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29 19:19최종 업데이트 20.04.24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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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의미 없이 핀 꽃은 없듯, 가치 없는 펜도 없습니다. 모든 '쓸 것'은 다 제 나름의 소용성을 내재한 유기체와 같습니다. 물론 영구적인 도구가 아니기에 수명이 있는 건 참입니다. 하지만 음식물처럼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아, 잘만 관리하면 일평생을 넘어 대를 이어가며 쓸 수 있는 특성이 있습니다.

대를 잇는다는 건, 그저 내구성 좋은 물건 하나가 한 세대에서 그 다음 세대로 넘어감을 뜻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신만의 길을 오롯이 걸어오며 켜켜이 쌓아 올린 소회와 애환이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다는 의미입니다. 누군가의 역사가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고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펜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멈춰 있지 않고 움직입니다. 아버지가 수십 년 쓰던 펜 한 자루가 내게로 와 잠시 머물다, 내 자녀의 손으로 옮겨갑니다. 금전적 가치보다 더 귀한 삶의 향이 스며 있기에 금액의 많고 적음은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최신형 차량은 기계적으로 우수한 성능을 보여주는 명확한 특성이 있지만, 만년필은 그와는 사뭇 다릅니다. 펜 표면의 까뭇까뭇한 그것은 마땅히 지워 없애야 할 오염이 아닙니다. 세월에 버무려진 사연이 농익어 서서히 떠올라 융기한 것입니다.

햇김치는 아직 익지 않아 달고 아삭한 특유의 식감이 매력입니다. 하지만 묵은지를 넣어줘야만 제 맛이 나는 요리도 있습니다. 깊은 맛을 좋아하는 이들은 후자를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새 것'과 '옛 것'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서로 다른 '향' '맛'을 의미합니다. 오래된 펜의 가치가 새 것보다 결코 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누구나 마치 전력질주하듯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남들보다 빨라야 하고, 멀리 봐야 하며, 높이 뛰어야만 합니다. 뒤처지지 않아야 합니다. 베이비붐, 386세대로 대변되는 아날로그(Analogue)는 X세대를 거쳐,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로 불리는 밀레니얼, Z세대로 이어져 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디지털세대 가치 기준인 '빠름'은 인간 본연의 속도를 한참 뛰어넘었습니다. 직장에서도 도로에서도 또 집에서도, 느림의 미학을 논하는 건 마치 뒤처진 자의 항변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적응해야만 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속도, 그 본질은 아날로그입니다. 그렇기에 잠깐씩 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모니터 스크린과 버튼을 잠시 옆으로 밀쳐놓고 종이를 꺼내세요. 아무 펜이라도 손에 쥐고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디지털에 대한 '짧은 반란의 시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눌렀다 떼는 순간의 기계적 전기신호를 잠시 끄면, 점에서 시작해 선으로 이어지다 면에서 만나지는 아날로그만의 휴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최초로 클립을 장착한 만년필

"값비싼 만년필은 아니지만, 선물 받은 날부터 매일 써 제겐 정말 소중한 펜이에요. 그런데 책상에서 굴러 떨어졌어요. 펜촉이 심하게 휘어버렸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이 손에 안 잡혀요. 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요. 한번 봐주실 수 있을까요?"

"속상할 그 마음 잘 알아요. 저도 가끔 제 펜 떨어뜨리거든요. 만년필은 앞쪽이 무거워 추락하면 대부분 펜촉이 바닥에 먼저 닿아요. 촉이 휜 정도에 따라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도 있고, 손대기 힘든 경우도 있어요. 일단 최선을 다해볼 테니 보내주세요. 제가 상태 점검하고 연락 드릴게요."


이번 의뢰자에게 받은 만년필은 워터맨의 제품입니다. 워터맨이 걸어온 발자취는 만년필이란 '쓸 것'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합니다. 만년필은 1950년대 볼펜이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기 이전까지 매년 수십만 자루가 전세계로 팔려나갔습니다.

업계 선구자인 워터맨은 1905년 최초로 만년필에 클립을 장착했습니다. 오늘날 필기구의 클립은 기능성보다 디자인적인 측면이 더 강조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 동안 전장의 군인들에게 클립의 유용성은 대단했습니다. 군복 상의 포켓 수납시 클립이 없었더라면, 몸을 숙이거나 급한 움직임을 취할 때 빠지기 일쑤였을 게 분명합니다.

