과 타협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그는 의장직을 사퇴하고 지방순회에 나섰다.

그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반대하며, 1946년 6월 3일에는 정읍에서 "남쪽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조직이 필요"하다고 발언해, 38선 이남에서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7년 9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됐다. 그 즈음 미국에는 매카시즘 선풍이 일었다. 반공 일변도인 이승만은 미군부에서 가장 선호하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맥아더와 미 군부의 지지를 받는 이승만의 집권은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김구를 비롯한 다른 민족지도자들은 한낱 들러리에 불과했다.  

그 무렵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이관되자 이승만은 유엔 감시 하에서 실시되는 선거에 참여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은 동대문구 갑 지역구에 단독으로 출마해, 투표 없이 당선됐다. 1948년 5월 31일 국회가 소집되자 선출된 국회의원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그가 의장에 선출됐으며, 7월 20일 국회에서 선거에 의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회국 내각 수상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회국 내각 수상 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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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낙점하다

김일성은 이승만보다 먼저 고국에 돌아왔다. 김일성은 귀국한 지 20여 일 뒤인 평양시민 앞에 나타났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에서 조선해방경축 집회가 열렸다. 이날 김일성은 레베데프 소련정치사령관과 조만식에 이어 세 번째 연사로 나섰다.

그는 '모든 힘을 새 민주조선 건설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인민 대중의 이익을 철저히 옹호하며 나라와 민족의 부강 발전을 확고히 담보할 수 있는 참다운 인민정권을 건설하자,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건국사업에 적극 이바지하자"고 연설했다.

이날 평양시민들은 김일성의 연설 내용보다 그가 매우 젊다는 데 놀랐다. 하지만 젊은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원을 등에 듬뿍 업고 있었기에 38선 이북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는 일은 탄탄대로였다. 게다가 김일성에게는 든든한 항일연군 동지요, 후원자인 최용건과 김책 등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김일성의 집권을 위해 카페트를 깔아주는 데 앞장섰다.
  
 미군정청 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이 축사하고 있다(1945. 10. 20.).
 미군정청 광장에서 열린 연합국환영대회에서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승만이 축사하고 있다(1945.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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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뒤질세라 미국도 김일성이 귀국한 지 한 달 후쯤, 미국에 체류 중인 이승만을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경유시켜 10월 16일 맥아더 총사령관 전용기로 귀국시켰다. 나흘 후인 10월 20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하지 미 주둔군사령관은 이승만을 서울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가운데 조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다. 그는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웠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큰 세력을 가진 분이다."

하지는 이승만을 극구 추켜세웠다. 그러자 이승만은 귀국 일성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연설을 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남과 북에서 정권을 잡는 일은 오너(Owner- 곧 미소 두 강대국)의 뜻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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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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