엑스퍼트, 까렌과 함께 워터맨 대표라인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헤미스피어는, 1994년 처음 출시돼 26년간 다양한 컬러와 문양을 새긴 모델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이 펜은 기본형에 은근한 장식을 얹어 재해석한 뉴헤미스피어 디럭스 실키 F촉입니다. 팔라듐도금 처리된 캡은 은색으로 빛나고, 블랙톤 바디 위엔 유선형 문양을 심어 기본라인과 차별화를 꾀했습니다.

제품명인 헤미스피어(Hemisphere)는 캡탑 상단의 반구를 뜻합니다. 최초의 만년필 생산업체라는 자부심 가득한 워터맨은 지구를 절반으로 나눈 형상을 캡(Cap, 펜 뚜껑)에 담았습니다. 워터맨은 일부 모델 펜촉 상판에 지구본 형상을 새기기도 했습니다. 세계를 대표하는 만년필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겠다는 야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워터맨 만년필 뉴헤미스피어 디럭스 실키 F촉 ⓒ 김덕래

  

워터맨 만년필 펜촉 상판의 지구본 문양 ⓒ 김덕래


펜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이 펜은 떨어뜨린 상태 그대로 한동안 보관만 한 펜입니다. 그냥 서랍 속에 넣어놓고 잊었을 겁니다. 펜촉과 피드(Feed) 틈새로 보이는 잉크 잔여물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펜을 보면 사용자의 성향이 드러납니다. 볼펜을 긋듯 꾹꾹 눌러가며 쓰는지, 펜촉을 내 몸 방향으로 과하게 틀어 쓰는지 어떤지, 가끔 세척은 해주는지 아닌지 등등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펜촉을 틀어진 각도로 오래 쓰면 그 방향대로 닳습니다. 마치 잘못된 포즈로 골프 스윙을 오래 하면, 좋지 않은 자세가 몸에 배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미 망가진 펜을, 세척하고 보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 펜도 다르지 않습니다. 잉크가 주입된 만년필을 방치하면 내부에서 잉크가 서서히 말라갑니다. 물처럼 깨끗이 증발하면 고마운데 잉크에 화학적인 성분이 있어 미세한 가루분말 형태 입자를 만들며 굳어지거나, 슬러지(Sludge)처럼 끈적끈적하게 굳어버리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만년필에 사용되는 잉크는, 볼펜에 쓰이는 유성잉크가 아니라 수성입니다. 물로 꼼꼼히 세척하면 대부분 다시 쓸 수 있게 기능이 회복됩니다. 이 펜은 내부 세척 상태보다 90도로 꺾인 펜촉이 문제입니다. 이 정도로 심하게 휜 펜촉은 살려내기 까다롭습니다. 펴는 과정에서 펜촉이 부러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뾰족한 방법은 없습니다. 펜촉이 누군가 나를 손대고 있다는 걸 모르게 해야 합니다. 아주 조금씩 조금씩 펴내야 합니다. 간혹 급한 마음에 롱로우즈 같은 금속도구로 구부러진 펜촉을 집는 경우가 있습니다. 휜 반대 방향으로 꺾으면 원상태로 복원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대 해선 안됩니다. 반듯하게 펴지는 게 아니라, 한번 더 꺾이고 맙니다.

바닥에 추락한 펜촉을 자세히 보면, 제 아무리 심하게 휜 경우더라도 곡면부가 완만합니다. 살살 달래가며 손보면 살려낼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펜촉보다 강한 금속집게를 사용해 꺾어버리면 아주 급하게, 예리한 각도로 휘어 버립니다. 살려낼 확률이 그만큼 줄어듭니다.

수리시 펜촉보다 약한 손톱만을 사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펜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손톱 끝이 계속 손상되지만, 참 다행히도 손톱은 계속 자랍니다. 거의 반영구적인 수리 도구입니다. 끝 부분을 잘 다듬어가면 어떤 값비싼 도구보다 더 유용합니다. 때때로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정작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워터맨 뉴헤미스피어 만년필 휘어진 펜촉 ⓒ 김덕래


  

워터맨 뉴헤미스피어 만년필 휘어진 펜촉 ⓒ 김덕래

 
피드도, 손에 쥐는 그립부 안쪽도, 컨버터 작동 상태도, 모두 손이 가야만 하는 컨디션입니다. 정상적인 만년필이라면 구태여 분해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이 펜은 잉크가 충전된 상태로 손상된 직후 그대로 방치된 만년필입니다. 제 컨디션으로 끌어올리려면 분해한 다음 내부의 잔여물을 말끔히 제거해주는 게 좋습니다. 하나씩 해결해 갑니다.
 

워터맨 뉴헤미스피어 만년필 완전분해 ⓒ 김덕래

 
펜촉을 복원하는 과정입니다.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아주 조금씩 원형에 가까워집니다. 촉이 살아나는 모습은 마치 꽃망울이 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며칠 관심 주지 않다 무심결에 본 꽃봉오리가 활짝 벌어져 있는 것처럼, 펜을 조금씩 매만지다 보면 어느새 구부러진 허리를 반듯하게 편 펜촉이 눈앞에 있습니다.

약간의 긴장과 설렘으로 팽팽했던 시위가 일순간 느슨해지는 기분입니다. 누군가는 마법 같다 하지만, 그럴 리가요. 펜수리는 펜과 대화하는 과정입니다.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으면, 시간을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요.
 

워터맨 뉴헤미스피어 만년필 펜촉 수리 후 ⓒ 김덕래

  

워터맨 뉴헤미스피어 만년필 펜촉 수리 후 ⓒ 김덕래

 
펜촉의 외형을 반듯하게 펴고 나면 잉크를 주입합니다. 쓰고 쓰고 또 씁니다. 최적의 흐름이 나올 때까지 계속 반복입니다. 처음 머릿속에 그린대로의 흐름이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절실해야 합니다. 펜에 깃든 정령은 그 간절함을 외면할 만큼 모질지 않습니다. 

꼭 지금이어야 하는 순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어떻게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런 상황과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닙니다. 시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현실이 될 시간입니다. 반드시 지금이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지난 주말이 제게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고작 차로 두세 시간 달렸을 뿐인데, 10년 가까이 못 본 대학 동기가 거기 있었습니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하루 하루 버텨오는 동안, 바쁘단 핑계가 어느새 입버릇 된 지 오래입니다.

동네에서 가장 맛있다는 보쌈과, 여태 먹어본 것 중 최고라는 막걸리를 잔뜩 준비한 동기는 참 밝게도 웃었습니다. 그의 푸석한 얼굴과 적어진 머리숱이 내 눈에 들어온 것처럼, 내 이마의 주름과 거칠어진 손도 그의 눈에 꽂혔을 게 분명합니다.

친구의 집에서 우리는 서로의 10년을 술잔에 나눠 담아 마셨습니다. 한 잔 한 잔 거침없이 목구멍을 넘어갔고, 지난 10년 세월 속 이야기는 어떤 안주보다 달았습니다. 봉인해 두었던 대학시절을 끄집어내 밤새 곱씹었습니다. 그때도 분명 행복했지만, 우리의 전성기는 지금이어야 합니다.

다음 날 정오가 될 때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함께 밥 한 끼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시골집 부모님처럼 트렁크 가득 이것저것 챙겨주는 친구가 백미러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한동안은 하룻밤 기억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슬몃 입꼬리가 올라갈 걸 압니다.
 

워터맨 만년필 뉴헤미스피어 수리 후, 시필 테스트 ⓒ 김덕래

 
정작 중요한 걸 잊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든 펜 한 자루를 손볼 땐 몇 시간, 며칠도 아까운 줄 몰랐는데, 그렇게 가깝다 생각했던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은 왜 못 냈던 걸까요? 더 빨리 전화하지 못한 걸 후회했습니다. 설 연휴 전에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친구의 손을 잡고, 새해에는 누구보다 많은 복을 받길 기원해주고 싶었습니다. 너무 늦은 후회가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 워터맨(Waterman) : 근대 만년필의 아버지인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Lewis Edson Waterman)에 의해 1883년 탄생한 최초의 만년필 브랜드.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나, 현재 본사는 프랑스에 있음. 2011년 파카社 인수, 올해로 137년 역사를 자랑하는 만년필 업계의 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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